반란 (299)

이계민 출생

by 이 범

시대를 가슬러 1933년 봄, 영광의 산자락 아래 마을 산감의 기와집 안방에서 이계민은 태어났다.
"산감님, 아들입니다!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산파의 외침에 이산갑은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안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큰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가 유난히 힘차게 들렸다.

이산갑의 아내 강지윤 품에 다시 내려놓으며 지윤의 손을 잡고 " 수고했오 부인"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지윤은 미소를 띠우며 이산갑에게 물었다

" 아이의 이름은 ?" 하고 강지윤의 물음에 이산갑은
"계민(啓民)... 백성을 깨우친다는 뜻이네."
이산갑은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 언젠가 이 아이가 조선의 백성을 깨우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기 계민은 건강하게 자랐다.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 이산갑은 아들을 업고 산으로 들로 다니기 시작했다.
"계민아, 이것 봐라. 이 풀 이름이 무엇인지 아니?"
"몰라요, 아부지."
"이것은 쑥이란다. 쑥은 배가 아플 때 약이 되지."
어린 계민은 아버지가 보여주는 식물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작은 손으로 풀잎을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
"아부지, 이건요?"
"그것은 민들레란다. 봄에 노란 꽃이 피지."
"예뻐요!"
이산갑은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 아이에게 조선의 자연을 가르치고, 조선의 말을 가르치고, 조선의 혼을 가르치리라.


첫 번째 깨달음
계민이 여섯 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이산갑은 계민의 손을 잡고 읍내 장터로 갔다.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부지,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어요?"
계민이 일본 헌병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헌병들이 조선인 상인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었다.
"저리 가지 못해, 조센징!"
"예, 예..."
상인은 피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계민은 무서워서 아버지 뒤에 숨었다.
"아부지... 무서워요."
"그래, 무섭구나."
이산갑은 아들을 안아 올렸다.
"계민아, 잘 봐라. 저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다."
"왜 저 사람들이 우리를 때려요?"
"그들은 일본 사람들이란다. 지금은 그들이 힘이 세서 우리를 괴롭히지."
"나쁜 사람들이네요."
"그래... 나쁜 사람들이지. 하지만 계민아."
이산갑은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우리가 더 강해질 것이란다. 그때까지 견뎌야 해."
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력감.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계민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부지, 저도 강해질 수 있어요?"
"물론이지."
"어떻게요?"
"공부를 해야 한단다. 글을 배우고, 지혜를 키워야지."
"그럼 저도 일본 사람들한테 안 당할 수 있어요?"
이산갑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강해지면, 너처럼 강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모두가 자유로워질 수 있단다."
그날부터 계민은 공부에 매진했다. 아버지가 가르치는 한글을, 한자를,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열심히 배웠다.


학당의 학생
여덟 살의 계민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당의 정식 학생이 되었다.
"여러분, 오늘은 세종대왕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이산갑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마루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세종대왕께서는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글, 한글을 만드셨지요."
계민은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우리 글이요?"
"그렇습니다. 한글은 우리 조상들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수업이 끝난 후, 계민은 친구들과 마당에서 놀았다.
"계민아, 너희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응, 우리 아부지는 뭐든 아셔."
"나도 커서 너희 아버지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
계민은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느꼈다.
"근데...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학당을 없애려고 한대."
"정말?"
"응, 어제 아부지가 삼촌이랑 그런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날 저녁, 계민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부지, 학당이 없어지나요?"
이산갑은 놀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니?"
"제가 어제... 들었어요."
이산갑은 한숨을 쉬었다. 아들이 너무 빨리 현실을 알아가고 있었다.
"계민아, 학당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말요?"
"그래. 아부지가 지킬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이산갑은 아들을 안아 올렸다.
"네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도움이란다."
"알았어요, 아부지!"


계민이 열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학당의 학생 중 한 명인 석이가 갑자기 학당에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석이는 왜 안 와요?"
계민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산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석이는... 아프단다."
"그럼 제가 문병을 가면 안 돼요?"
"..."
이산갑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후, 석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뭐라고요? 석이가?"
계민은 믿을 수 없었다.
"왜요? 무슨 병이었어요?"
"영양실조란다."
"영양실조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거란다."
계민은 충격을 받았다. 자기와 똑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웃고 떠들던 석이가 굶어 죽었다니.
장례식날, 계민은 석이의 관 앞에 섰다. 작은 관이었다. 열 살 아이가 들어갈 만한 크기.
"석이야... 미안해."
계민은 눈물을 흘렸다.
"제가... 제가 밥을 나눠줄걸..."
그날 밤, 계민은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계민아, 먹어야지."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싫어요... 석이는 밥이 없어서 죽었는데, 저만 먹을 수 없어요."
이산갑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계민아."
"..."
"석이가 죽은 것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의 잘못이야. 일본 놈들이 우리의 쌀을 빼앗아 가서, 우리 백성들이 굶어 죽는 거란다."
계민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일본... 일본 때문이에요?"
"그렇단다."
"나쁜 놈들..."
계민의 작은 주먹이 떨렸다.
"언젠가... 언젠가 제가 커서 일본 놈들을 혼내줄 거예요!"
이산갑은 아들을 꼭 안았다.
"그래, 그렇게 하렴. 하지만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배워야 해."
"네, 아부지."
석이의 죽음은 계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날 이후 계민은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리고 늘 생각했다.
'강해져야 해. 석이 같은 친구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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