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집 할아버지의 기도
고장 난 것들의 안식처
오전 10시, 골목 끝 작은 수선집 '고치는 집'의 문이 열려 있었다.
주인 최기철, 74세. 그는 50년째 이 자리에서 온갖 것을 수선해왔다. 시계, 우산, 가방, 신발, 심지어 장난감까지.
기철은 작업대 앞에 앉아 오래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고, 작은 도구로 시계 내부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 녀석아... 넌 어디가 아픈 거니?"
기철은 시계에게 말을 걸었다. 50년 동안 해온 습관이었다.
고장 난 물건에게 말을 거는 것.
마치 아픈 환자에게 의사가 말을 거는 것처럼.
"아, 여기구나. 태엽이 헐거워졌네."
기철은 태엽을 조정했다. 그리자 시계가 다시 째깍째깍 소리를 냈다.
"그래, 잘했어. 이제 다시 살아났구나."
문이 열렸다. 30대 여성이 들어왔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어서 오게. 무엇을 고치러 왔나?"
여성은 가방을 하나 꺼냈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가방이었다.
"이거... 고칠 수 있을까요?"
기철은 가방을 받아 살펴봤다.
"음... 손잡이가 완전히 떨어졌네. 근데 이 가방, 오래됐구만."
"네. 10년 됐어요. 엄마가 대학 입학할 때 선물해주신 거예요."
여성의 목소리에 애틋함이 담겼다.
"엄마가 작년에 돌아가셔서... 이거라도 간직하고 싶은데, 고장이 나서..."
"그랬구만..."
기철은 가방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고칠 수 있네. 며칠 걸릴 건데, 괜찮나?"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네?"
"이 가방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지?"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에요."
"그럼 더 잘 고쳐야겠구만. 마음을 담아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여성이 나간 후, 기철은 가방을 작업대에 놓고 바라봤다.
'이 가방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 있구나.'
기철은 조심스럽게 가방을 고치기 시작했다.
물건 속의 이야기들
오후 2시, 중학생 남학생이 들어왔다.
"할아버지!"
"어, 준수 아니가. 왔구나."
준수는 이 동네에 사는 아이였다. 가끔 심부름을 와주곤 했다.
"이거 좀 고쳐주실 수 있어요?"
준수는 망가진 라디오를 꺼냈다.
"이게 뭔가?"
"할아버지 라디오예요. 우리 할아버지."
"네 할아버지?"
"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쓰시던 거예요. 근데 요즘 안 나와요."
준수의 할아버지는 6개월 전 세상을 떠났다. 기철도 장례식에 다녀왔었다.
"할아버지가 이걸로 항상 야구 중계 들으셨거든요. 아빠가 이거 버리려고 하는데... 저는 간직하고 싶어요."
기철은 라디오를 받아 들었다.
"좋아. 한번 봐줄게."
"고칠 수 있을까요?"
"해보자고. 오래된 물건이지만, 마음이 담긴 물건은 꼭 살아나거든."
준수는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준수가 나간 후, 기철은 라디오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 라디오에는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구나.'
오후 4시, 70대 할머니가 들어왔다.
"기철씨, 있나요?"
"어, 순자 할머니. 어서 오세요."
순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이었다. 기철과는 50년 지기였다.
"이것 좀 봐주세요."
순자는 오래된 재봉틀을 가리켰다. 며칠 전 맡긴 것이었다.
"아, 그거. 다 고쳤어요."
기철은 재봉틀을 돌렸다.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머, 정말 고쳐졌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근데 이 재봉틀, 정말 오래됐네요."
"그럼요. 40년 넘었지. 결혼할 때 샀던 거예요."
순자는 재봉틀을 쓰다듬었다.
"이걸로 남편 옷도 만들고, 애들 옷도 만들고... 참 많이 썼지."
"이제는 안 쓰시잖아요. 왜 고치세요?"
"버릴 수가 없어요. 이 안에 내 인생이 다 들어 있는데."
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물건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니까요."
"맞아요. 추억이고, 인생이죠."
순자가 나간 후, 기철은 작업대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세 가지를 고쳤다.
시계, 가방, 라디오, 그리고 재봉틀.
모두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각각의 이야기가 담긴, 누군가의 인생이 담긴 물건들이었다.
전(轉) - 고칠 수 없는 것
저녁 6시,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남편은 아기 띠로 아기를 안고 있었고, 아내는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저기... 이거 고칠 수 있을까요?"
아내가 유모차를 보여줬다. 바퀴 하나가 빠져 있었다.
기철은 유모차를 살펴봤다.
"음... 이건 좀 어렵겠는데요."
"안 되나요?"
"부품이 단종됐어요. 이 모델은 10년 전 거라서..."
부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럼... 새로 사야 하나요?"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부부가 나가려는데, 기철이 불렀다.
"잠깐만요."
"네?"
"비슷한 부품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정말요?"
"네. 약속은 못 하지만, 최선을 다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부부가 나간 후, 기철은 한숨을 쉬었다.
'고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부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했으니 해봐야 했다.
기철은 밤늦게까지 인터넷을 뒤졌다. 중고 부품을 파는 곳을 찾아봤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있다!"
같은 모델의 중고 유모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기철은 즉시 연락했다.
"여보세요? 이 유모차 바퀴만 팔 수 있나요?"
"바퀴만요? 왜요?"
"고치려고요. 손님 것을."
"아, 그러세요? 그럼 드릴게요. 어차피 버릴 거였어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그냥 가져가세요. 좋은 일 하시네요."
기철은 감사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다.'
할아버지의 깨달음
다음 날 저녁, 유모차를 고쳐서 부부에게 연락했다.
"정말요? 고쳐주셨어요?"
"네. 와서 가져가세요."
30분 후, 부부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여기 있어요."
기철은 수리된 유모차를 보여줬다. 바퀴가 완벽하게 달려 있었다.
"와... 새 것 같아요!"
아내가 감탄했다.
"얼마예요?"
"3만 원만 주세요."
"이것만요? 너무 싼데요..."
"됐어요. 부품도 공짜로 얻었고요."
남편이 지갑을 꺼내는데,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아기..."
아내가 아기를 안아 달랬다.
기철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기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6개월 됐어요."
"건강하게 크겠어요."
"할아버지 덕분에 이 유모차 계속 쓸 수 있게 됐어요. 이거 첫 아기 때부터 쓴 거거든요."
"그래요?"
"네. 첫 아기는... 1년 전에 하늘로 갔어요."
기철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이 유모차가 더 소중해요. 첫 아기의 추억이니까요."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서 꼭 고치고 싶었어요. 버릴 수가 없었어요."
기철은 가슴이 뭉클했다.
"잘하셨어요. 소중한 건 꼭 지켜야 해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부부가 나간 후, 기철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랬구나...'
단순히 유모차를 고친 게 아니었다.
첫 아이에 대한 추억을, 부모의 사랑을 지켜준 것이었다.
기철은 자신의 일이 단순한 수선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들의 추억을 지키는 일.
사랑을 이어주는 일.
그것이 자신이 50년 동안 해온 일이었다.
마지막 수선
일주일 후.
준수가 라디오를 찾으러 왔다.
"할아버지, 라디오 됐어요?"
"그럼. 여기."
기철은 수리된 라디오를 건넸다. 준수가 전원을 켰다.
"...3회말 투아웃에서 타자가 들어섭니다..."
야구 중계가 선명하게 나왔다.
준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 됐다! 할아버지 목소리 들을 수 있겠다!"
"네 할아버지 이걸로 야구 들으셨지?"
"네! 맨날 들으셨어요. 저랑 같이요."
준수는 라디오를 꼭 안았다.
"이제 이걸로 야구 들으면...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 같을 거예요."
기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래, 네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계실 거야."
"네!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준수가 뛰어나간 후, 기철은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후, 가방을 맡긴 그 여성이 찾으러 왔다.
"할아버지, 가방 다 됐어요?"
"응, 여기 있네."
기철은 수리된 가방을 보여줬다.
손잡이가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새 것처럼.
"어머... 정말 잘 고쳐졌어요!"
여성은 가방을 들어보며 감탄했다.
"엄마가 사주신 가방... 계속 쓸 수 있겠어요."
"물론이지. 이제 튼튼하니까 오래 쓸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여성은 돈을 내려고 했다.
"얼마예요?"
"만 원이면 돼."
"너무 싼데요..."
"괜찮아.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물건이니까."
여성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에필로그 - 고치는 사람
저녁 7시, 기철은 가게 문을 닫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작업대를 정리했다.
50년 동안 써온 도구들.
망치, 드라이버, 니퍼, 바늘, 실.
모두 낡았지만 아직 쓸 수 있었다.
기철 자신처럼.
74세. 늙었지만 아직 일할 수 있었다.
기철은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봤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30년 전.
아내는 10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여보..."
기철은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사람들 물건 고쳐줬어."
"당신이 항상 하던 말 기억해? '물건을 고치는 건 사람을 고치는 거야'라고."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알 것 같아."
"나는 물건을 고치는 게 아니었어. 사람들의 마음을 고치는 거였어."
"부서진 추억을 이어주고, 잊혀진 사랑을 되살리고,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거였어."
기철은 눈을 감았다.
"고마워, 여보. 이 일을 하게 해줘서."
"덕분에 나도 치유받았어. 당신을 잃은 슬픔에서."
다음 날 아침.
기철은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었다.
"고치는 집 문 열었습니다!"
곧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장 난 시계를 든 할머니.
찢어진 인형을 든 어린이.
망가진 안경을 든 학생.
기철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고치러 왔나요?"
기철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물건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의 인생을 고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이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고장 난 것을 고치고.
부서진 것을 이어주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고.
신은 이렇게 우리를 치유하신다.
작은 수선집을 통해서.
74세 할아버지를 통해서.
50년 된 도구들을 통해서.
기철은 오늘도 일한다.
웃으며, 정성스럽게.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의 소명이니까.
물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치는 것.
그것이 기철이 평생 해온 일이고.
앞으로도 할 일이었다.
작가의 말
우리는 고장 난 물건을 쉽게 버립니다. 하지만 그 물건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추억이, 사랑이, 누군가의 인생이.
제16편에서는 50년 된 수선집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물건을 고치는 일이 어떻게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 될 수 있는지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최기철 할아버지는 단순히 물건을 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의 추억을 지키고, 사랑을 이어주고, 상처를 치유합니다.
버릴 것 같은 것도 고칠 수 있습니다. 시든 꽃도 다시 필 수 있고, 고장 난 물건도 다시 작동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고장 난 것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버리지 말고 고쳐보세요. 그것이 물건이든, 관계든, 꿈이든. 신은 우리에게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