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민의 각성
계민이 16살되던해에
"계민아, 학교 끝나고 집에 바로 와라. 오늘 중요한 얘기가 있다."
아버지 이산갑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거웠다. 계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가 교단에 서 있었다.
"오늘부터 조선어 사용은 완전히 금지한다. 적발되면 체벌이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계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사랑방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어머니 강지윤도 있었다.
"앉아라, 계민아."
계민은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계민아, 너는 이제 열여섯이다. 어린아이가 아니야."
"네, 아부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 조선은 지금 나라를 잃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어. 하지만 이게 영원하지는 않을 거다."
계민은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언젠가는 광복이 올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준비해야 해."
"어떻게 준비해요, 아부지?"
"첫째, 땅을 지켜야 한다.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이 땅을. 그래서 내가 조금씩 네 이름으로 땅을 옮기고 있는 거야."
"알겠습니다."
"둘째, 힘을 길러야 한다. 공부도 하고, 몸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해. 광복이 와도 준비된 사람만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어."
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절대 일본놈들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지 마라.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해도, 속으로는 조선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마라."
"네, 아부지!"
강지윤이 계민의 손을 잡았다.
"계민아, 어미가 한 가지만 더 당부할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네 아부지를 원망하지 마라."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아부지는... 위험한 일을 하고 계신다.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산갑이 아내의 말을 가로막았다.
"괜한 소리 하지 마시오.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요."
하지만 강지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날 밤, 계민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님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하고 계신다고? 그게 뭘까?'
계민은 조용히 사랑방 쪽으로 다가갔다.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아버지와 낯선 남자 두 명이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선생, 다음 달에 자금이 필요합니다.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돈이요."
"알고 있소. 준비해놨소."
"하지만 요새 일본놈들 감시가 심해서..."
"걱정 마시오. 제가 방법을 찾아놨소."
계민은 숨이 막혔다. 아버지가... 독립운동 자금을 대고 계셨던 거였다.
다음 날 아침, 계민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부지, 저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이산갑은 아들을 빤히 쳐다봤다.
"네가 뭘 알고 그러는 거냐?"
"어젯밤에... 들었어요. 사랑방에서 하시는 얘기를."
이산갑의 얼굴이 굳어졌다.
"계민아, 너는 그냥 공부만 해라. 이런 일은 어른들이 할 일이다."
"아니에요! 저도 조선 사람이고, 나라를 위해 뭔가 하고 싶어요!"
이산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학교에서 일본놈들이 뭘 하는지,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잘 들어라. 그리고 나한테 알려줘라. 특히 징병이나 징용 관련된 얘기는 꼭 들어오고."
"네! 알겠습니다!"
계민은 그날부터 학교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일본인 교사들이 하는 말, 읍사무소 직원들의 대화, 헌병들의 움직임.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한 달 후, 계민은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아부지, 다음 달에 우리 동네에서 청년 50명을 징용으로 보낸대요."
"뭐? 50명이나?"
"네, 학교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명단을 만들고 있었어요. 제 이름도 거기 있었습니다."
이산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명단을 봤나?"
"네, 몰래 훔쳐봤어요."
"잘했다. 그 명단을 나한테 줄 수 있겠니?"
"제 머릿속에 다 외웠어요."
계민은 50명의 이름을 줄줄이 외웠다. 이산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구나, 계민아."
"아부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건데요?"
"미리 알려줘야지.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하게 하고, 못 피하는 사람은 최소한 준비라도 하게 해야지."
그날 밤, 이산갑은 은밀하게 명단에 있는 집들을 찾아다녔다. 한 집 한 집 조용히 알려주고, 대비하라고 당부했다.
며칠 후, 징용 명단이 공식 발표됐다. 하지만 50명 중 20명이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읍사무소는 발칵 뒤집혔다.
"명단이 새나갔다! 누가 누설했나!"
일본인 읍장은 분노했고, 헌병대가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계민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산갑은 태연했다.
"계민아, 걱정 마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냥 평범한 농부일 뿐이지."
며칠간의 조사 끝에, 헌병대는 읍사무소 내부에 스파이가 있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사무소 직원들을 심문했고, 결국 한 조선인 서기를 체포했다.
그 서기는 이산갑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헌병들은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계민아, 봤지?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 죄 없는 사람이 대신 잡혀가기도 하고, 진짜 범인은 빠져나가기도 하지."
"너무 불공평해요, 아부지."
"그래, 불공평하지.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거다. 그리고 언젠가 이 불공평한 세상을 바꾸는 거야."
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알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