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100년인것을(96)실패숨기기

우리가 빛나는 방법

by 이 범

Q왜 실패를 부끄러워할까요?
A성공만 보여주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실패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실패담이 누군가에겐 용기가 됩니다.



완벽한 가면
2026년 3월, 서울 강남구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 28살 이준서는 모니터 앞에서 또 하루를 시작했다. SNS 마케팅 팀장이라는 타이틀, 깔끔한 사무실, 그리고 매일 아침 올라오는 '성공한 청년'의 이미지. 그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jun_success는 팔로워 8만 명을 자랑했다.
"오늘의 동기부여!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게시물 아래로 '좋아요'와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하지만 준서는 키보드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에 론칭했던 자체 브랜드는 실패했고, 투자금 3천만 원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부모님께는 여전히 잘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준서 씨, 회의 시작해요."
팀원 지수의 목소리에 준서는 화면을 끄고 회의실로 향했다.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같은 시각, 홍대 근처의 작은 공유 작업실. 27살 박서연은 노트북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3년째 활동 중이지만, 이번 달도 수입은 빠듯했다. 그녀의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는 깔끔했고, 인스타그램에는 화려한 작업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화면 너머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수정 작업, 터무니없는 단가를 제시하는 클라이언트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불안.
서연은 태블릿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봄볕이 따스했다. 대학 동기들은 하나둘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톡방에는 '승진했어요!', '약혼했어요!' 같은 소식만 올라왔다.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서연은 핸드폰을 들어 인스타그램을 켰다. 피드에는 친구들의 행복한 순간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마지막 게시물은 일주일 전 완성한 일러스트였다. 댓글에는 "멋져요!", "재능 부러워요!" 같은 말들이 달려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 작업이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로 세 번이나 엎어졌고, 결국 원래 약속한 금액의 절반만 받았다는 것을.
오후 7시, 준서는 팀원들과의 회식을 핑계로 빠져나와 한강으로 향했다. 요즘 그에게 필요한 건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강변에 앉아 맥주 캔을 따며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메시지함에는 대출 상환 알림이 와 있었다.
"이준서, 너 괜찮은 척하는 거 이제 지겹지 않아?"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답은 없었다.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 "실례지만..."이라고 말을 건넸다. 준서가 고개를 돌리자, 긴 생머리에 낡은 청재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스케치북과 연필이 들려 있었다.
"여기... 좀 그려도 될까요? 빛이 정말 예쁘게 들어와서요."
서연이었다. 그녀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한강을 그리고 싶었다. 준서는 자리를 비켜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그리세요."
"감사합니다."
서연은 준서 옆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필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준서는 힐끗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섬세한 선들이 한강의 풍경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림 잘 그리시네요."
"아... 직업이에요. 일러스트레이터."
"멋지네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거."
서연은 손을 멈추고 준서를 봤다.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피로함이 서려 있었다.
"멋있어 보여요? 저는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것 같은데."
뜻밖의 솔직함이었다. 준서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도 버티는 중이에요. 뭐, 겉으로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연이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우리 참 웃기죠. 다들 겉으로는 잘되는 척하면서 살잖아요."


균열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자주 한강에서 마주쳤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매주 금요일 저녁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가벼운 인사만 나눴지만, 점점 대화가 길어졌다.
4월의 어느 금요일, 준서는 서연에게 커피를 건넸다.
"요즘은 어때요? 일."
"음... 솔직히 말하면, 망했어요. 이번 주에."
서연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큰 프로젝트 하나 따냈다고 좋아했는데, 계약서도 쓰기 전에 클라이언트가 연락을 끊어버렸어요. 열흘 동안 샘플 작업한 건데."
"신고는 못 해요?"
"뭘요. 구두 계약이었는데. 제가 멍청한 거죠."
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게 아니라 믿었던 거잖아요."
"그런가요?"
"저도 작년에 비슷한 일 있었어요. 지인이 투자하겠다고 해서 브랜드 론칭했는데, 막판에 손 털더라고요. 투자금은 제가 개인적으로 빌린 거였고."
처음으로 준서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실패를 말했다. 이상하게 서연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3천만 원... 아직 다 못 갚았어요."
"SNS에서는 완전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던데요. 찾아봤거든요, 준서 씨 계정."
준서가 놀라 서연을 봤다. 서연은 민망한 듯 웃었다.
"궁금해서요. 근데 거기 올라온 거랑 지금 말하는 거랑 너무 달라서 신기했어요."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좋은 것만 보여주고."
"맞아요. 저도 그래요. 인스타에는 완성된 작품만 올리지, 밤새 울면서 그린 건 안 올리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쓸쓸하지만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웃음이었다.
5월이 되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카톡으로, 때로는 전화로. 대화 주제는 주로 일이었지만, 점점 사적인 이야기들도 나왔다.
"준서 씨는 왜 마케팅 일을 시작했어요?"
"대학 때 전공이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돈 될 것 같아서요.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지금은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건지, 그냥 익숙한 건지."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림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요즘은 좋아하는 건지 집착하는 건지 구분이 안 돼요. 이거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두려움에 붙잡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서연 씨 그림은 정말 좋던데요. 제가 봐도."
"고마워요. 근데 좋아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요. 현실적으로."
준서는 대답 대신 서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서연은 놀라 그를 봤지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 좀 슬프게 연결된 것 같네요."
"슬픈가요?"
"음, 아름답게 슬픈?"
6월 어느 토요일, 준서는 서연을 자신의 원룸으로 초대했다. 좁은 방이었지만 깔끔했다. 책상 위에는 마케팅 서적들과 빈 커피 캔들이 놓여 있었다.
"좁아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 작업실보다 넓은데요."
서연은 벽에 붙은 포스트잇들을 발견했다. '3월 대출 상환 50만 원', '부모님 용돈 드리기', '비상금 모으기' 같은 메모들이 빼곡했다.
"준서 씨..."
"부끄러운 거 다 보여드리네요."
준서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보여줄게요."
서연은 핸드폰을 꺼내 통장 잔고를 보여줬다. 28만 원.
"이번 달 수입이에요. 월세 빼면 마이너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슬프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진짜 망했네요."
"완전요."
준서가 서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래도... 이렇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저도요."
그날 밤, 두 사람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서로의 실패담을 나눴다. 준서는 첫 직장에서 실수로 회사 돈 백만 원을 날린 이야기를, 서연은 대학 졸업전시회에서 작품이 하나도 안 팔린 이야기를 했다.
웃고, 울고, 위로하고. 밤은 깊어갔다.


빛을 찾다
7월,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었다. SNS에는 올리지 않았다. 왠지 그들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서연의 작업실에서 준서는 그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준서 씨, 저한테 SNS 계정 하나 만들어줄 수 있어요?"
"새 계정요? 왜요?"
"있잖아요... 제 실패담을 올리는 계정이요."
준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실패담이요?"
"네. 클라이언트한테 차인 이야기, 그림 망친 이야기, 오늘도 망했다는 이야기. 그런 걸 올리고 싶어요."
"근데 그럼... 일 의뢰 안 들어오지 않을까요?"
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 요즘 깨달았거든요. 완벽한 척하느라 너무 지쳤어요. 그리고 준서 씨 만나면서 느낀 건데, 솔직한 게 훨씬 편하더라고요."
준서는 서연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동시에 결연함도 담겨 있었다.
"좋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날 밤, 두 사람은 함께 '@yeon_real_story'라는 계정을 만들었다. 첫 게시물은 서연이 쓴 글이었다.
"오늘도 거절당했습니다. 이번 주에만 세 번째. 제 그림이 상업적이지 않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자신감이 바닥이에요. 하지만 내일도 그릴 겁니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게시물과 함께 실패한 시안들, 수정 요청이 빼곡한 피드백 문서, 그리고 새벽 3시의 작업실 사진을 올렸다.
"올릴까요?"
"올려요."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게시 버튼을 눌렀다.
다음 날 아침,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게시물에 댓글이 수백 개 달려 있었다.
"저도 프리랜서인데 너무 공감돼요."
"혼자만 이런 줄 알았는데 위로가 되네요."
"이렇게 솔직한 계정 처음 봐요. 팔로우할게요."
서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준서를 봤다.
"준서 씨..."
"봤죠? 사람들이 원하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진실인가 봐요."
준서도 용기를 냈다. 자신의 계정에 처음으로 솔직한 글을 올렸다.
"@jun_success를 운영한 지 3년이 됐습니다. 여러분께 동기부여가 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사실 저 자신은 실패 투성이었습니다. 작년에 사업 실패로 3천만 원 빚을 졌고, 아직도 갚는 중입니다. 여러분께 거짓말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게시 직후, 팔로워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8만에서 7만, 6만... 준서는 숫자를 보며 씁쓸히 웃었다.
"괜찮아요?"
서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진짜 저를 봐주는 사람만 남는 게 낫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팔로워 감소가 멈추고,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댓글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히려 이제 더 응원하게 돼요."
"솔직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힘낼게요."
"같이 일어서요. 화이팅!"
8월, 두 사람은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실패를 나누는 모임'이라는 오프라인 모임이었다. 처음에는 다섯 명으로 시작했다. 홍대 카페 한구석에서 각자의 실패담을 나눴다.
20대 후반의 요리사는 식당이 망한 이야기를, 30대 초반의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와의 갈등으로 계약이 파기된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울고 웃었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네요."
한 참가자가 말했다.
"맞아요. 혼자만 못난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모임에는 열다섯 명이 왔다. 세 번째에는 서른 명. SNS를 통해 입소문이 퍼졌다.
9월, 준서에게 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실패 극복기를 책으로 내보는 건 어떨까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같아요."
준서는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서연과 의논했다.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고요?"
"네. 근데 전 혼자는 못 해요. 서연 씨랑 같이 하고 싶어요. 글은 제가 쓸게요. 서연 씨가 일러스트 그려주면 안 될까요?"
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저도 참여할 수 있어요?"
"당연하죠. 이건 우리 이야기잖아요."
두 사람은 그날부터 책 작업에 들어갔다. 제목은 '우리가 빛나는 방법 - 실패를 통해 찾은 진짜 성공'으로 정했다.


함께 빛나다
10월, 첫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날 밤, 준서와 서연은 처음 만났던 한강으로 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6개월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어요. 이런 일들이 생길 거라고."
서연이 말했다.
"저도요. 그때 서연 씨가 말 안 걸었으면 어땠을까요?"
"준서 씨가 자리 안 비켜줬으면 어땠을까요?"
두 사람은 웃었다.
"근데 있잖아요, 준서 씨. 저 아직도 가끔 불안해요. 이게 진짜인가, 다시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고."
준서는 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그래요. 빚도 아직 반밖에 안 갚았고, 미래가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럼 어떡해요?"
"함께 불안해하면 되죠. 혼자 무너지는 것보다 둘이 흔들리는 게 나으니까."
서연은 준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랑한다는 말, 해도 돼요?"
"저도 하고 싶었어요. 서연 씨,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준서 씨."
11월, 책이 출간됐다. 초판 3천 부는 일주일 만에 매진됐다. 서점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서연의 일러스트는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실패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그린 장면들이 인상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SNS에는 책을 읽고 울었다는 후기들이 쏟아졌다.
"이 책을 읽고 회사에 사직서를 냈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실패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두 분의 용기가 저에게도 전해졌어요."
준서의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책 내용을 활용한 강연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 이게 요즘 세대에게 필요한 메시지 같아요. 준서 씨가 우리 회사 대표로 강연해주시면 안 될까요?"
서연에게도 의뢰가 쏟아졌다. 책의 일러스트를 본 여러 클라이언트들이 연락을 해왔다.
"작가님의 그림에 진심이 느껴져요. 저희 브랜드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두 사람은 '실패를 나누는 모임' 마지막 정기 모임을 열었다. 이번에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청했다. 장소를 큰 홀로 옮겨야 했다.
준서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이 모임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됐네요. 처음에는 다섯 명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특별히 서연 씨와 함께 준비한 영상이 있어요.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됐다. 처음 만났던 한강의 모습, 두 사람의 대화, 실패담을 나누는 모습, 책을 쓰는 과정. 그리고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실패를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자유로워졌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제는 제 실패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영상이 끝나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는 점점 커졌다.
서연이 앞으로 나왔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6개월 전만 해도 저는 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실패한 사람,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준서 씨를 만나고, 여러분을 만나면서 깨달았어요."
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실패한 게 아니라 도전한 거였어요. 넘어진 게 아니라 걸어간 거였고요.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는 무너져도, 그래도 계속 가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었던 거예요."
장내는 눈물과 박수로 가득 찼다.
모임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다시 한강으로 갔다. 겨울 한강은 춥지만 고요했다.
"준서 씨, 내년에는 뭐 하고 싶어요?"
"글쎄요. 책 2권 쓰고 싶기도 하고, 강연도 제대로 해보고 싶고. 서연 씨는요?"
"전시회 하나 열고 싶어요. 제 실패의 역사를 담은 전시회요."
"멋진데요?"
"근데 있잖아요..."
서연이 준서를 똑바로 바라봤다.
"뭐 하든 준서 씨랑 같이 하고 싶어요."
준서는 서연을 꼭 안았다.
"저도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 계속 함께해요."
"약속이에요."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한참을 걸었다.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또 넘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2027년 1월, 새해 첫날.
준서는 SNS에 글을 올렸다.
"새해 목표: 올해도 실패하기. 그리고 그 실패를 숨기지 않기."
서연은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같이 실패하자. 그리고 같이 일어나자. 사랑해 "
책은 10만 부를 돌파했고, 두 사람의 강연 신청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패를 나누는 모임'은 전국 십여 개 도시로 확대됐다.
준서의 빚은 아직 반이 남았고, 서연의 통장 잔고도 여전히 빠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때로는 흔들려도, 서로의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어느 일요일 오후, 두 사람은 서연의 작업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준서 씨, 우리 언제부터 사랑한 것 같아요?"
"글쎄요. 정확한 순간은 모르겠어요. 근데 서연 씨가 처음으로 실패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을 때, 그때 이미 끌렸던 것 같아요."
"저도요. 준서 씨가 포스트잇에 빚 갚는 계획 적어놓은 거 봤을 때,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어요. 이 사람은 진짜구나, 하고."
"진짜?"
"네. 완벽한 척하지 않는 진짜 사람."
준서는 서연의 손을 잡았다.
"우리 진짜로 계속 가자고요. 넘어지고, 일어서고, 또 넘어지고. 그렇게 같이."
"좋아요. 우리가 빛나는 방법대로요."
창밖으로 겨울 햇살이 들어왔다. 차가운 듯 따뜻한, 그런 빛이었다. 두 사람은 그 빛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은 여전히 성공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SNS에는 화려한 순간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준서와 서연은 알고 있었다. 진짜 아름다운 것은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함께 일어서는 용기라는 것을.
그들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았다. 때로는 다투기도 했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그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실패를 숨기지 않는 두 사람.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두 연인.
함께 빛나는 법을 찾아가는 청춘.
이것이 2026년, 준서와 서연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사랑하고. 그렇게, 함께.실패 숨기기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