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채우는 방법
감정 소비
Q: 왜 우울할 때 쇼핑하거나 폭식할까요?
A: 일시적 위안을 찾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감정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 왜 우울할까?"를 적다 보면 진짜 해법이 보입니다.
빈 공간
2026년 2월, 서울 마포구의 한 온라인 쇼핑몰 물류센터. 29살 최민우는 오늘도 택배 상자들 사이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물류 관리 팀원으로 일한 지 3년째. 안정적인 직장, 괜찮은 월급, 그리고 매달 늘어나는 신용카드 청구서.
민우는 점심시간에 핸드폰을 꺼내 쇼핑 앱을 켰다. 장바구니에는 어제 담아둔 스니커즈가 있었다. 벌써 열두 번째 신발이었다. 신발장은 이미 꽉 찼지만, 손가락은 저절로 '구매하기' 버튼으로 향했다.
'또 샀네.'
민우는 결제 완료 화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인 기쁨이 지나가고, 이내 공허함이 밀려왔다. 늘 그랬다.
"민우 씨, 오늘 저녁에 회식인데 오시죠?"
동료 재훈이 물었다.
"아...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거짓말이었다. 민우에게는 약속이 없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또 쇼핑을 하고 싶었다.
같은 시각, 강남구의 한 IT 기업. 26살 김하은은 회사 화장실 칸막이에 앉아 배달 앱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지 두 시간밖에 안 됐지만, 또 무언가를 먹고 싶었다.
치킨, 피자, 떡볶이, 햄버거. 화면을 넘기다가 결국 치킨을 주문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주문이었다. 아침에 샌드위치, 점심에 파스타, 그리고 지금 치킨.
'내가 왜 이러는 걸까.'
하은은 거울을 봤다. 6개월 전보다 8킬로가 늘었다. 옷이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먹는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하은 씨, 회의 시작해요."
팀장의 목소리에 하은은 얼른 일어났다. 거울 속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저녁 7시, 민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쌓여있는 택배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 뜯은 것만 일곱 개. 민우는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민우야, 이번 주말에 집에 올 수 있니?"
"아... 엄마, 이번 주는 좀 바빠서요."
"그래? 너 요즘 목소리가 안 좋은데, 괜찮은 거니?"
"네, 괜찮아요. 일이 좀 많아서 그래요."
전화를 끊은 민우는 천장을 바라봤다. 괜찮지 않았다. 전혀. 하지만 어머니께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쇼핑 중독이라고? 돈을 물 쓰듯 쓰고 있다고?
민우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쇼핑 앱을 켜려다가, 이상하게 오늘은 손이 멈췄다.
같은 시간, 하은은 치킨 두 마리를 앞에 놓고 있었다.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았지만, 이미 반은 먹어치웠다. 기름기가 손에 묻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도 몰랐다. 그냥 슬펐다.
핸드폰에 친구 지연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하은아, 요즘 연락이 없네? 주말에 만날래?"
하은은 답장을 고민하다가 '미안, 이번 주는 바빠'라고 보냈다. 거짓말이었다. 그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살찐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치킨을 다 먹은 하은은 배달 앱을 또 켰다. 디저트를 검색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나... 왜 이러는 거지?'
2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민우는 심리상담센터 앞에 서 있었다. 일주일 전 술김에 예약해둔 것이었다. 취소하려다가, 그냥 왔다.
"최민우 씨? 들어오세요."
상담사는 30대 중반의 온화한 인상의 여자였다.
"처음이시죠? 편하게 앉으세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세요?"
민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쇼핑을 너무 많이 해요. 멈출 수가 없어요."
같은 날, 하은도 상담센터를 찾았다. 다른 곳이었지만, 비슷한 이유였다.
"저는... 자꾸 먹어요. 배가 안 고픈데도요."
두 사람은 각자의 상담실에서 비슷한 질문을 들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힘드신가요?"
민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이 왜 우울한지, 왜 쇼핑을 하고 폭식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번 주부터 하루에 한 번, 감정 일기를 써보세요. 쇼핑하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을 적어보는 거예요. '나는 지금 왜 이걸 하고 싶을까?' 하고요."
상담사들은 똑같은 숙제를 내줬다.
감정의 이름
3월 첫째 주, 민우는 노트를 한 권 샀다. 표지에 '감정 일기'라고 적었다. 첫 페이지를 펼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펜을 들었다.
"2026년 3월 3일.
오늘 또 신발을 샀다. 38만 원짜리. 왜 샀을까?
음... 회의 시간에 팀장한테 혼났다. 기획서가 엉망이라고. 다른 팀원들 앞에서. 창피했다. 화가 났다. 근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냥 '죄송합니다'만 했다.
퇴근하고 신발을 보는데, 갖고 싶었다. 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샀다. 순간은 좋았다. 근데 지금은... 별로다. 여전히 화나고 창피하다.
아, 그리고 또 빚이 늘었다는 생각이 든다."
민우는 쓰다가 펜을 멈췄다. 신기했다. 쓰고 나니 조금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신발이 필요해서 산 게 아니라, 창피함과 화를 피하고 싶어서 샀다는 것.
하은도 일기를 시작했다.
"2026년 3월 3일.
점심시간에 혼자 먹었다. 팀원들이 같이 먹자고 했는데 핑계 대고 피했다. 왜?
요즘 살이 쪄서 사람들이 볼까 봐. 특히 예쁜 신입 민지가 옆에 있으면 더 그렇다. 나만 뚱뚱해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 먹는데 외로웠다. 외로우니까 또 먹고 싶었다. 치킨을 시켰다. 먹으면서는 외로움이 잊혔다. 근데 다 먹고 나니까 더 외로웠다. 그리고 자괴감.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그냥 참으면 되는데."
하은은 눈물이 났다. 쓰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피하려고 먹는다는 것을.
3월 둘째 주, 민우는 상담실에서 자신의 일기를 보여줬다.
"일주일 동안 썼어요. 근데... 패턴이 보이네요."
"어떤 패턴인가요?"
"제가 쇼핑하는 건... 대부분 누군가한테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예요. 회사에서든, 친구 모임에서든. 제 말이 무시당하거나, 제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상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쇼핑이 일시적으로 그 감정을 채워주는 건가요?"
"네. 뭔가...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비싼 걸 살 수 있다는 게. 근데 순간뿐이에요."
"그럼 정말 필요한 건 뭘까요?"
민우는 한참 생각했다.
"인정받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은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제가 먹는 건... 외로울 때예요. 사람들이 무서워요. 판단받는 게. 그래서 피하는데, 피하니까 더 외로워요. 그러면 또 먹게 되고."
"먹는 게 외로움을 달래주나요?"
"잠깐요. 먹을 때는 다른 생각이 안 나요. 근데 끝나면... 더 외롭고 자책하게 돼요."
"정말 필요한 건 뭘까요?"
"사람들이요. 근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3월 셋째 주, 민우는 회사에서 팀장과 면담을 했다.
"팀장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응, 말해봐."
"저... 지난번에 회의 시간에 혼나셨을 때, 많이 창피했어요."
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때? 미안. 내가 좀 심하게 말했지. 기분 나빴구나."
"네. 그래서 여쭤보고 싶은데, 제 기획서 어떤 점이 부족했나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음... 데이터 분석 부분이 약했어. 그리고 타겟층 설정이 좀 애매했고. 다음번엔 이렇게 해봐."
팀장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민우는 메모를 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날 저녁, 쇼핑 앱을 켜지 않았다.
'오늘은 괜찮네.'
일기를 펼쳤다.
"2026년 3월 17일.
오늘 팀장님께 제 감정을 말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말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피드백을 받으니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쇼핑 안 했다. 안 하고 싶었다. 신기하다.
나한테 필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인정이었구나."
하은도 작은 시도를 했다. 팀원 민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민지 씨, 점심 같이 먹을래요?"
"언니! 저 언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맨날 혼자 드시길래 말 못 걸었어요."
"정말요?"
"네! 저 사실 언니가 좀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어요."
하은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할까 봐 피했는데, 사람들은 자신을 차갑다고 생각했다니.
점심을 함께 먹으며 하은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민지는 생각보다 따뜻했고, 하은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언니, 저도 예전에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겉으로는 안 보여도 다들 고민이 있어요."
그날 저녁, 하은은 치킨을 시키려다가 멈췄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외롭지 않았다.
우연한 만남
4월 첫째 주 토요일, 민우는 북카페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요즘 그는 조용한 카페에서 한 주를 돌아보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여기 자리 없나요?"
누군가 물었다. 올려다보니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손에는 노트와 펜이 들려 있었다.
"아, 네. 앉으세요."
하은이었다. 그녀도 요즘 카페에서 일기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두 사람은 각자의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하은의 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민우가 주워줬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민우는 우연히 하은의 노트 표지를 봤다. '감정 일기'라고 적혀 있었다. 자신의 노트와 똑같았다.
"저기... 혹시 감정 일기 쓰세요?"
하은이 놀라 민우를 봤다.
"네? 어떻게 아세요?"
민우는 자신의 노트를 보여줬다. 하은의 눈이 커졌다.
"저도요!"
두 사람은 웃었다.
"상담 받으세요?"
"네, 두 달째요. 민우 씨는요?"
"저도요. 쇼핑 중독 때문에."
"저는... 폭식이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커피 한잔 할래요? 이야기 좀 하면서요."
"좋아요."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감정 일기 이야기, 상담 이야기, 자신들의 고민들. 신기하게도 막힘이 없었다.
"저는 쇼핑을 하면서 일시적인 가치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근데 일기를 쓰면서 깨달았어요. 진짜 필요한 건 스스로를 인정하는 거였다고."
"저도 비슷해요. 먹으면서 외로움을 잊으려고 했는데, 진짜 필요한 건 사람들과의 연결이었어요."
하은이 민우를 바라봤다.
"근데 민우 씨, 지금은 어때요? 쇼핑 줄었어요?"
"많이 줄었어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하고 싶을 때마다 일기를 쓰거든요. 그러면 정말로 필요한 건지 아닌지 보여요. 하은 씨는요?"
"저도요. 먹고 싶을 때 '나 지금 배고파? 아니면 외로워?' 이렇게 물어봐요. 대부분은 외로움이더라고요. 그럼 친구한테 연락하거나, 산책을 나가요."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잘하고 있네요."
"그러게요."
헤어지기 전, 두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혹시 또 힘들 때 연락해도 돼요? 민우 씨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저도요. 하은 씨도 연락 주세요."
4월 둘째 주, 민우는 하은에게 카톡을 보냈다.
"하은 씨, 오늘 쇼핑 엄청 하고 싶어요. 손이 떨릴 정도로. 근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은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일기 써봤어요? 지금 무슨 일 있었어요?"
민우는 멈춰 서서 생각했다. 오늘 뭐가 있었지?
"아... 동생이 결혼한대요. 저보다 어린데. 부모님이 기뻐하시더라고요."
"민우 씨는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
"부러웠어요. 그리고... 저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거예요. 지금 필요한 건 쇼핑이 아니라, 스스로를 토닥이는 거예요. 민우 씨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빚도 갚아가고 있고, 감정 일기도 쓰고 있잖아요."
민우는 핸드폰을 보며 눈물이 났다.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게 이렇게 큰 힘이 되는지 몰랐다.
"고마워요, 하은 씨. 덕분에 쇼핑 안 할 것 같아요."
"저한테도 연락해요. 힘들 때요."
며칠 후, 하은이 민우에게 전화를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민우 씨... 저 치킨 세 마리 시켰어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회사에서 프로젝트 실패했어요. 제 잘못이 커요. 팀장님한테 혼났어요."
"지금 어디예요?"
"집이요."
"제가 갈게요. 주소 보내주세요."
30분 후, 민우는 하은의 집 앞에 있었다. 손에는 샐러드와 과일이 들려 있었다.
"치킨 다 먹었어요?"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반도 안 먹었다.
"먹다가... 민우 씨한테 전화했어요."
"잘했어요."
민우는 치킨을 치우고 샐러드를 내밀었다.
"저랑 얘기해요. 무슨 일인지."
하은은 울면서 이야기했다. 프로젝트가 엎어진 것, 팀장에게 혼난 것,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껴지는 것.
민우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은 씨, 실수는 누구나 해요. 그게 하은 씨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건 아니에요."
"정말요?"
"정말이요. 저도 매일 실수해요. 근데 그래도 저는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하은 씨도요."
하은은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경험을 했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주는.
"민우 씨,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도 하은 씨한테 받은 게 많은걸요."
함께 채우다
5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연인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두 사람은 한강에서 산책을 했다.
"민우 씨, 저 요즘 일기 쓰면서 재밌는 거 발견했어요."
"뭔데요?"
"제가 폭식하는 패턴이요. 대부분 금요일 저녁이에요. 혼자 있을 때요."
"금요일?"
"네. 다른 사람들은 다 약속 있고, 저만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요."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요일 밤이요. 내일 또 월요일이라는 생각에 불안해져요. 그럼 쇼핑을 하고 싶어져요."
"그럼 우리 약속 할까요? 금요일 저녁이랑 일요일 밤에는 같이 있어요."
"정말요?"
"네. 어차피 우리 둘 다 힘든 시간이잖아요. 같이 있으면 덜 힘들 것 같아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만났다. 금요일 저녁에는 함께 저녁을 먹고, 일요일 밤에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뭐 먹고 싶어요?"
"치킨 말고요."
"하하, 알겠어요."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폭식도, 쇼핑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6월, 민우는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팀장에게 칭찬을 받았다.
"민우, 요즘 달라졌어. 뭔가 안정적이야."
"감사합니다."
퇴근 후 민우는 하은에게 전화를 했다.
"하은 씨, 오늘 칭찬 받았어요!"
"와, 진짜요? 축하해요!"
"근데 있잖아요. 예전 같았으면 바로 쇼핑했을 것 같아요. 기념으로요."
"지금은요?"
"지금은 하은 씨한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게 더 기분 좋아요."
하은도 변화했다. 체중이 5킬로 줄었고, 더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졌다.
"언니, 요즘 밝아졌어요!"
민지가 말했다.
"그래요?"
"네! 예전엔 좀 거리감이 있었는데, 요즘은 편해요."
하은은 웃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사람들도 편하게 다가왔다.
7월 어느 토요일,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북카페에 다시 왔다.
"여기서 만난 지 3개월 됐네요."
"그러게요. 신기해요."
민우가 하은을 바라봤다.
"하은 씨, 저... 고백할 게 있어요."
"네?"
"저 요즘 하은 씨 생각 많이 해요. 친구로서가 아니라... 다른 감정인 것 같아요."
하은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도요."
"정말요?"
"네. 근데... 무서워요. 연애하면 또 다른 중독이 될까 봐. 의존하게 될까 봐."
민우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저도 그게 무서워요. 근데 우리 일기 쓰잖아요. 계속 감정을 들여다보잖아요.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진짜 그럴까요?"
"모르죠. 근데 해보고 싶어요. 하은 씨랑."
하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같이 조심하면서 해봐요."
8월,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서로에게 의존하는 대신, 각자의 감정을 책임졌다.
"민우 씨, 오늘 너무 보고 싶은데... 이게 건강한 그리움인지 의존인지 모르겠어요."
"일기 써봤어요?"
"썼어요. 근데 판단이 안 서요."
"제가 읽어볼까요?"
민우는 하은의 일기를 읽었다.
"음... 건강한 그리움 같은데요? 오늘 좋은 일이 있어서 나누고 싶다고 썼잖아요. 외로워서가 아니라."
"맞다. 오늘 팀장님한테 칭찬 받았거든요."
"그럼 건강한 거예요. 기쁨을 나누고 싶은 거니까."
민우도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다.
"하은 씨, 저 오늘 쇼핑하고 싶어요. 하은 씨 선물 사고 싶어서요. 근데 이게 또 쇼핑 중독인가 싶어서요."
"왜 선물하고 싶은데요?"
"하은 씨가 요즘 힘들어하잖아요. 위로하고 싶어서요."
"그럼 꼭 쇼핑이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민우는 생각했다.
"아... 맞다. 제가 요리 할 수 있어요. 하은 씨 좋아하는 파스타."
"그거 좋은데요!"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고 도왔다. 중독으로 빠지지 않도록,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9월, 두 사람은 상담사에게 함께 찾아갔다. 각자의 상담사가 달랐지만, 특별히 커플 상담을 요청했다.
"두 분이 정말 잘하고 계시네요."
상담사가 말했다.
"감정 일기를 꾸준히 쓰고, 서로의 감정을 존중하고,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고."
"그래도 가끔 무너질 때가 있어요."
하은이 말했다.
"당연하죠. 중요한 건 무너지지 않는 게 아니라, 무너졌을 때 어떻게 하느냐예요."
"저희는 서로에게 말해요. 숨기지 않고."
민우가 덧붙였다.
"그게 가장 중요해요. 숨기지 않는 것."
10월, 민우는 빚을 절반 넘게 갚았다. 하은은 목표 체중에 거의 도달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다른 곳에 있었다.
"민우 씨, 저 오늘 치킨 먹고 싶었어요. 근데 안 시켰어요."
"대단한데요! 어떻게요?"
"일기를 썼어요. '나는 왜 치킨이 먹고 싶을까?' 그랬더니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프로젝트 스트레스 때문이더라고요. 그래서 민지한테 전화했어요. 수다 떨다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민우가 하은을 안아줬다.
"정말 잘했어요. 진짜 필요한 걸 찾았네요."
"민우 씨는요?"
"저도요. 어제 쇼핑 앱 켰다가 껐어요. 신상 신발이 떴는데, 일기를 썼더니 정말 필요해서가 아니라 허전해서더라고요. 그래서 하은 씨한테 전화했죠."
"맞아요. 통화했죠."
두 사람은 웃었다.
11월, 두 사람은 블로그를 시작했다. '감정 일기 쓰는 연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우울할 때 쇼핑하거나 폭식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첫 게시물에 민우가 썼다.
"저희도 그랬거든요. 일시적 위안을 찾았죠. 하지만 진짜 해법은 따로 있었어요. 감정 일기를 쓰는 것. '나는 왜 우울할까?'를 적다 보면, 진짜 해법이 보여요."
하은이 덧붙였다.
"쇼핑과 음식은 문제가 아니에요. 증상이죠. 진짜 문제는 우리 안의 감정들이에요. 그걸 들여다봐야 해요."
블로그에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도 쇼핑 중독인데 용기가 나요."
"감정 일기 시작해봐야겠어요."
"혼자가 아니라는 게 위로가 돼요."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북카페에 다시 왔다.
"여기서 만난 지 8개월 됐네요."
"인생이 바뀐 8개월이에요."
민우가 선물을 꺼냈다. 작은 상자였다.
"하은 씨, 이거..."
"뭐예요?"
상자 안에는 예쁜 노트가 들어있었다.
"새 감정 일기장이요. 내년에도 같이 쓰자고요."
하은도 선물을 꺼냈다. 비슷한 노트였다.
"저도 준비했어요. 민우 씨 거요."
두 사람은 웃으며 포옹했다.
"우리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아픈 곳이 비슷해서 더 잘 이해하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함께 낫고 있잖아요."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민우 씨, 내년에는 뭐 하고 싶어요?"
"음... 감정 일기 계속 쓰고요, 블로그도 키우고. 그리고 하은 씨랑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저도요. 민우 씨랑 함께 성장하고 싶어요."
"성장?"
"네. 저희 아직 완벽하지 않잖아요. 가끔 무너지기도 하고. 근데 그게 나쁜 게 아니라, 성장의 과정인 것 같아요."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완벽해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어제보다 조금 나은 오늘이면 되는 거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2027년 1월 1일, 새해 첫날.
민우와 하은은 각자의 새 감정 일기장을 펼쳤다.
민우가 썼다.
"2027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작년 이맘때는 쇼핑 중독으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완전히 나은 건 아니다. 가끔 쇼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근데 이제는 그 감정을 들여다본다. '왜?' 하고 물어본다.
하은을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이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나아가는 사람. 사랑한다.
올해 목표: 감정 일기 365일 채우기. 그리고 하은이와 함께 건강하게 사랑하기."
하은도 썼다.
"2027년 1월 1일.
새해 첫날. 작년에는 폭식으로 고통받았다. 지금도 가끔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정말 배고픈 건지, 마음이 배고픈 건지.
민우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나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고맙고 사랑한다.
올해 목표: 매일 감정 확인하기. 그리고 민우와 함께 행복하기."
두 사람은 서로의 일기를 교환해서 읽었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참 비슷하네요."
"그러게요. 그래서 좋아요."
블로그에는 새해 첫 게시물을 올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도 감정 일기 써보세요. 우울할 때 쇼핑하거나 폭식하는 대신, '나는 왜 우울할까?'를 물어보세요.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요. 그리고 그 답을 찾으면, 진짜로 필요한 게 보여요.
저희도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가끔 무너져요. 하지만 괜찮아요. 함께 일어서니까요. 여러분도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 함께 나아가요."
댓글들이 달렸다.
"올해는 저도 감정 일기 시작할게요."
"두 분 덕분에 용기가 나요."
"함께 나아가요!"
민우와 하은은 손을 잡고 창밖을 바라봤다. 새해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함께이기에 따뜻한 새해였다.
이것이 2026년, 민우와 하은의 이야기였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일시적 위안 대신 진짜 해법을 찾으며, 서로를 채우는 법을 배운 두 사람.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때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함께 성장하며.
우리가 채우는 방법은 물건이 아니었다. 음식도 아니었다.
진짜 필요한 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용기, 그리고 함께 있어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