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98)의미 추구 포기

작은 흔적들

by 이 범

의미 추구 포기

Q: 왜 "그냥 사는 거지"라고 말할까요?

A: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서입니다. 해법은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미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회색 일상
2026년 1월, 서울 구로구의 한 고시원. 32살 정우진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오전 7시. 3평 남짓한 방에서 일어나 세면장으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
우진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고 출근 준비를 했다. 중소기업 경리 사원으로 일한 지 7년째. 승진도, 특별한 변화도 없는 삶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우진은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똑같아 보였다. 지친 표정, 무표정, 그저 하루를 버티는 얼굴들.
'나도 저렇게 보이겠지.'
회사에 도착해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에는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쌓여 있었다. 전표, 정산, 보고서. 반복되는 일들.
점심시간, 동료 재석이 물었다.
"우진아, 너 요즘 왜 그래? 맨날 혼자 먹고."
"그냥요."
"그냥? 무슨 고민 있어?"
"아뇨. 그냥... 그냥 사는 거죠, 뭐."
재석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우진은 혼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마포구의 한 어린이집. 28살 이수연은 아이들의 점심 시간을 돕고 있었다. 보육교사로 일한 지 5년째. 하루에 열 시간씩 일하고, 월급은 200만 원 남짓.
"선생님! 저 다 먹었어요!"
"우와, 잘 먹었네. 대단해!"
수연은 아이를 칭찬하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피로가 숨어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수연은 소파에 쓰러졌다. 원룸 가득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정리할 기력도 없었다.
핸드폰을 들어 SNS를 켰다. 피드에는 친구들의 화려한 일상이 가득했다. 해외여행, 승진, 결혼식. 수연은 화면을 내리다가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나는 뭐 하는 거지..."
저녁도 먹기 싫었다. 그냥 누워 있고 싶었다. 의미 없이, 그냥.
1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우진은 동네 도서관에 갔다. 갈 곳이 없어서였다. 고시원에만 있으면 답답했다.
서가 사이를 걷다가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 우진은 코웃음을 쳤다.
'의미?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손은 저절로 책을 집었다. 자리에 앉아 첫 장을 펼쳤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가?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해보라.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을까?'"
우진은 책을 덮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존재로 누가 행복했을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시각, 수연은 동네 카페에서 친구 민지를 만났다.
"수연아, 너 요즘 왜 이래? 연락도 없고."
"미안. 바빴어."
"바쁜 건 알아. 근데 너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수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민지야... 나 요즘 자꾸 이런 생각 들어. 내가 왜 사는 건지, 뭐 하는 건지."
"갑자기 왜? 힘든 일 있었어?"
"아니, 특별히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매일이 똑같아.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애들 돌보고, 퇴근하고, 자고. 반복. 이게 뭔가 싶어."
민지는 수연의 손을 잡았다.
"수연아, 너 번아웃 온 거 아니야? 좀 쉬어."
"쉬면 뭐해. 쉬어도 똑같을 텐데. 나 진짜 모르겠어. 내 삶의 의미가 뭔지."
"의미를 꼭 알아야 해? 그냥 사는 거지."
수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냥 사는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 근데 자꾸... 공허해."
2월 첫째 주, 우진은 회사에서 실수를 했다. 중요한 거래처 정산서에 오류가 있었고, 팀장에게 크게 혼났다.
"정우진 씨! 이게 몇 번째야? 집중 좀 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다야? 이거 잘못되면 회사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변명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집중하지 못했으니까.
퇴근 후 우진은 한강으로 갔다.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바라봤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돌아가겠지. 누가 내 자리를 채우겠지.'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받지 않았다. 요즘 부모님과도 통화가 부담스러웠다. 잘 지내냐는 질문에 거짓말하기 싫어서.
그때 옆에서 누군가 "실례합니다"라고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혹시... 봉사활동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요."
우진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한번 받아보세요. 주말에 시간 되실 때요."
여자는 전단지를 건네고 사라졌다. 우진은 전단지를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같은 날 저녁, 수연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요리할 기력이 없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은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혼자 사나 봐?"
"네."
"힘들지? 요즘 젊은 사람들 다 힘들어 보여."
수연은 대답 대신 웃었다. 할머니는 계속 말했다.
"나도 젊었을 때 힘들었어. 근데 말이야, 사는 게 꼭 의미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살다 보면, 나중에 보면, 의미가 생기더라고."
"정말요?"
"그럼. 지금은 안 보여도, 나중에 보면 '아, 그때 내가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하게 돼."
할머니는 일어서며 수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 아가씨는 분명 누군가한테 의미 있는 사람일 거야."
수연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큰 울림을 주는지 몰랐다.


작은 발견
2월 둘째 주 토요일, 우진은 빨래를 하다가 주머니에서 전단지를 발견했다. '노숙인 급식 봉사 -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봉사활동이라...'
우진은 전단지를 버리려다가 멈췄다. 어차피 주말에 할 일도 없었다. 고시원에 있어봤자 의미 없는 시간만 흘러갈 뿐.
'한번 가볼까.'
다음 주 토요일, 우진은 전단지에 적힌 주소로 갔다. 서울역 근처의 작은 복지센터였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 오셨어요?"
한 자원봉사자가 물었다.
"네."
"환영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정우진입니다."
"우진 씨, 저는 수연이에요. 이수연."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한강에서 전단지를 건넸던 그 여자였다.
"아... 그때."
"기억하시네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수연은 밝게 웃었다. 우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사는 간단했다. 음식을 배식하고, 설거지를 하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 우진은 배식대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잘 드세요."
노숙인들은 우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우진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뭘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봉사가 끝나고, 수연이 우진에게 다가왔다.
"어떠셨어요? 처음인데 힘드셨죠?"
"아니요. 괜찮았어요."
"다음 주에도 오실 거예요?"
우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올게요."
그날 밤, 우진은 일기를 썼다. 원래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오늘은 뭔가 기록하고 싶었다.
"2026년 2월 21일.
오늘 봉사활동을 했다. 노숙인 분들께 밥을 드렸다.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이상했다. 내가 뭘 한 것도 아닌데.
근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뿌듯했다.
수연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밝은 사람이다."
수연도 집에 돌아와 메모를 했다.
"오늘 한강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 왔다. 정우진. 차가워 보였는데, 봉사하는 모습은 진지했다. 좋은 사람 같다."
다음 주, 우진은 다시 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도. 어느새 토요일 오전이 기다려졌다.
"우진 씨, 요즘 자주 오시네요."
수연이 말했다.
"할 일이 없어서요."
"그래도 나오시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 바빠서 잘 안 나와요."
"수연 씨는 왜 봉사를 시작했어요?"
수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작년에 많이 힘들었어요. 삶의 의미를 못 찾겠더라고요. 매일이 똑같고, 공허하고."
"그래서요?"
"그래서 뭔가 해보고 싶었어요.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는 일을. 그러다가 봉사를 시작했죠."
"도움이 됐어요?"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오는 분들이 제게 감사하다고 하실 때마다, 제가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껴요. 작지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거요."
우진은 수연의 말을 곱씹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존재.'
3월, 우진은 봉사 외에도 센터의 다른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노숙인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간단한 상담도 했다.
"우진 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한 노숙인 분이 물었다.
"저요? 회사 다녀요. 경리 일 하고요."
"대단하네. 젊은데 착하기도 하고."
"아니에요. 저 별로 안 착해요."
"아니야. 여기 오는 것만으로도 착한 거야. 요즘 젊은이들 바빠서 이런 데 안 와. 근데 우진 씨는 매주 와. 고마워."
우진은 가슴이 뭉클했다. 누군가 자신을 고맙다고,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게 이렇게 큰 힘이 되는지 몰랐다.
수연도 변화를 느꼈다. 어린이집 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아이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선생님! 저 오늘 혼자 단추 끼웠어요!"
"진짜? 대단한데!"
아이의 환한 웃음을 보며 수연은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작지만 분명한 의미.
어느 금요일 저녁, 우진과 수연은 센터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우진 씨,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졌어요."
"그래요?"
"네. 처음 봤을 때랑 많이 달라요."
우진은 웃었다.
"수연 씨 덕분인 것 같아요. 봉사 권유해줘서 고마워요."
"제 덕분이라니요. 우진 씨가 선택한 거죠."
"그래도요. 수연 씨 아니었으면 계속 그냥... 의미 없이 살았을 것 같아요."
수연이 우진을 바라봤다.
"우진 씨도 그랬어요? 의미 못 찾아서?"
"네. 매일 '그냥 사는 거지' 하면서 버텼어요. 근데 요즘은... 조금 달라요."
"어떻게요?"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작지만."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전에는 제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요즘은 아이들 웃는 거 보면 '아, 내가 이 아이들한테 의미 있는 사람이구나' 하게 돼요."
"맞아요. 의미가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그렇죠. 그냥...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는 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연결되는 순간들
4월, 우진은 회사에서도 변화했다. 예전처럼 기계적으로 일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재석아, 요즘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
"응? 티 나? 사실 집에 문제가 좀 있어서."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들어줄게."
재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진아, 너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아. 뭐 좋은 일 있어?"
"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고."
우진은 웃으며 일을 계속했다. 재석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점심시간, 우진은 혼자 먹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우진아, 갑자기 왜 이래? 너 혼자 먹는 거 좋아했잖아."
"그냥. 같이 먹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사람들이랑 연결되고 싶어졌어."
동료들은 이상하다는 듯 웃었지만, 우진과의 점심시간은 즐거웠다.
수연도 어린이집에서 변화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선생님, 저 오늘 슬퍼요."
"왜? 무슨 일 있었어?"
"엄마가... 출장 가셨어요."
수연은 아이를 안아줬다.
"엄마 보고 싶구나. 괜찮아. 선생님이 여기 있잖아."
"선생님... 사랑해요."
그 한마디에 수연은 눈물이 날 뻔했다. 자신이 이 아이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4월 셋째 주, 우진은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오랜만이었다.
"어머니, 저예요."
"어머, 우진아! 왜 이렇게 오랜만이니? 엄마 걱정했잖아."
"죄송해요. 요즘 바빴어요."
"그래? 잘 지내는 거지?"
"네. 잘 지내요. 그리고... 어머니, 저 요즘 봉사활동 하고 있어요."
"봉사활동? 우리 아들이?"
우진은 웃으며 센터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우진아, 착하게 살아줘서 고마워. 엄마 자랑스러워."
전화를 끊은 우진은 가슴이 따뜻했다.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있다는 것. 그것도 의미였다.
수연도 친구 민지와 만났다.
"수연아, 너 요즘 완전 달라 보여. 무슨 일 있어?"
"응. 좋은 일이."
"뭔데?"
"나... 내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
"진짜? 어떻게?"
수연은 봉사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민지는 진지하게 들었다.
"수연아, 너 정말 멋있다.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이할래? 봉사."
"그래. 나도 가볼게."
다음 주부터 민지도 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5월, 센터에서는 특별 행사를 준비했다. 노숙인분들을 위한 작은 음악회였다.
"우진 씨, 혹시 악기 다룰 줄 알아요?"
수연이 물었다.
"기타 조금요. 근데 왜요?"
"음악회에서 연주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요? 저 잘 못 해요."
"괜찮아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우진은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집에서 오랜만에 기타를 꺼냈다. 대학 때 취미로 배웠던 기억이 났다.
연습을 하면서 우진은 깨달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였다.
음악회 당일,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기타를 연주했다. 서툴렀지만, 사람들은 박수를 쳐줬다.
"고마워요, 우진 씨. 덕분에 오랜만에 음악 들었어요."
한 노숙인 분이 말했다. 우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수연도 아이들과 함께 작은 공연을 준비했다. 어린이집 발표회였다.
"선생님, 저 떨려요."
"괜찮아. 선생님이 옆에 있잖아. 우리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공연이 끝나고 한 학부모가 수연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감사해요. 우리 아이 요즘 선생님 이야기만 해요.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지."
"아니에요. 제가 더 아이한테 배워요."
"아니에요.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아이가 자신감을 얻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수연은 집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오늘 학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누군가한테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
5월 마지막 주, 우진과 수연은 한강을 걸었다.
"수연 씨, 저 요즘 생각해요. 의미가 뭔지."
"어떤 생각이요?"
"예전에는 거창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돈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근데 아니더라고요."
"맞아요."
"의미는... 그냥 누군가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거더라고요. 작은 미소, 작은 감사, 작은 변화."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이들이 제게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할 때, 그게 제 삶의 의미예요."
"그리고..."
우진이 수연을 바라봤다.
"수연 씨를 만난 것도 제게는 큰 의미예요."
"저도요. 우진 씨 덕분에 봉사가 더 즐거워졌어요."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말없이, 그저 함께 걸었다.

작은 흔적, 큰 의미
6월, 우진은 회사에서 팀장에게 불려갔다.
"우진 씨, 요즘 일 처리가 확실히 좋아졌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 그냥 마음가짐이 바뀌었어요."
"마음가짐?"
"네. 제 일이 누군가한테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일도 중요해요. 회사가 돌아가려면 경리가 정확해야 하고, 그게 결국 직원들 월급으로 이어지니까."
우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단순한 전표 처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계와 연결된 일이라는 것.
수연도 변화를 느꼈다. 어린이집 원장님이 말했다.
"수연 선생님,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 정말 좋아해요. 부모님들 평가도 좋고요."
"감사합니다."
"계속 이렇게 해주세요. 선생님 같은 분이 필요해요."
퇴근 후 수연은 우진에게 전화를 했다.
"우진 씨, 오늘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어요."
"뭔데요?"
"원장님이 제가 필요한 사람이래요!"
우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수연 씨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에요. 저한테도요."
7월, 센터에서는 1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우진과 수연은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년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특히 우진 씨, 수연 씨."
센터장이 말했다.
"두 분 덕분에 이 센터가 더 따뜻해졌어요. 감사합니다."
행사가 끝나고 한 노숙인 분이 우진에게 다가왔다.
"우진 씨, 저 말이에요. 다음 달에 쉼터 들어가요."
"정말요? 축하드려요!"
"우진 씨 덕분이에요. 우진 씨가 매주 와서 얘기 들어주고, 격려해줘서 용기가 났어요."
우진은 그분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에요. 제가 배운 게 더 많아요."
"아니야. 우진 씨는 저한테 희망이었어요. 고마워요."
우진은 집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오늘 내가 누군가한테 희망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살면서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다. 이보다 큰 의미가 어디 있을까."
8월, 우진과 수연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부터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였으니까.
"수연 씨, 사귀기 전이나 후나 똑같은 것 같아요."
"왜요? 섭섭해요?"
"아니요. 오히려 좋아요. 우리 진짜로 서로가 필요해서 만난 거 같아서."
"맞아요. 우진 씨는 제게 의미를 찾게 해준 사람이에요."
"저도요. 수연 씨 덕분에 제 삶이 바뀌었어요."
두 사람은 매주 금요일 저녁을 함께 보냈다. 센터 봉사를 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한강을 걸었다.
"우진 씨, 우리 10년 후에는 뭐 하고 있을까요?"
"글쎄요. 근데 분명한 건, 여전히 의미를 찾으며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의미요?"
"작은 의미들요. 누군가한테 도움이 되고, 누군가를 웃게 하고."
수연이 우진의 손을 꼭 잡았다.
"그거면 충분해요."
9월, 우진은 부모님을 센터에 모셨다.
"엄마, 아빠, 여기가 제가 봉사하는 곳이에요."
"우리 아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구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엄마 자랑스러워. 착하게 커줘서."
아버지도 우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고 있구나."
그 한마디에 우진은 모든 게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수연도 자신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그냥 사는 거지' 하며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의미는 거창한 게 아니다. 아이들의 웃음, 학부모님의 감사, 동료들과의 대화. 그 모든 작은 순간들이 의미다."
블로그에는 댓글이 달렸다.
"저도 요즘 같은 고민했는데 위로가 돼요."
"의미를 찾아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용기가 나요."
수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에 또 한 번 의미를 느꼈다.
10월, 우진은 동료 재석에게 봉사를 권유했다.
"재석아, 너도 같이 갈래? 봉사."
"나? 갑자기 왜?"
"너 요즘 힘들어 보여서. 나도 힘들 때 봉사하면서 많이 나아졌거든."
"진짜?"
"응. 한번 와봐. 후회 안 할 거야."
다음 주부터 재석도 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서서히 변화했다.
"우진아, 고마워. 너 덕분에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그랬어. 누군가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게 이렇게 큰 의미인 줄 몰랐어."
11월, 센터에서는 감사의 밤 행사를 열었다. 1년 동안 봉사한 사람들을 초대했다.
"올해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한 분들을 소개합니다. 정우진 씨, 이수연 씨."
박수가 터졌다. 두 사람은 무대에 올라갔다.
"소감 한마디 부탁드려요."
우진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작년까지만 해도 제 삶의 의미를 몰랐어요. '그냥 사는 거지' 하며 버텼죠. 근데 이곳에 오면서 깨달았어요. 의미는 거창한 게 아니라, 누군가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거더라고요."
수연도 말을 이었다.
"저도 비슷했어요. 제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여기서 배웠어요.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게 됐어요. 그게 제 삶의 의미예요."
행사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저도 봉사 시작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저도 의미를 찾고 싶어요."
우진과 수연은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두 사람은 고시원 앞에 섰다.
"수연 씨, 여기가 제가 살던 곳이에요."
"좁았겠어요."
"네. 근데 여기서 제 삶이 바뀌었어요. 수연 씨를 만나고."
수연은 우진의 손을 잡았다.
"저도요. 우진 씨를 만나고 제 삶의 의미를 찾았어요."
"우리 내년에는 뭐 할까요?"
"계속 이렇게 살아요. 의미를 찾으며. 그리고 누군가한테 의미가 되며."
우진이 수연을 안았다.
"좋아요. 평생 그렇게 살아요."
2027년 1월 1일, 새해 첫날.
우진은 일기를 썼다.
"2027년 1월 1일.
작년 이맘때 나는 '그냥 사는 거지' 하며 버티고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의미는 거창한 게 아니다.
센터에서 누군가를 돕는 것
회사에서 동료를 격려하는 것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것
수연이와 함께 웃는 것
이 모든 작은 순간들이 의미다.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을까?' 이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한다.
올해도 작은 의미들을 만들어가자."
수연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작년에 저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의미는 멀리 있지 않아요. 바로 옆에 있어요.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나의 존재로 누군가 행복했을까?' 분명 있을 거예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요.
그게 바로 여러분의 의미예요. 거창할 필요 없어요. 작은 것으로 충분해요."
댓글들이 달렸다.
"위로가 돼요."
"저도 의미 찾았어요."
"감사합니다."
우진과 수연은 새해 첫날, 센터에서 봉사를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한강을 걸었다.
"우진 씨, 행복해요?"
"네. 정말로요."
"저도요."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삶의 의미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것이 2026년, 우진과 수연의 이야기였다.
'그냥 사는 거지'에서 '의미 있게 사는 거지'로.
작은 변화, 하지만 큰 의미.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작은 흔적들을 남기며,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며.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