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 (95) 루틴 없음

발레 강사

by 이 범

루틴 없음

Q: 왜 매일 다르게 살까요?

A: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아침 루틴 하나만이라도 만드는 것입니다. 구조가 자유를 만듭니다


2006년 11월의 서울은 차가웠다.
나, 한소라는 서른한 살의 발레 강사였다. 아니, 정확히는 '전직 발레리나'였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국립발레단의 솔리스트였다.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를 춰냈고, 《지젤》에서 주역을 맡았었다. 무대 위에서 나는 빛났다. 관객들의 박수, 평론가들의 찬사, 동료들의 부러움.
하지만 발목 부상 하나가 모든 걸 무너뜨렸다.
2001년 12월, 리허설 중 착지 실수. 인대 파열. 수술. 재활. 복귀. 그리고 재부상.
"한소라 씨,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시 무대에 서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정형외과 의사의 말이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발레단을 떠났다. 선택이 아니라 강제였다. 더 이상 춤출 수 없는 발레리나는 필요 없었다.
그 후 5년, 나는 표류했다.
개인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강남의 발레 학원을 전전했다. 부유한 아이들에게 플리에를 가르쳤다.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아이들에게.
"선생님, 저 발레 싫어요. 엄마가 하래서 하는 거예요."
열 살짜리 아이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나도 싫었다. 이 일이. 이 삶이. 이 모든 것이.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평범하지 않은 하루였다. 내 삶에 평범한 날은 없었으니까.
오전 10시 30분에 눈을 떴다. 어제 새벽 3시에 잤다. Netflix를 보다가, SNS를 보다가, 그냥 멍하니 있다가.
침대에서 30분을 더 누워 있었다.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첫 수업은 오후 2시였다.
11시에 겨우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거울 속의 내가 형편없었다. 부스스한 머리, 다크서클, 거칠어진 피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다.
아침은 먹지 않았다. 귀찮았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먹을 게 없었다. 일주일 전에 시켜 먹은 치킨 박스와 상한 우유만 있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다 먹었다. 점심 겸 아침이었다.
오후 1시 30분, 학원으로 향했다. 지하철은 늦었다. 항상 늦었다. 시간 맞춰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선생님, 또 늦으셨네요."
학원 원장의 핀잔. 다섯 번째였다. 이번 달에만.
"죄송합니다."
진심 없는 사과. 원장도 알았을 것이다.
오후 수업 세 개. 저녁 수업 두 개. 밤 9시에 끝났다.
집에 가는 길,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샀다. 그리고 또 치킨을 시켰다.
새벽 2시까지 TV를 봤다. 무엇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을 뿐.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내일은... 뭐 하지?'
계획이 없었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 그저 흘러가는 시간.
잠들기 전, 문득 생각했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답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매일이 달랐다. 매일이 똑같았다.
어떤 날은 오전 11시에 일어나고, 어떤 날은 오후 1시에 일어났다. 어떤 날은 아침을 먹고, 어떤 날은 저녁까지 굶었다. 어떤 날은 샤워를 하고, 어떤 날은 며칠씩 하지 않았다.
학원에는 자주 늦었다. 수업 시간도 들쭉날쭉했다.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오늘 기분이 안 좋으세요?"
열네 살 수진이가 물었다. 영리한 아이였다.
"아니야. 왜?"
"아까부터 계속 한숨 쉬세요. 그리고 똑같은 말씀 세 번 하셨어요."
나는 당황했다. 내가 한숨을 쉬고 있었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나?
"미안, 선생님이 좀 피곤해서..."
항상 피곤했다. 이유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쳤다.
저녁이면 술을 마셨다. 혼자. 원룸에서. 맥주 서너 캔, 소주 반병. 취기가 오르면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소라야, 요즘 왜 이래? 연락도 안 되고."
발레단 시절 동료였던 지연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몇 달 만에 만난 자리였다.
"바빠서. 레슨이 많아."
거짓말이었다. 레슨은 많지 않았다. 그냥 사람 만나기가 싫었다.
"거짓말. 너 요즘 이상해. SNS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
"소라야..."
"진짜 괜찮다니까!"
목소리를 높였다. 지연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날 이후 지연이의 연락도 뜸해졌다. 내가 밀어낸 것이다.
혼자가 편했다. 아니, 혼자가 익숙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다. 사람들에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이는 게.
2007년 3월, 작은 사건이 있었다.
학원 원장이 나를 불렀다.
"한 선생님,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사무실로 들어갔다. 원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선생님, 학부모 컴플레인이 많이 들어와요."
"...무슨?"
"수업 태도가 성의 없다는 거예요. 늦고, 집중 안 하고, 가르치는 내용도 매번 달라진다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생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건강 문제 있으세요?"
"아닙니다."
"정말요? 최근 한 달 동안 지각이 열 번이에요. 결석도 세 번이고. 이건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할 말이 없었다.
"한 선생님, 저도 선생님 실력은 인정해요. 발레단 출신이시고, 경력도 화려하시잖아요. 근데 지금 이 상태로는..."
원장이 한숨을 쉬었다.
"다음 달까지만 하시죠. 죄송합니다."
해고였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해고였다.
학원을 나오며 눈물이 났다.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나... 왜 이렇게 됐지?'
손이 떨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숨이 막혔다.
공황발작이었다. 처음은 아니었다. 최근 몇 달간 자주 찾아왔다.
벤치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10분이 지나자 조금 나아졌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봤다. 정말 형편없었다. 발레리나였던 내가, 그렇게 자세와 몸매를 관리하던 내가, 이제는 구부정한 등과 나온 배를 가진 평범한 삼십대 여자가 되어 있었다.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이렇게는 안 돼...'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어디서부터?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발레 영상을 찾아봤다. 예전에 내가 췄던 《백조의 호수》 공연 영상.
화면 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우아했다. 빛났다. 살아있었다.
"저게... 나였네..."
과거와 현재의 간극이 너무 컸다.
울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아니, 정확히는 오후 1시.
평소처럼 늦게 일어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학원도 잘렸고, 수업도 없었다.
핸드폰을 봤다. 지연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소라야, 오늘 저녁 시간 있어? 꼭 만나고 싶어."
무시하려다가, 답장을 보냈다.
"응. 어디서?"
저녁 7시, 홍대 카페에서 만났다.
지연은 여전히 발레단에서 춤추고 있었다. 주역은 아니지만 꾸준히 무대에 섰다. 건강해 보였고, 빛이 났다.
반면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형편없어 보인다는 것을.
"소라야."
지연이 내 손을 잡았다.
"너 지금 힘들지?"
그 말에 울음이 터졌다. 카페 한가운데서.
"미안... 미안해..."
"괜찮아. 울어. 많이 울어."
한참을 울었다. 지연이 조용히 내 등을 두드려줬다.
진정한 후, 나는 모든 걸 털어놨다. 학원에서 잘린 것,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것,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 술만 마시는 것, 삶이 무너져가는 것.
"소라야, 너 우울증 아닐까?"
"...뭐?"
"전문가 상담 받아봐. 진지하게."
"나는 괜찮아..."
"괜찮지 않아. 보면 알아. 너 지금 많이 아파."
지연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리고 하나만 물어볼게. 너 아침에 일어나서 뭐해?"
"...그냥... 아무것도..."
"루틴 있어?"
"루틴?"
"매일 하는 거. 규칙적인 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매일 다르게 살아."
"그게 문제야."
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라야, 우리 발레 할 때 생각해봐. 매일 아침 몇 시에 일어났어?"
"...7시."
"그리고?"
"스트레칭하고, 아침 먹고, 9시에 연습실 가고..."
"맞아. 루틴이 있었잖아. 그게 우릴 지탱해줬어. 구조가 있었어."
지연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금 넌 구조가 없어. 그래서 무너지는 거야. 자유롭다고 착각하는데, 사실은 표류하는 거지."
그 말이 심장을 쿵 하고 때렸다.
"내일부터 해봐. 딱 하나만이라도. 아침 루틴."
"...뭘?"
"아무거나. 7시에 일어나기. 물 한 잔 마시기. 스트레칭 10분 하기. 뭐든 좋아. 근데 매일 해."
"그게 무슨 소용이..."
"속는 셈 치고 한 달만 해봐. 제발."
지연의 간곡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알람을 7시로 맞췄다. 10년 만이었다.
알람이 울렸다. 손이 자동으로 뻗어 껐다. 다시 자려고 했다.
'아니야...'
지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욕실로 비틀거리며 갔다. 세면대 옆에 물병을 준비해뒀다. 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요가 매트를 펼쳤다. 먼지가 수북했다. 1년 넘게 안 쓴 것이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플리에. 땅듀. 롱듀.
몸이 뻣뻣했다. 예전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목은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계속했다.
10분.
딱 10분만 했다.
끝나고 침대에 쓰러졌다.
'겨우... 이것만 했는데...'
숨이 찼다. 체력이 바닥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뭔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상쾌했다.
다음날도 했다.
7시에 일어나고, 물 마시고, 10분 스트레칭.
사흘째 되던 날,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일주일째 되던 날, 어느새 자동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났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침 루틴이 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7시에 일어나니, 하루가 길었다. 오전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에 책을 읽었다. 오랜만이었다. 발레 이론서를 다시 펼쳤다.
10분 스트레칭이 20분이 되었다. 20분이 30분이 되었다. 한 달 후엔 1시간을 했다. 몸이 깨어났다. 굳었던 근육이 풀렸다. 발목의 통증도 줄었다.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식사를. 계란, 샐러드, 과일. 편의점 컵라면 대신.
샤워를 매일 했다. 옷을 신경 써서 입었다. 거울 속의 내가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다른 것들이 따라왔다.
저녁에 술을 덜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야 하니까. 일찍 잤다. 11시면 침대에 누웠다.
레슨 제안이 들어왔다. 예전 학생의 엄마였다.
"선생님, 개인 레슨 해주실 수 있으세요? 저희 딸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요."
처음엔 거절하려다가, 받아들였다.
수업에 집중했다. 늦지 않았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학생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
"선생님, 요즘 많이 달라지셨어요."
열네 살 수진이가 말했다.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아이였다.
"뭐가?"
"밝아지셨어요. 그리고... 살아계신 것 같아요."
'살아있다.'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맞았다. 나는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2007년 9월.
아침 루틴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작은 발레 스튜디오를 열었다. 월세 50만 원짜리 좁은 공간이었지만, 내 공간이었다.
학생은 다섯 명으로 시작했다. 많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만의 아침 루틴은 계속됐다.
오전 7시 - 기상
오전 7시 10분 - 물 한 잔, 가벼운 스트레칭
오전 7시 30분 - 바 레슨 1시간
오전 8시 30분 - 샤워, 아침 식사
오전 9시 30분 - 독서 30분
오전 10시 - 하루 계획 정리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순서로.
처음엔 강제였다. 이를 악물고 했다.
하지만 석 달쯤 지나자 자연스러워졌다. 몸이 기억했다.
여섯 달이 지나자 루틴 없는 하루가 상상되지 않았다.
"소라야, 완전 딴사람 됐다!"
지연이 스튜디오에 놀러 와서 감탄했다.
"고마워. 네가 살렸어."
"내가 뭘. 네가 한 거지."
"루틴을 알려준 게 너잖아."
지연이 미소 지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구조가 자유를 만든다는 거."
"응. 예전엔 매일 다르게 사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건 자유가 아니라 혼돈이었어."
나는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지금은 매일 똑같은 루틴으로 시작하지만, 하루하루가 더 풍요로워."
"그치? 루틴이 기반을 만들어주니까. 그 위에서 진짜 자유가 시작되는 거야."
맞았다.
루틴은 제약이 아니었다. 토대였다. 그 토대 위에서 나는 다시 춤출 수 있었다.
2008년 3월.
스튜디오 개관 1주년.
학생은 스물다섯 명으로 늘었다. 작은 발표회를 열었다. 학생들이 무대에서 춤췄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관객석에서 지켜보며 눈물이 났다.
'나도... 다시 출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대한 갈망이 살아났다.
발표회가 끝나고 혼자 스튜디오에 남았다.
거울 앞에 섰다.
음악을 틀었다. 《백조의 호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목이 아팠다. 예전만큼 높이 뛸 수 없었다. 회전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춤췄다.
7년 만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춤췄다.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실했다.
2024년 11월.
나는 마흔아홉 살이 되었다.
스튜디오는 이제 세 곳으로 늘었다. 강사진도 다섯 명이다. 학생은 백 명이 넘는다.
나는 여전히 가르친다. 그리고 가끔 춘다. 무대는 아니지만,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난다.
18년째다.
물 한 잔 마시고, 스트레칭하고, 바 레슨 하고, 샤워하고, 아침 먹고, 책 읽고, 하루를 계획한다.
매일, 똑같이.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지겹지 않아요? 매일 똑같은 걸 하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지겹지 않아요. 오히려 자유로워요."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괜찮다. 나도 예전엔 몰랐으니까.
오늘도 아침 7시.
알람이 울린다. 손이 자동으로 뻗어 끈다. 그리고 일어난다.
욕실로 가서 물을 마신다. 차가운 물이 몸을 깨운다.
거실로 나와 요가 매트를 편다. 18년 동안 바꾼 매트가 다섯 개다.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플리에. 땅듀. 롱듀.
몸이 기억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움직인다.
거울 속의 내가 보인다. 마흔아홉 살의 나. 주름이 있고, 백발이 섞였지만, 눈빛은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루틴이 나를 살렸다.
매일 아침 7시, 이 작은 반복이 나를 무너진 바닥에서 건져 올렸다.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구조를 버린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진짜 자유는 구조에서 온다는 것을.
바가 있어야 춤출 수 있다. 루틴이 있어야 삶을 출 수 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를 한다.
부엌으로 가서 아침을 준비한다. 계란 두 개, 샐러드, 과일, 우유.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는다. 창밖으로 해가 뜬다.
'좋은 아침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책을 펼친다. 오늘은 발레 역사에 관한 책이다.
30분을 읽는다. 딱 30분. 더도 덜도 아니고.
책을 덮고 다이어리를 펼친다. 오늘 할 일을 적는다.
오전 10시: 초급반 수업
오후 2시: 개인 레슨
오후 4시: 강사 회의
저녁 7시: 중급반 수업
계획이 있다. 구조가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다.
시계를 본다. 오전 9시 55분.
스튜디오로 갈 시간이다.
가방을 메고 문을 연다.
복도에서 이웃 할머니를 만난다.
"소라 씨, 오늘도 일찍 나가네요. 정말 부지런하세요."
"감사합니다, 할머니.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엘리베이터를 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미소 짓고 있다.
'나는 괜찮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에필로그
2024년 11월 어느 날 저녁.
수업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혼자 남았다.
한 학생의 엄마가 찾아왔다.
"선생님, 상담 좀 하고 싶은데요."
"물론이죠. 앉으세요."
그녀는 삼십대 중반쯤 보였다. 피곤해 보였다.
"제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녀는 털어놓기 시작했다. 매일 늦게 일어나는 것, 계획 없이 사는 것, 우울한 것, 자신이 무너져가는 것 같다는 것.
낯익은 이야기였다.
나는 조용히 들었다.
그녀가 다 말하고 나서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사세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시고, 수업 준비도 완벽하시고, 항상 밝으시고..."
나는 미소 지었다.
"저도 예전엔 아니었어요."
"...네?"
"18년 전엔 저도 당신처럼 살았어요. 아니, 더 심했죠. 매일 다르게 살았어요. 그게 자유라고 착각하면서."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근데 어떻게..."
"아침 루틴 하나로 바뀌었어요."
"아침 루틴?"
"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똑같은 걸 했어요. 물 마시고, 스트레칭하고, 샤워하고, 아침 먹고. 단순한 거요."
"그게... 도움이 됐어요?"
"제 인생을 바꿨어요."
진심이었다.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자유는 구조에서 나온다는 것. 루틴이 감옥이 아니라 날개라는 것."
그녀가 눈물을 글썽였다.
"...해볼게요."
"하나만 하세요. 딱 하나. 그것만 매일."
"뭘... 하면 될까요?"
"당신이 제일 하고 싶은 거요. 저는 스트레칭이었어요. 당신은 뭔가요?"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쓰기요. 예전엔 매일 일기를 썼는데, 언젠가부터 안 써요."
"그럼 그걸 하세요.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딱 10분만."
"10분요?"
"네. 처음엔 작게 시작해야 해요. 크게 시작하면 포기하기 쉬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하늘.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빛들이 반짝였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뿌듯했다.
핸드폰을 봤다. 밤 9시 30분.
집에 갈 시간이다. 11시엔 자야 한다.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하니까.
가방을 챙기고 불을 끈다.
문을 잠그며 마지막으로 스튜디오를 돌아본다.
거울, 바, 마룻바닥.
이 공간이 나를 살렸다. 아니, 내가 이 공간을 만들었다. 루틴으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18년 전의 나는 매일 다르게 살았다. 자유롭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표류였다.
지금의 나는 매일 똑같이 시작한다. 루틴이 있다. 구조가 있다.
그리고 그 구조 위에서, 진짜 자유를 누린다.
원하는 일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때때로 춤춘다. 행복하다.
루틴이 만든 자유다.
집에 도착한다. 샤워를 하고, 책을 조금 읽는다.
10시 50분. 불을 끈다.
침대에 눕는다. 천장을 본다.
'내일도... 7시에 일어나지.'
그 생각이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안심이 된다.
구조가 있다는 것. 루틴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지탱해준다.
눈을 감는다.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자유는 무작위에서 오지 않는다. 자유는 구조에서 온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 똑같은 순서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그 작은 루틴이 삶의 토대가 되고, 그 토대 위에서 진짜 자유가 꽃핀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