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101) 일중독

멈추는 용기

by 이 범

일 중독

Q: 왜 일이 없으면 불안할까요?

A: 가치를 일로만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끝없는 질주
2026년 3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IT 스타트업. 35살 강태민은 새벽 2시에도 사무실에 있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어두운 사무실을 밝히고 있었다.
"이 부분만 더 하면..."
태민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개발팀장으로 일한 지 8년째.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 그게 그의 정체성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 지수였다. 받지 않았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했다.
새벽 3시, 태민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 쪽지가 있었다.
"저녁 차려놨어요. 데워 드세요. - 지수"
태민은 쪽지를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금방 머릿속은 내일 회의 준비로 채워졌다.
같은 시각, 서초구의 한 로펌. 31살 변호사 윤서아는 판례를 검색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변론 준비였다.
"이번 케이스는 꼭 이겨야 하는데..."
서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 주에만 벌써 여섯 잔째.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핸드폰에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서아야, 이번 주말에는 집에 올 수 있니?"
서아는 답장을 보냈다.
"죄송해요 엄마. 이번 주도 일 있어요."
사실 주말에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하지만 쉬는 게 불안했다. 일을 안 하면 뒤처지는 것 같았다.
3월 둘째 주 월요일, 태민은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이번 분기 목표는 전 분기 대비 150% 성장입니다."
"태민 씨,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가요?"
대표가 물었다.
"가능합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동료 준호가 다가왔다.
"태민아, 너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너 얼굴 봐. 완전 좀비야."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쉴게."
"그 소리 작년에도 들었어."
태민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준호의 걱정을 이해했지만,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일을 안 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서아도 비슷했다.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서아 변호사님, 축하드려요!"
동료들이 축하했다.
"감사합니다."
서아는 웃었지만, 기쁨은 잠깐이었다. 바로 다음 케이스가 머릿속을 채웠다.
'이번에는 더 완벽하게 준비해야 해.'
저녁 7시, 동료들이 하나둘 퇴근했다. 서아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서아, 같이 저녁 먹을래?"
후배 민지가 물었다.
"아니, 나는 일 좀 더 하고 갈게."
"언니, 오늘 승소했잖아요. 축하도 할 겸 밥 먹어요."
"다음에. 미안."
민지는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서아는 다시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3월 셋째 주, 태민은 병원에 갔다. 회사 정기검진이었다.
"강태민 씨, 혈압이 높네요. 그리고 스트레스 수치도 심각합니다."
"괜찮아요. 원래 좀 높아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위험 수준입니다. 휴식이 필요해요."
"일이 바빠서 쉬기 힘든데요."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태민 씨, 이렇게 가다간 큰일 납니다. 번아웃이나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아요."
태민은 처방전을 받고 나왔다. 하지만 약국에 가는 대신 회사로 돌아갔다.
서아도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다.
"윤서아 씨, 불면증이 심하시죠?"
"네,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과로 때문입니다. 일을 좀 줄이셔야 해요."
"그게... 쉽지 않아서요."
"왜요?"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일을 줄이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태민은 집에 일찍 들어갔다. 오후 11시. 아내 지수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 오늘 일찍 왔네."
"응. 오늘은 일찍 끝났어."
"밥 먹었어?"
"아니."
지수는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데웠다. 태민은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봤다. 회사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태민아."
"응?"
"밥 먹을 때는 핸드폰 좀 내려놔."
"아, 미안. 급한 메일이 와서."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태민아,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뭐가?"
"너는 일만 하고, 나는 혼자 있고."
"미안해.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그 말 몇 번째야?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어."
태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수의 말이 맞았으니까.
"태민아, 솔직히 말해줘. 왜 이렇게까지 일해?"
"회사에서 나를 필요로 하니까."
"나는? 나는 너를 필요로 하는데."
태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지수야. 근데 나... 일을 안 하면 불안해."
"왜?"
"모르겠어. 그냥... 일을 안 하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지수는 태민을 바라봤다. 남편의 눈에는 피로와 불안이 가득했다.
"태민아, 너는 일을 하든 안 하든 가치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
그날 밤, 태민은 잠들지 못했다. 지수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너는 일을 하든 안 하든 가치 있는 사람이야.' 정말 그럴까?


균열의 시작
3월 마지막 주, 태민은 회의 중에 쓰러졌다.
"태민 씨! 괜찮으세요?"
동료들이 달려왔다. 태민은 눈을 떴다. 회의실 천장이 보였다.
"저... 뭐..."
"119 불렀어요. 가만히 계세요."
병원에서 깨어난 태민 옆에는 지수가 있었다.
"태민아, 정신 차렸어?"
"여기가..."
"병원이야. 과로로 쓰러진 거래."
의사가 들어왔다.
"강태민 씨, 심각합니다. 극도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몸이 한계에 도달했어요. 최소 2주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2주요? 안 돼요. 회사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강태민 씨!"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가면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어요. 지금 당장 휴식이 필요합니다."
태민은 천장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실감했다.
지수가 손을 잡았다.
"태민아, 제발 좀 쉬어. 네 건강이 제일 중요해."
그날 태민은 회사에 2주 휴가를 냈다. 평생 처음이었다.
같은 주, 서아는 법정에서 패소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증거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의뢰인분..."
"괜찮아요, 변호사님. 최선을 다하신 거 알아요."
하지만 서아는 괜찮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디서 실수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대표 변호사가 불렀다.
"서아 변호사, 잠깐 들어와요."
사무실에 들어간 서아에게 대표가 물었다.
"서아 변호사, 솔직히 물어볼게요. 요즘 번아웃 온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아 보이지 않아요. 오늘 법정에서도 평소 같지 않았고."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아 변호사, 휴가 좀 다녀와요. 2주만."
"휴가요? 안 됩니다. 다음 주에 중요한 케이스가..."
"다른 변호사가 맡을 수 있어요. 서아 변호사는 쉬어야 해요."
"하지만..."
"명령이에요. 2주 휴가. 월요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서아는 사무실을 나왔다. 강제 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4월 첫째 주, 태민은 집에서 첫 번째 휴가를 보냈다. 이상했다. 평일 낮에 집에 있다는 게.
"뭐 하지..."
태민은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TV를 켜봤지만 집중이 안 됐다. 핸드폰을 들어 회사 메일을 확인하려다가, 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제발 좀 쉬어.'
태민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 햇빛을 쬈다. 언제 이렇게 햇빛을 본 게 마지막이었나.
문득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 몰랐다. 그냥 슬펐다.
서아도 비슷했다. 집에서 첫 번째 휴가를 보내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일하는 게 나은데..."
서아는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방치했던 빨래, 청소. 하다 보니 몇 시간이 흘렀다.
정리된 집을 보며 서아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뿌듯함? 아니, 뭔가 다른 감정이었다.
'아, 내가 일 말고 다른 것도 할 수 있구나.'
오후에 서아는 근처 카페에 갔다. 평일 오후, 카페는 한적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을 보니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엄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노인, 책을 읽는 학생.
'사람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구나.'
서아는 그동안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보지 못했다. 항상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그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돌리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태민이었다.
"저기... 혹시 괜찮으세요?"
서아가 물었다.
태민은 놀라 서아를 봤다.
"아, 네. 괜찮아요."
"표정이 안 괜찮아 보여서요."
태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티가 나나 봐요."
"저도 그래요. 요즘."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앉아 있다가, 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일 때문에 힘드세요?"
태민이 놀라 서아를 봤다.
"어떻게 아세요?"
"저도 그래서요. 강제 휴가 중이에요."
"저도요. 쓰러져서."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슬프지만 공감되는 웃음이었다.
"커피 한잔 더 하시겠어요? 제가 살게요."
서아가 제안했다.
"좋아요."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일 중독, 불안, 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저는요, 일을 안 하면 제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태민이 말했다.
"저도요. 일로만 제 가치를 증명하려고 한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그래요."
서아가 태민을 바라봤다.
"근데 이상한 게 뭔지 아세요? 지금 이렇게 일 안 하고 있는데, 세상이 안 무너지더라고요."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회사도 잘 돌아가고, 아무 일도 안 생기고."
"그럼 우리가 착각한 건가요? 우리가 없으면 안 된다고?"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우리는 뭐죠? 일이 아니면?"
서아가 물었다.
태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겠으니까


존재의 발견
4월 둘째 주, 태민은 지수와 함께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결혼 후 처음이었다.
"태민아, 여기 공기 좋다."
"그러네."
산책로를 걷는데, 태민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평화로움? 여유?
"태민아, 저기 벤치에 앉아서 쉬자."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았다. 지수가 태민의 손을 잡았다.
"태민아, 이렇게 너랑 손잡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일도 안 하는데?"
"응. 너는 일을 하든 안 하든, 내 남편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태민은 지수를 바라봤다. 아내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그게 아니야. 너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럼 난 뭐야?"
지수가 태민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너는 강태민이야. 내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들이고, 친구고.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야."
태민은 눈물이 났다.
"그런가?"
"그럼. 확실해."
서아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엄마가 계시는 부산 집에 내려갔다.
"어머, 서아야! 얼굴 많이 야위었다."
"엄마..."
서아는 엄마 품에 안겼다. 한참을 울었다.
"왜 우니? 무슨 일 있었어?"
"엄마... 나 요즘 너무 힘들었어."
"알아. 엄마가 다 알아."
엄마는 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아야, 너 너무 열심히 살았어. 이제 좀 쉬어도 돼."
"쉬면 뒤처질 것 같아요."
"뒤처지면 어때? 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하지만..."
"서아야."
엄마가 서아의 눈을 똑바로 봤다.
"너는 변호사라서 소중한 게 아니야. 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내 딸이야."
서아는 또 울었다. 그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머칠 동안 서아는 부산에서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함께 시장도 가고, 요리도 하고, TV도 봤다.
"엄마,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네요."
"그럼. 이게 사는 거지."
"전 그동안 뭐 한 거죠?"
"열심히 산 거야. 근데 이제는 조금 천천히 살아도 돼."
4월 셋째 주, 태민과 서아는 다시 카페에서 만났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좋아요. 아내랑 나들이도 다녀왔어요. 서아 씨는요?"
"저는 부산 집에 다녀왔어요. 엄마 만나고요."
"어떠셨어요?"
서아가 웃었다.
"좋았어요. 일 말고 다른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그동안 제 정체성을 일로만 정의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윤서아 변호사'였지, '윤서아'가 아니었어요."
"근데 이제는요?"
"이제는... '윤서아'를 찾고 있어요. 변호사 타이틀 말고, 진짜 저를요."
태민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서아 씨, 상담 받아보는 거 어때요?"
"상담요?"
"네. 저 며칠 전에 상담사 만났는데, 도움이 됐어요."
"어떤 도움이요?"
"제가 왜 일 중독이 됐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번 가볼게요."
다음 주, 서아는 상담센터를 찾았다.
"윤서아 씨, 왜 오셨나요?"
"저... 일 중독인 것 같아요."
"일을 너무 많이 하시나요?"
"네. 쉬는 게 불안해요."
상담사가 물었다.
"왜 불안한가요?"
"일을 안 하면... 제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요."
"일을 해야만 가치가 있다고 느끼시나요?"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동안 제 가치를 일로만 증명했어요. 승소율, 케이스 수, 승진..."
"그것들이 없으면요?"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상담사는 메모를 하며 말했다.
"윤서아 씨, 이 말을 한번 따라해보세요.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
서아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으시죠?"
"네..."
"괜찮아요. 천천히 받아들이면 돼요."
태민도 상담을 계속 받았다.
"강태민 씨,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어린 시절이요?"
"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태민은 잠시 생각했다.
"엄격하셨어요. 특히 아버지가. 항상 1등 하라고, 최고가 되라고 하셨죠."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인정받고 싶었어요. 아버지한테.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 들어가고..."
"그러면 아버지가 인정해주셨나요?"
태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더 잘하라고만 하셨어요."
상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계속 증명하려고 한 거네요. 일로."
태민은 눈물이 났다.
"네... 제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강태민 씨."
상담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존재의 회복
5월, 태민은 회사에 복귀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랐다.
"태민 씨, 오늘 회의 준비 됐죠?"
"네. 근데 오늘은 6시에 퇴근해야 해요."
"왜요? 급한 일 있어요?"
"아내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동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태민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6시, 태민은 퇴근했다. 지수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태민아, 요즘 많이 달라졌어."
"그래?"
"응. 예전에는 일 이야기만 했는데, 요즘은 다른 이야기도 하고."
"미안해, 그동안."
"괜찮아. 지금이 좋으면 됐지."
태민은 지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 지수야. 날 기다려줘서."
"나도 고마워. 돌아와줘서."
서아도 복귀했다. 하지만 일하는 방식이 달랐다.
"서아 변호사, 오늘도 야근하세요?"
"아니요. 오늘은 정시 퇴근할게요."
"왜요? 케이스 준비 안 하세요?"
"내일 하면 돼요. 오늘은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후배 민지는 놀라며 물었다.
"언니, 진짜 많이 변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깨달은 게 있어요. 제가 변호사이기 전에 윤서아라는 사람이라는 거요."
5월 셋째 주, 태민과 서아는 다시 카페에서 만났다.
"요즘 어때요?"
"좋아요. 일은 여전히 하지만, 일이 전부는 아니에요."
서아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일도 중요하지만, 저 자신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상담은 계속 받으세요?"
"네. 도움이 많이 돼요. 태민 씨는요?"
"저도요. 이번 주에 상담사가 물어봤어요.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예전 같았으면 '개발팀장'이라고 했을 거예요. 근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뭐라고요?"
태민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강태민입니다. 남편이고, 아들이고, 친구입니다. 그리고 가끔 개발 일도 하는 사람입니다.'"
서아는 박수를 쳤다.
"멋져요!"
"서아 씨는요?"
"저는 아직 완전히는 못 받아들였어요. 가끔 불안할 때가 있어요."
"어떤 불안이요?"
"일을 안 하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 근데 이제는 그 불안을 알아차려요. '아,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하고."
"그러면요?"
"심호흡하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나는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고."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매일 아침 거울 보면서 말해요."
6월, 태민은 팀원들과 회의를 했다.
"이번 프로젝트 목표는 현실적으로 잡읍시다. 무리하지 말고."
"태민 씨, 경쟁사는 더 빠르게 하던데요?"
"상관없어요. 우리는 우리 속도로 가면 돼요. 건강하게."
준호가 놀라며 물었다.
"태민아,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예전 같았으면 150% 목표 잡았을 텐데."
"그때는 제가 일로만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어요. 근데 이제는 알아요. 제 가치가 일의 성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걸요."
회의 후 대표가 태민을 불렀다.
"태민 씨, 요즘 달라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예전처럼 못 해서..."
"아니요. 오히려 좋아요. 예전에는 너무 무리하셔서 걱정했어요. 지금이 더 지속 가능해 보여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태민 씨, 팀원들도 따라서 변하고 있어요. 야근이 줄고, 효율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어요."
태민은 놀랐다.
"정말요?"
"네. 태민 씨가 균형을 찾으니까, 팀 전체가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서아도 변화를 만들었다. 후배들과 점심을 먹으며 말했다.
"우리 팀, 이제 주말 근무 없애요."
"언니, 진짜요?"
"네. 정말 긴급한 경우가 아니면 주말은 쉬는 거예요."
"와, 대박. 근데 괜찮아요? 다른 팀들은 다 하는데."
"괜찮아요. 우리는 평일에 집중해서 일하면 돼요."
민지가 물었다.
"언니, 진짜 많이 달라졌어요. 비결이 뭐예요?"
서아가 웃으며 말했다.
"깨달았어요. 제가 일을 잘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걸요."
6월 마지막 주, 태민과 서아는 함께 등산을 갔다. 둘 다 취미를 찾고 있었다.
"태민 씨, 힘들어요."
"조금만 더 가요. 거의 다 왔어요."
정상에 도착했다. 서울이 한눈에 보였다.
"와... 여기서 보니까 다르네요."
"그러게요. 회사도 작아 보이고."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경치를 감상했다.
"태민 씨, 저 요즘 생각해요."
"뭘요?"
"일은 제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거요. 전부가 아니고."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요.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도 중요하고, 친구도 중요하고, 저 자신도 중요하고."
"그리고..."
서아가 태민을 봤다.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거요."
"맞아요."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7월, 태민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뭔데?"
"저... 더 이상 아버지의 인정을 위해 살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그동안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아들이 되려고 너무 애썼어요. 근데 깨달았어요. 제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저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요."
"태민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조건 없이요. 제가 1등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라서요."
아버지는 한참 침묵하더니 말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나도 그렇게 자라서... 너한테도 그렇게 했구나."
"괜찮아요, 아버지. 이제는 제가 다르게 살 거예요."
아버지가 태민을 안았다.
"자랑스럽다, 아들아. 네가 누구든."
서아도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저 이번 케이스 졌어요."
"그래? 괜찮아?"
"네. 예전 같았으면 엄청 속상했을 텐데, 이번에는 괜찮아요."
"왜?"
"제 가치가 승소율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그래, 내 딸. 잘 깨달았구나."
"엄마,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서아야. 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해."
8월, 태민과 서아는 일 중독 회복 모임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태민입니다. 일 중독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서아입니다. 저도 일 중독이었습니다."
모임에는 열 명이 모였다. 모두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저는 일을 안 하면 불안해요."
한 참가자가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태민이 대답했다.
"근데 깨달았어요. 그 불안은 제 가치를 일로만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걸요."
서아가 덧붙였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가치 있어요."
모임이 끝나고 한 참가자가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제가 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느꼈어요."
9월, 태민은 회사에서 승진 제안을 받았다.
"태민 씨, 임원 되실래요?"
"감사합니다. 근데 시간 좀 생각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집에 돌아온 태민은 지수와 상의했다.
"어떻게 생각해?"
"네 결정을 존중할게. 근데 태민아, 임원 되면 더 바빠지지 않을까?"
"그게 고민이야.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했을 텐데, 이제는 내 삶의 균형도 중요하거든."
며칠 후 태민은 대표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번 승진은 사양하겠습니다."
"왜요? 혹시 처우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지금이 좋아요.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았거든요."
대표는 놀랐지만 이해했다.
"알겠어요. 태민 씨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서아도 비슷한 결정을 했다. 대형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다.
"왜요? 연봉도 훨씬 높고 좋은 조건인데."
"저는 지금 회사가 좋아요. 여기서 균형을 찾았거든요."
10월, 태민과 서아는 1년 전 처음 만났던 카페에서 만났다.
"벌써 6개월이 지났네요."
"그러게요. 많이 변했어요, 우리."
"태민 씨, 요즘 어때요?"
"좋아요. 일도 하지만, 일이 전부는 아니에요. 서아 씨는요?"
"저도요. 여전히 가끔 불안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다룰 수 있어요."
"어떻게요?"
"스스로에게 말해요. '나는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고."
태민이 웃었다.
"저도요. 매일 아침."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가을 햇살이 따뜻했다.
"태민 씨, 우리 잘하고 있는 거 맞죠?"
"맞아요. 확실해요."
11월, 일 중독 회복 모임은 30명으로 늘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어요."
태민이 소개했다.
"제 아내, 지수입니다."
지수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 중독자의 가족이었어요. 남편이 일만 하고 집에는 관심이 없을 때, 정말 외로웠어요."
"근데 지금은요?"
"지금은 남편이 돌아왔어요. 일도 하지만, 저와 함께하는 시간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요."
서아의 엄마도 왔다.
"제 딸은 항상 완벽해야 했어요. 엄마로서 안타까웠죠. 근데 이제는 딸이 행복해 보여요. 일도 하지만,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됐거든요."
모임이 끝나고 한 참가자가 울었다.
"저도... 저도 변할 수 있을까요?"
태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할 수 있어요. 저도 했으니까."
서아가 덧붙였다.
"당신은 이미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태민과 지수는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태민아, 행복해?"
"응. 정말로."
"나도. 우리 이렇게 계속 살자."
"그래.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함께 있기도 하고."
서아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서아야, 너 요즘 완전 달라 보여."
"어떻게?"
"여유로워 보여. 예전에는 항상 긴장한 것 같았는데."
서아가 웃었다.
"맞아. 예전에는 항상 증명하려고 했어. 내가 가치 있다는 걸. 근데 이제는 알아. 나는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걸."
2027년 1월 1일, 새해 첫날.
태민은 일기를 썼다.
"2027년 1월 1일.
작년 이맘때 나는 일 중독이었다. 일을 안 하면 불안했고, 일로만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는 강태민이다. 개발자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남편이고, 아들이고, 친구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다.
올해도 일은 할 것이다. 하지만 일이 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서아도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작년에 저는 일 중독에서 회복했습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깨달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요.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존재해서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도 그래요. 당신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댓글들이 달렸다.
"덕분에 용기가 나요."
"저도 받아들여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태민과 서아는 새해 첫날, 함께 산책을 했다.
"태민 씨, 올해 목표가 뭐예요?"
"글쎄요. 목표라기보다는... 계속 균형을 유지하는 거요.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좋네요. 저도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새해의 햇살이 따뜻했다.
일은 삶의 일부였다.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그것을 알았다.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이것이 2026년, 태민과 서아의 이야기였다.
일 중독에서 존재의 회복으로.
증명에서 수용으로.
달리기에서 걷기로.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멈추는 용기를 가지고, 존재의 가치를 믿으며.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