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그림자
분단의 그림자
1946년 5월. 이계민은 서울에서 온 신문을 펼쳤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숨이 나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아버지 이산갑이 서재로 들어왔다. "계민아, 신문 봤니?" "네, 아버지. 미소공동위원회가..." "그래, 결국 실패했어." 이산갑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았다. "미국과 소련,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통일 정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앞날이 캄캄하구나." 이산갑이 한숨을 쉬었다. "좌우 대립도 심해지고... 이러다가..." "이러다가요?" "나라가 둘로 쪼개질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요! 같은 민족인데!" 이계민이 소리쳤다. "민족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야." 이산갑이 쓸쓸하게 말했다. "이념이 달라지면... 형제도 원수가 되는 법이지."
며칠 후,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연설을 했대요." 한도회 회의에서 한 동지가 말했다. "무슨 내용인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답니다." "뭐라고!" 동지들이 술렁였다. "단독 정부라니... 그럼 분단을 인정하자는 건가!" "이건... 너무 성급한 거 아닙니까!" 이계민도 충격을 받았다. "이승만 박사께서 왜 그런 말씀을..." "북한이 이미 단독 정권을 준비하고 있으니, 남한도 서둘러야 한다는 논리지." 이산갑이 설명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동의할 수 없어." 이산갑이 단호하게 말했다. "통일 정부를 포기하는 건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거야."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중도 노선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계민이 입을 열었다. "좌도 우도 아닌, 민족 통일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한 동지가 회의적으로 말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단행했고..." "산업 국유화도 진행 중이라더군." "완전히 공산 체제로 가고 있어." "그렇다고 우리가 포기할 순 없습니다." 이계민이 강하게 말했다. "끝까지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계민이 말이 맞아." 이산갑이 아들을 지지했다. "희망을 버리면 끝이야."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경제적 혼란
6월 들어, 마을에도 변화가 느껴졌다. "쌀값이 또 올랐대요!" "이러다 굶어 죽겠어!" 시장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다. "미군정이 뭐 하는 거야!" "우리는 해방됐는데, 왜 더 힘들어진 거지!" 이계민은 시장을 돌아보며 가슴이 아팠다. '일제시대보다 더 어려워 보여...' 집으로 돌아오니, 산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읍에 콜레라가 돌고 있답니다!" "콜레라?" "네, 벌써 다섯 명이 죽었대요!"
이계민은 즉시 정혁진 서장을 찾아갔다. "서장님, 콜레라 대책이 있습니까?" "군정청에서 방역팀을 보낸다고 합니다만..." 정혁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약품이 부족해서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 사이에 더 퍼지면 어쩝니까!" "...미안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이계민은 한도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지, 의약품을 구할 수 없을까요?" "어렵겠구나. 지금 전국적으로 약품이 부족해." "그럼... 격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게 최선이겠지." 이산갑이 한도회 자금을 내놨다. "이걸로 격리 시설을 만들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계민은 산돌과 함께 움직였다. 마을 외곽에 임시 격리 시설을 만들었다. 환자들을 옮기고, 소독을 실시했다. "조카님, 저희도 감염될 수 있습니다!" "알아.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해." 이계민은 직접 환자들을 돌봤다. 밤낮없이 일했다. 일주일 후, 군정청에서 약품이 도착했다. 콜레라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조카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감사했다. 하지만 이계민은 기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군정청은 뭐 하는 거야...' 불만이 쌓여갔다.
상속 준비
7월 어느 날, 아버지가 이계민을 불렀다. "계민아, 이리 와 봐라." "네, 아버지." 서재에는 여러 서류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토지 문서들이야." 이산갑이 서류를 펼쳤다. "우리 집안 땅이 모두 합쳐서 2만 7천 평 정도 된다." "그렇게 많습니까?" "선대부터 물려받은 거지. 논밭, 임야 합쳐서." 이산갑이 아들을 봤다. "이제 이걸 네 이름으로 상속하려 한다." "저한테요?" "그래, 넌 장남이고, 한도회를 이어갈 사람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신데..." "계민아." 이산갑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북에서는 토지개혁으로 지주들 땅을 다 빼앗았어." "남한에서도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그럼 우리 땅도...?" "모르지. 하지만 준비는 해둬야 해." 이산갑이 설명을 이었다. "지금 네 이름으로 옮겨두면, 적어도 법적으로는 보호받을 수 있어." "그리고..." 이산갑이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너라도 살아남아야 한도회를 지킬 수 있잖니." "아버지!" "걱정 마라. 당장 죽을 건 아니야." 이산갑이 웃었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아버지." "서류는 내가 준비할 테니, 넌 공부나 계속해라." "네."
혼처 수소문
며칠 후, 어머니 강지윤이 이계민을 불렀다. "계민아, 어미랑 얘기 좀 하자." "네, 어머니." "이제 네 나이가 스물넷이지?" "네." "혼인할 나이가 됐구나." "...어머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갑자기가 아니야. 이미 늦었어." 강지윤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 아버지랑 상의했는데... 혼처를 알아보려고 한다."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공부는 혼인하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계민아." 강지윤이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이 불안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네가 가정을 이루고, 대를 이어야 우리 집안이 계속되는 거야." "......" "한도회도 마찬가지야. 차세대 리더의 아들이 있어야 조직이 안정되지." 이계민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을 좀 주세요, 어머니." "알았어.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마라." "네." 강지윤이 나간 후, 이계민은 창밖을 바라봤다. '혼인이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그동안 의용경찰단, 한도회, 공부... 정신없이 살았다. 개인적인 삶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말씀도 맞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며칠 후, 아버지가 말했다. "계민아, 김 참판 댁에 딸이 있다더구나." "김 참판이요?" "한도회 동지야. 평양에 살다가 최근에 월남했지." "아..." "딸이 스물한 살인데, 교육도 잘 받았고, 성품도 좋다더군." "아버지가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 김 참판한테 들었어.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계민은 대답을 미뤘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어떤 사람일까...'
좌우 대립 심화
8월 들어,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전국적으로 좌익 파업이 일어났대요." 정혁진 서장이 이계민에게 말했다. "부산, 대구... 철도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여러 요구사항이 있지만..." 정혁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배후에 좌익 세력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좌익이요?" "네, 공산당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럼 진압하시겠습니까?" "군정청 명령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죠."
며칠 후, 우익 청년단이 결성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북청년회라고 들어봤나?" 한도회 회의에서 한 동지가 물었다. "평양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만든 조직입니다." "뭐 하는 곳인가?" "좌익과 싸운다고 합니다. 아주 과격하게." "폭력을 쓴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계민은 걱정스러웠다. "이러다가 내전이 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어." 이산갑이 무겁게 말했다. "좌우 대립이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립을 지켜야지. 어느 쪽에도 치우치면 안 돼."
9월, 대구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신문에 큰 활자로 실렸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수십 명 사망..." 이계민은 신문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계민아." 아버지가 불렀다. "대구 사태를 봤지?" "네, 아버지."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더 큰 충돌이 있을 거다." "......" "우리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 이산갑이 아들을 봤다. "한도회도, 우리 집안도, 네 개인도... 모두 시험대에 오를 거야." "준비하겠습니다, 아버지."
10월 항쟁
10월 1일, 대구 폭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경남, 전남, 충청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됐습니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했대요!" "좌익들이 무장하고 산으로 들어갔답니다!" 마을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조카님, 우리 읍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산돌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모르겠네. 하지만 대비는 해야겠지." 이계민은 정혁진 서장을 찾아갔다. "서장님, 우리 읍 경비는 어떻습니까?" "인력이 부족합니다. 경찰이 30명밖에 안 돼요." "의용경찰단을 다시 조직할까요?" "아니, 그건 안 됩니다. 군정청이 허락 안 해요."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일단 주요 시설을 지키는 수밖에..." 그날 밤, 이웃 읍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찰 다섯 명이 죽었대요!" "좌익 무장대가 총으로 쏘고 달아났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우리도 위험한 거 아니야?" "문 잘 잠그고 나가지 마세요!" 이계민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 거지...' 창밖으로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별 하나 없이 칠흑 같았다.
각오
10월 중순, 한도회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서울에서 내려온 동지들의 표정이 심각했다. "동지 여러분." 이산갑이 회의를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내전 직전입니다." "좌우 대립이 극에 달했고, 유혈 사태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한도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동지들이 저마다 의견을 냈다. "좌익을 진압해야 합니다!" "아니, 우익도 문제가 많습니다!"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중립으로는 안 됩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계민이 입을 열었다. "동지 여러분." 모두가 젊은 이계민을 봤다. "저는... 우리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이라면?" "폭력 반대, 대화 추구, 민족 통일." 이계민이 또박또박 말했다. "좌든 우든, 폭력을 쓰는 세력은 반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장 좌익을 용인할 순 없습니다." "동시에 우익의 폭력도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계민이 동지들을 봤다. "정의로운 제3의 길을 가야 합니다."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민 동지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해야 합니다." 이산갑이 힘주어 말했다. "그게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 이유니까요." "통일된 민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니까요." 회의는 결론을 냈다. "한도회는 중도 노선을 견지한다." "폭력을 반대하고, 대화를 추구한다." "좌우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불안했다. '과연... 이 길이 옳은 걸까...'
희망의 씨앗
11월,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군경의 강력한 진압으로 10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많은 좌익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산으로 도망쳤다. "이제 좀 안정되겠군." 정혁진 서장이 안도했다. "하지만 뿌리는 남았습니다." "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 말입니까?" "네, 그들이 언젠가 다시 내려올 겁니다." 이계민은 걱정스러웠다.
12월, 어머니가 다시 혼처 이야기를 꺼냈다. "계민아, 김 참판 댁 딸을 만나보지 않겠니?" "...그러겠습니다, 어머니." 이계민은 마침내 동의했다. "세상이 불안하니, 가정이라도 이뤄야겠어요." "잘 생각했어." 강지윤이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어미가 좋은 며느리 얻을 수 있게 해줄게." 며칠 후, 김 참판 댁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계민은 긴장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게 될 수도 있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됐다. '어떤 사람일까...'
1946년이 저물어갔다. 혼란스러운 한 해였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정읍 발언, 10월 항쟁... 분단의 조짐은 점점 짙어졌다. 하지만 이계민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통일된 나라를 만들 수 있어.' '반드시...'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계속했다. 미래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면서. 창밖으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얗고 깨끗한 눈.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