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귀환 (1945-1946)
해방과 귀환 (1945-1946)
서울역, 1945년 10월
백호신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서울역에 내렸다. 십 년 만에 밟는 조선 땅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해방의 감격도.
"동무, 괜찮소?" 김한오가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십 년 동안 상해에서, 옌안에서, 태항산에서 싸웠다. 그 모든 시간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조선의 해방. 그런데 막상 돌아오니 낯설기만 했다.
역 광장은 혼잡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 만세를 부르는 사람, 가족을 찾는 사람.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백호신 동무!"
누군가 불렀다. 남로당 조직부 책임자였다.
"중국에서 고생이 많았소. 박헌영 동무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오."
"박헌영 동지를?"
"그렇소. 당신 같은 경험 있는 전사가 필요하오."
백호신은 그를 따라갔다. 서울 시내의 한 건물. 남로당 본부였다.
박헌영이 그를 맞았다. 마흔대 중반의 카리스마 있는 남자였다.
"백호신 동무, 환영하오. 의열단에서의 활약상을 들었소."
"과찬이십니다."
"겸손할 것 없소. 우리에게는 당신 같은 전사가 필요하오." 박헌영이 지도를 펼쳤다. "지금 남조선은 혼란스럽소. 미군이 들어왔고,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는..."
"싸워야 하오.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박헌영의 눈이 빛났다. "전라도 지역 조직을 맡아주시겠소?"
백호신은 잠시 망설였다. 전라도. 그가 도망쳐 나온 곳. 머슴으로 살았던 곳.
"제가... 전라도 출신입니다." 공식 기록상 그랬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하오. 지역을 아는 사람이."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박헌영이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하오, 동무."
전라도, 1945년 11월
백호신은 전라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당 조직을 구축했다. 농민들을 만나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세포를 만들었다.
"동무들! 해방은 왔지만 우리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오!"
마을 회관에 모인 농민들 앞에서 백호신이 연설했다.
"지주들이 여전히 우리를 착취하고, 친일파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소! 일본인만 바뀌었을 뿐 우리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소!"
농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소작농들은 여전히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다. 어떤 지주들은 오히려 더 많이 요구했다.
"우리는 토지개혁을 해야 하오! 땅을 가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하오!"
박수가 터졌다.
"남로당과 함께하시오! 우리가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만들겠소!"
연설이 끝난 후, 한 농민이 다가왔다.
"선생님, 정말 토지개혁이 가능합니까?"
"물론이오. 북조선에서는 이미 시작되었소. 남조선에서도 할 수 있소."
"하지만 미군이..."
"미군은 곧 떠날 것이오. 그리고 우리의 정부가 들어설 것이오."
백호신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는 정말로 믿었다. 역사의 필연을. 공산주의의 승리를.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미군정의 탄압, 1946년 여름
미군정은 남로당을 경계했다. 특히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탄압이 심해졌다.
"남로당은 불법 조직이다!"
경찰이 남로당 사무실을 급습했다. 당원들을 체포했다. 백호신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백호신을 체포하라!"
그는 농촌으로 숨어들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활동했다. 마치 중국에서처럼.
김한오가 찾아왔다. "상황이 안 좋소. 당 조직이 와해되고 있소."
"북에서 도움이 오지 않습니까?"
"북도 정신없소. 자기들 체제 구축하느라."
백호신은 절망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박헌영 동지는?"
"지하로 잠적했소. 언제 다시 나타날지..."
이것이 혁명인가? 백호신은 혼란스러웠다. 중국에서는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팔로군이 강했고, 인민들의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어느 날 밤, 그는 한 농가에 숨어 있었다. 창밖을 보니 별이 빛나고 있었다.
화산(이현상)의 말이 떠올랐다. "영웅이 되려 하지 말게. 혁명가는 영웅이 아니라네."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던가?'
백호신은 자문했다. 머슴에서 벗어나려고. 신분을 상승하려고. 인정받으려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산주의를 믿는가? 인민을 위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잘 몰랐다. 다만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만 알았다. 너무 멀리 왔다. 되돌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