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아들의 축복

형과아우

by 이 범


2027년 3월, 서울 평창동.

"형님,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재벌 선우그룹 회장실 앞에서 동생 선우민준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선우태준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아버지 선우일성 회장이 자신을 부른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 몇 달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이후로는.

"알았어."

태준은 42층 회장실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78세. 한때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거목이 이제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여위어 있었다.



"태준아, 왔느냐."

"예, 아버지."

"가까이 오너라. 내 눈이 어두워져서 네 얼굴이 잘 안 보이는구나."

태준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일성 회장의 손이 떨리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태준아, 네가 큰아들이다. 내가 평생 일군 이 그룹을... 이제 네게 물려줄 때가 됐다."

태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30년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 아직 건강하십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니다. 의사들도 다 포기했어.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성 회장이 기침을 했다. "다음 주 월요일, 이사회를 소집하겠다. 그때 공식적으로 후계 구도를 발표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그 전에..." 일성 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이 자리에 걸맞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구나. 내일 저녁, 우리 가족만의 만찬을 준비하거라. 네가 직접 말이다. 네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네 생각을 듣고 싶다."

태준은 잠시 당황했다. 요리라니.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복도로 나온 태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드디어 선우그룹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날 저녁, 태준은 평창동 본가 아래층에 있는 동생 민준의 거처를 찾았다. 형제는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를 찾는 일은 드물었다.

"형님, 무슨 일이세요?"

민준은 36세. 형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늘 미묘했다. 태준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면, 민준은 어머니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태준이 경영학을 전공하며 그룹 경영의 정석을 배웠다면, 민준은 MIT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하고 실리콘밸리에서 5년을 보냈다.

"내일 아버지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 하는데, 솔직히 요리는 내 전문이 아니야. 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민준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이죠, 형님. 제가 미국에서 배운 요리 실력을 보여드릴게요."

"고맙다." 태준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그룹을 물려주신다고 하셨어. 내가 회장이 되면, 너도 좋은 자리를 주마. 걱정하지 마."

민준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저는 자리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그냥... 형님이 행복하시면 됩니다."

다음날 오후, 민준은 본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한우 안심, 제주산 전복, 국내산 송이버섯. 최고급 재료들이 손질되어 나갔다. 민준의 손은 정확했고, 그의 요리는 예술이었다.

오후 6시, 만찬 준비가 끝났다. 민준은 형 태준에게 연락했다.

"형님, 다 됐어요. 서빙만 하시면 됩니다."

"수고했다, 민준아."

태준은 식당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모셨다. 일성 회장은 휠체어에 앉아 식탁으로 왔다. 어머니 김소희 여사도 함께였다.

"음, 좋은 냄새구나." 일성 회장이 말했다.

태준은 직접 아버지의 앞에 요리를 놓았다. 한우 스테이크, 전복구이, 송이버섯 리조또. 일성 회장은 천천히 음식을 맛봤다.

"훌륭하다, 태준아. 네가 이런 솜씨가 있는 줄 몰랐구나."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일성 회장은 태준을 응접실로 불렀다.

"태준아."

"예, 아버지."

"넌 준비가 됐느냐? 5만 명의 직원을 책임지고, 30조 원의 자산을 운영할 준비가?"

"예, 아버지. 제 평생을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일성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월요일 이사회에서 공식 발표하마. 너는 이제 선우그룹의 차기 회장이다."

태준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손에 입맞췄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명예롭게 그룹을 이끌겠습니다."


그날 밤 11시.

민준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형의 부탁으로 요리를 해주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평생 동생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의 능력은, 자신의 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인가.

문이 열리며 어머니 김소희 여사가 들어왔다.

"민준아."

"어머니."

"형이 내일 공식 후계자로 발표된단다."

"알고 있어요."

김소희 여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는 너무 착하다, 민준아. 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나는 안다. MIT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AI 스타트업을 성공시켰잖니. 네 형은 그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이야."

"어머니..."

"네 아버지는 늙었어. 눈도 어둡고, 판단력도 흐려졌지. 태준이는 경영 능력이 없어. 그가 회장이 되면 선우그룹은 5년 안에 망할 거야."

민준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형님은 형님이에요."

"민준아." 김소희 여사가 아들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네가 회장이 되어야 해. 네가 이 그룹을 살릴 수 있어. 내일 아침, 아버지께 다시 요리를 대접해라. 그리고 네 계획을 말씀드려. 아버지의 마음이 바뀔 거야."

"하지만 어머니, 그건..."

"네 형은 오늘 저녁 요리를 직접 하지 않았어. 네가 만들었지. 아버지는 그걸 모르셔."

민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요리로 형이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생각해봐, 민준아.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

그날 밤, 민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형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야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동이 트기 전, 그는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7시, 민준은 주방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전통 한식을 준비했다. 소고기 미역국, 갈비찜, 각종 나물. 아버지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음식들이었다.

8시, 민준은 아버지의 침실로 직접 아침상을 들고 갔다.

"아버지, 아침 식사 준비했습니다."

일성 회장이 눈을 떴다. "누구냐?"

"민준입니다, 아버지."

"민준이? 무슨 일이냐?"

"아버지께 제 마음을 담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일성 회장은 상을 받고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이건... 네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그 맛이구나."

"예, 아버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레시피를 알려주셨습니다."

일성 회장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민준아, 앉아라."

민준은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민준은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선우그룹의 미래 전략입니다. AI, 친환경 에너지, 바이오 산업. 이 세 분야에 집중 투자하면 10년 안에 그룹 가치를 3배로 늘릴 수 있습니다."

일성 회장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민준의 분석은 정교했고, 비전은 명확했다.

"네가 이걸 다 준비했느냐?"

"예, 아버지. 지난 5년간 준비해온 것입니다."

"민준아..." 일성 회장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너는 언제 이렇게 컸느냐. 나는 너를 몰랐구나."

"아버지, 저도 선우그룹을 사랑합니다. 저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일성 회장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월요일 이사회에서... 내 결정을 다시 생각해봐야겠구나."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태준이었다.

"아버지!"

태준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얼어붙었다. 동생 민준이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식탁에는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민준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형님, 저는 그냥..."

"아버지!" 태준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 저를 후계자로 정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일성 회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태준아, 앉아라."

"아버지, 설명해주십시오!"

"어제 저녁 요리... 누가 만들었느냐?"

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민준이가 만들었지?"

침묵.

"태준아, 너는 나를 속였구나."

"아버지, 그건 오해입니다. 민준이가 도와준 것뿐이고..."

"그럼 네 능력은 어디 있느냐? 네 비전은? 네가 이 그룹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말해보거라."

태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준비된 답변이 없었다. 그는 평생 '맏아들'이라는 타이틀로 살아왔을 뿐, 진짜 실력을 증명한 적이 없었다.

"나가거라, 태준아. 나는 다시 생각해야겠다."


태준은 비틀거리며 방을 나왔다. 복도에서 그는 벽에 기대어 섰다. 손이 떨렸다. 분노가, 배신감이, 좌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민준... 네가 나를 배신했구나."

그날 저녁, 선우가 본가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일성 회장은 두 아들을 모두 응접실로 불렀다.

"앉아라, 둘 다."

태준과 민준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앉았다.

"나는 실수를 했다." 일성 회장이 말했다. "태준아, 너를 맏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로 정하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민준아, 너를 둘째라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도 잘못이었다."

"아버지..." 두 형제가 동시에 말했다.

"월요일 이사회에서 내 결정을 발표하겠다. 하지만 그 결정이 무엇이든, 너희 둘은 형제다. 형제는 서로 미워할 수 없다."

"아버지, 하지만..." 태준이 말했다.

"태준아." 일성 회장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너는 맏아들로서의 책임을 배워야 한다. 진짜 능력 말이다. 직함이 아니라 실력으로 존경받는 법을 배워야 해."

"예, 아버지..."

"민준아."

"예, 아버지."

"너는 너무 오랫동안 그늘에 숨어 있었다. 이제 나와야 할 때다. 하지만 기억해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자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민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너희 둘 다 내 아들이다. 그리고 선우그룹은 너희 형제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끄느냐는 능력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일성 회장은 심호흡을 했다.

"월요일까지 너희 둘에게 과제를 주겠다. 선우그룹의 5개년 발전 계획을 각자 작성해 오너라. 직접 말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고. 그 계획을 보고 내가 결정하겠다."

두 형제는 서로를 바라봤다. 태준의 눈에는 분노와 결심이 있었고, 민준의 눈에는 미안함과 도전 의식이 있었다.

그날 밤부터 두 형제는 각자의 방에서 밤을 새웠다. 태준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룹의 미래를 고민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깨달았다. 민준은 자신의 야망과 형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왔다.

오전 10시, 선우그룹 본사 대회의실. 20명의 이사들이 모였다. 일성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고, 태준과 민준이 그 뒤를 따랐다.

"시작하겠습니다." 일성 회장이 말했다. "오늘 이 자리는 선우그룹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회의실이 숨죽였다.

"먼저 태준, 네 계획을 발표해라."

태준은 일어서서 화면을 켰다. 그의 발표는 진지했다. 전통 산업의 고도화, 글로벌 시장 진출, 안정적인 성장. 보수적이지만 안전한 전략이었다.

"다음, 민준."

민준이 일어섰다. 그의 발표는 혁신적이었다. AI, 빅데이터, 바이오. 공격적이지만 미래지향적인 전략이었다.

이사들은 두 발표를 듣고 웅성거렸다. 두 계획 모두 장단점이 있었다.

일성 회장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계획 모두 훌륭하다. 태준의 계획은 안정적이고, 민준의 계획은 혁신적이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내 결정은 이것이다." 일성 회장이 두 아들을 바라봤다. "태준, 너는 선우그룹 회장이 되어라."

태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모두가 일성 회장을 바라봤다.

"민준, 너는 신설될 선우미래전략본부 본부장이 되어라. 회장 직속으로 향후 10년의 미래 전략을 책임져라."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태준아, 너는 현재를 지켜라. 5만 명의 직원을, 30조의 자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해라. 그게 맏아들의 책임이다."

"예, 아버지."

"민준아, 너는 미래를 개척해라. 네 형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라. 그게 둘째의 역할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너희는 형제다." 일성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 서로 경쟁하되, 서로를 미워하지 마라. 한 사람이 현재를 지키고, 한 사람이 미래를 열 때, 선우그룹은 영원할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두 형제는 복도에서 마주쳤다.

"형님..." 민준이 먼저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태준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아니다. 너 덕분에 내가 정신을 차렸어. 나는 타이틀에만 의존했지, 진짜 능력을 키우지 않았어."

민준이 형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민준아. 내가 현재를 지킬 테니, 너는 미래를 열어다오."

"예, 형님. 함께 가겠습니다."

두 형제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포옹했다.

창밖으로 봄햇살이 비쳤다. 선우그룹 본사 건물은 여전히 우뚝 서 있었고, 이제 그 안에는 현재와 미래를 함께 품은 두 형제가 있었다.

5년 후.

선우그룹은 대한민국 재계 2위로 올라섰다. 태준 회장의 안정적인 경영과 민준 본부장의 혁신적인 전략이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두 형제는 여전히 의견 충돌을 했지만, 서로를 존중했다.

일성 회장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서 태준과 민준은 나란히 서서 아버지를 배웅했다.

"형님."

"응?"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셨어요."

"뭔데?"

"서로를 발견하게 해주신 거요.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평생 진짜 형제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태준은 미소 지으며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맞아. 아버지는 끝까지 지혜로우셨어."

두 형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기,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칼로 싸우는 대신, 함께 걷는 법을 배운 두 형제.

이것이 선우가의 새로운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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