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의 서원

두형제

by 이 범


그날 밤, 민준은 잠들 수 없었다.
선우미래전략본부장 발령 후 첫 주말이었다. 형 태준은 회장으로서의 업무에 바쁘게 움직였고, 민준에게는 독립적인 공간과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이었다.
'나는 형을 배신했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부추김에 넘어가, 형이 만든 것처럼 속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었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좋은 자리를 얻었지만, 그 과정은 정당하지 않았다.
새벽 2시,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집 안이 답답했다. 본가를 떠나고 싶었다. 형의 얼굴을, 어머니의 기대를, 아버지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가방을 꾸렸다. 노트북, 충전기, 몇 벌의 옷. 그리고 조용히 본가를 빠져나왔다.
"어디 가세요, 도련님?"
현관의 경비가 물었다.
"잠깐... 바람 쐬러요. 걱정 마세요."
민준은 차를 몰고 서울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멀리,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새벽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민준은 라디오도 켜지 않은 채 달렸다. 강원도 방향으로,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해가 뜨기 시작했다. 어느덧 차는 강원도 평창의 한적한 시골길에 들어서 있었다. 민준은 더 이상 운전할 힘이 없었다. 도로 옆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트를 눕혔다.
'잠깐만 눈을 붙이자.'
그렇게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민준은 꿈을 꾸었다.
그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은 땅에서 시작해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그 계단 위아래로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어떤 이들은 올라가고, 어떤 이들은 내려왔다.
계단 꼭대기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아."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더 깊고 오래된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네 아버지 일성의 하느님, 네 할아버지의 하느님이다."
민준은 꿈속에서 떨었다.
"너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구나. 네가 한 일 때문에, 네 형제를 속인 일 때문에."
"예...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가는 곳마다 내가 함께할 것이다. 너는 큰 일을 이룰 것이다. 네 손으로 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은 네가 만드는 것이다, 민준아. 네가 앞으로 가는 길에서 정직하게, 겸손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행동한다면,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다."
빛이 점점 강해졌다.
"하지만 기억해라. 네 형 태준을 잊지 마라. 그는 여전히 네 형이고, 너희는 함께 가야 한다. 언젠가 너는 다시 네 형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네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예... 예..."
"가거라, 민준아. 두려워하지 마라."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땀이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차창 밖을 보니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였다.
'꿈이었나...'
하지만 그 꿈은 너무나 생생했다. 민준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멈춘 곳은 작은 산자락 아래였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좁은 오솔길이 보였다.
민준은 이끌리듯 그 길을 따라 걸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큰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민준은 그 바위 앞에 섰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기가... 하느님의 집 같아.'
그는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아니 누구시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욕심 때문에 형을 배신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넘어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을 썼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저는... 저는 정말로 선우그룹을 사랑합니다. 저는 정말로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제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람이 불었다. 소나무 잎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민준은 일어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그 바위를 책상 삼아 화면을 펼쳤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다. 제목은 '선우미래전략본부 윤리 강령'.
첫 번째 항목: "우리는 정직하게 일한다. 어떤 성과도 거짓으로 얻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항목: "우리는 겸손하게 배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배운다."
세 번째 항목: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개인의 성공보다 조직의 성장을, 조직의 성장보다 사회의 발전을 추구한다."
민준은 계속해서 타이핑했다. 그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업무 문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서원이었다.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문서가 완성됐다. 민준은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그 바위를 바라봤다.
"이곳을 저는 '새벽터'라고 부르겠습니다. 여기는 제가 다시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MIT 졸업할 때 어머니가 선물한 것이었다. 민준은 바위 한쪽에 작은 글씨로 새겼다.
"2027.3.15. 새 출발. 선우민준."

서울로 돌아온 민준은 변했다.
월요일 아침, 선우미래전략본부 첫 출근. 본부는 선우그룹 본사 건물 38층에 자리 잡았다. 아직 직원은 민준 혼자였다. 텅 빈 사무실에 민준은 책상 하나, 의자 하나를 놓고 앉았다.
첫 번째 업무는 팀 구성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인맥으로 사람을 뽑지 않았다. 공개 채용 공고를 냈다.
"선우미래전략본부 채용. 학벌, 경력 무관. 단, 열정과 정직함 필수.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합니다."
지원자가 쏟아졌다. 500명이 넘었다. 민준은 직접 모든 서류를 검토했다. 그리고 1차로 50명을 뽑았다.
면접은 독특했다.
"당신이 선우그룹 회장이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당신이 한 일 중 가장 부끄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당신은 정직합니까?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십시오."
민준은 똑똑한 사람보다 정직한 사람을, 화려한 이력보다 진실된 태도를 가진 사람을 선택했다.
2주 만에 10명의 팀원이 구성됐다. 서울대 출신도 있었고, 지방대 출신도 있었다. 대기업 경력자도 있었고, 갓 졸업한 신입도 있었다.
첫 팀 미팅.
"여러분, 환영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우리는 선우그룹의 미래를 만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일하느냐입니다."
그는 평창 산속에서 작성한 '윤리 강령'을 나눠줬다.
"이것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의미가 없습니다."
젊은 팀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본부장님, 질문 있습니다. 이 강령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비즈니스 세계는 때로 타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 원칙을 어긴 적이 있습니다. 제 형을 속이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게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르게 하려고 합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감시해주십시오. 제가 이 원칙에서 벗어나면, 지적해주십시오."
팀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것은 그저 직장이 아니었다. 이것은 사명이었다.
첫 프로젝트는 'AI 윤리 가이드라인' 개발이었다.
"선우그룹이 AI 산업에 진출한다면, 우리는 가장 윤리적인 AI를 만들어야 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개인정보 보호, 알고리즘 투명성, 사회적 책임. 이것들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만듭시다."
3개월간의 작업 끝에 가이드라인이 완성됐다. 민준은 형 태준에게 보고했다.
"형님, 이것이 우리 본부의 첫 결과물입니다."
태준 회장은 문서를 꼼꼼히 읽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민준아, 이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니냐? 경쟁사들은 이런 제약 없이 달릴 텐데."
"형님,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불리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태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해보자. 하지만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
"감사합니다, 형님."
민준이 문을 나서려는데, 태준이 불렀다.
"민준아."
"예, 형님?"
"너... 많이 변했구나. 예전의 네가 아닌 것 같아."
민준은 미소 지었다. "예, 형님. 저는 평창 산속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1년이 흘렀다.
선우미래전략본부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AI 윤리 가이드라인은 업계 표준이 됐고, 선우그룹의 이미지는 크게 개선됐다. 친환경 에너지 투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바이오 사업은 글로벌 파트너십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민준은 교만하지 않았다. 매달 한 번씩 그는 평창의 '새벽터'를 찾았다. 그곳에서 혼자 앉아 자신을 돌아봤다.
"제가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까?"
"제가 정직하게 일하고 있습니까?"
"제가 형을 존중하고 있습니까?"
어느 토요일 아침, 민준이 새벽터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
형 태준이었다.
"형님?"
태준은 바위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위에 새겨진 민준의 글씨를 보고 있었다.
"민준아, 이곳이 네가 매달 오는 곳이구나."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비서가 네 동선을 보고했어. 매달 평창에 간다고. 궁금했지."
두 형제는 나란히 바위 앞에 앉았다.
"민준아."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너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형님?"
"나는 평생 맏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 노력하지 않고, 배우지 않고, 그저 타이틀에 기댔지. 너를 무시했고, 너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어."
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보면서 깨달았어. 너는 진짜였어. 너의 열정도, 너의 정직함도, 너의 능력도. 모두 진짜였어."
"형님..."
"나도 변하고 싶어. 너처럼. 이 바위 앞에서 나도 새로 시작하고 싶어."
민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형님,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저는 형님을 속였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넘어가서..."
"아니야." 태준이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그 일이 우리 모두를 깨웠어. 아버지도, 너도, 나도.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안일하게 살았을 거야."
형제는 포옹했다. 진심으로.
"형님, 함께 서원합시다." 민준이 말했다.
"서원?"
"예. 이 바위를 증인 삼아, 우리 서로에게 약속합시다. 우리는 정직하게 일하고, 겸손하게 배우고, 함께 성장하겠다고."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 형제는 바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민준이 먼저 말했다. "저 선우민준은 약속합니다. 제가 이루는 모든 성과의 10분의 1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장학금으로, 사회공헌으로, 약자를 위한 기술 개발로."
태준이 이었다. "저 선우태준은 약속합니다. 선우그룹의 모든 이익의 10분의 1을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직원 복지로, 지역 사회 발전으로, 환경 보호로."
두 사람은 바위에 손을 얹었다.
함께 말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경쟁자이지만, 동반자입니다. 서로를 밀어주고, 서로를 견제하며, 함께 더 나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소나무들이 춤을 췄다.
그날 이후, 그 바위는 '형제의 바위'로 불렸다. 태준과 민준은 매 분기마다 그곳에서 만났다. 성과를 나누고, 실수를 고백하고, 서로를 격려했다.
5년 후.
선우그룹은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에 선정됐다. 태준 회장의 안정적인 경영과 민준 부회장의 혁신적인 전략(1년 전 민준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더 중요한 것은 선우그룹의 기부 문화였다. 매년 이익의 10%를 사회에 환원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1만 명을 넘었고, 선우그룹이 지원한 사회적 기업은 100개가 넘었다.
어느 봄날, 평창 새벽터.
이제 이곳에는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선우 형제 정자'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선우그룹이 지역 사회를 위해 기증한 휴식 공간이었다.
정자 안에서 태준과 민준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형님, 기억하세요? 5년 전 이 바위 앞에서 우리가 한 약속?"
"물론이지."
"우리 잘하고 있는 걸까요?"
태준은 동생을 바라봤다. "민준아, 네가 그날 이곳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니?"
"뭔데요?"
"하느님의 집이 아니라, 네 진짜 모습을 발견한 거야. 욕심과 두려움 뒤에 숨어 있던 진짜 네 모습.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
민준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도 이곳에서 발견했어. 타이틀 뒤에 숨어 있던 나의 나태함과, 그것을 넘어선 진짜 리더의 모습을."
태준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함께 성장한 것을 축하하자."
민준도 찻잔을 들었다. "형님과 함께 걷는 이 길에 감사합니다."
찻잔이 부딪쳤다.
정자 밖으로 봄꽃이 흩날렸다. 그 바위는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두 형제의 서원을 지켜보며.
세월이 흘러도, 그 바위는 기억할 것이다.
욕심으로 시작했지만 정직으로 돌아온 한 사람의 여정을.
교만으로 살았지만 겸손을 배운 한 사람의 변화를.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두 형제의 사랑을.
이것이 선우 형제의 새벽터였다.
그리고 이것이 민준의 서원이 이루어진 이야기였다.
—끝—

에필로그
10년 후, 그 바위 옆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이곳은 새벽터입니다.
2027년 3월 15일, 선우민준이 이곳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정직을 택했습니다.
두려움을 넘어, 용기를 발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당신도,
오늘 여기서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선우 형제 재단"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덧붙여져 있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신다면, 저는 제가 받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돌려드리겠습니다.'
선우민준의 서원, 2027.3.15"
그 비석은 오늘도 새벽터를 찾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의 새벽은 언제입니까?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