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334)

피의 대가

by 이 범


해가 저물었다.
시신들은 마을 외곽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이름도 없이, 비석도 없이, 깊이 묻혔다.
백호신은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저들을 죽였다...'
조순호와 다른 간부들은 승리를 자축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늘 대성공이었소! 반동을 숙청하고 인민의 힘을 보여줬소!"
리명철이 백호신을 찾았다.
"백호신 동무! 함께 축배를 드시죠!"
백호신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합니다. 먼저 쉬겠습니다."
"그래도..."
"혼자 있고 싶습니다."
백호신은 돌아서 걸었다. 어디론가. 아무 데나.
거리는 고요했다. 사람들이 모두 집 안에 숨어 있었다. 오늘의 학살을 목격한 후.
백호신은 어머니의 무덤으로 갔다.
작은 봉분. 비석도 없는.
그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무엇을 한 겁니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산갑 선생님이... 어머니를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약을 구해주고... 장례비를 마련해주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저는...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는 땅을 쳤다. 주먹으로.
"왜... 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산갑 선생님이 좋은 분이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백호신은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냈다.
"정치야 잘 살거라"
"잘 산다는 것이... 이런 겁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잘 사는 겁니까?"
그는 천을 꼭 쥐었다.
"어머니... 저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이 떨어졌다. 무덤 위에.
백호신은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가 완전히 졌다. 달이 떠올랐다.
김산돌의 저주
다음 날 아침, 백호신은 다시 감옥으로 갔다.
김산돌을 보러.
지하 감방. 김산돌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이산갑 일가의 처형.
백호신이 창살 앞에 섰다.
"김산돌."
김산돌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울었던 것이다.
"너..."
그의 목소리는 증오로 가득했다.
"이산갑 선생님을... 죽였구나..."
백호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산돌이 창살을 붙잡고 일어섰다.
"열두 명... 열두 명을 죽였어... 이산갑 선생님, 부인, 동생들..."
그가 백호신에게 침을 뱉었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다. 아니, 짐승만도 못하다!"
백호신은 그것을 받아냈다. 피하지 않았다.
김산돌이 소리쳤다.
"이산갑 선생님이 네 어머니를 도왔다! 약을 구해줬고, 장례비를 마련해줬어! 그런데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알고도 그랬다는 거냐?"
백호신은 고개를 숙였다.
김산돌이 웃었다. 미친 듯이.
"하하하... 알고도 그랬구나... 너는 정말... 정말 악마구나..."
그가 백호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백정치, 아니 백호신. 너는 저주받을 것이다."
"......"
"너는 평생 고통받을 것이다. 오늘의 일이 너를 따라다닐 것이다. 꿈에서도, 깨어서도."
김산돌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산갑 선생님의 얼굴이... 네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매일 밤, 매 순간."
백호신은 그 말을 들으며 알았다.
맞다. 이미 시작되었다.
어젯밤부터. 이산갑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아도, 떠도.
"그리고 너는 후회할 것이다." 김산돌이 말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백호신은 돌아서려 했다.
김산돌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이계민 도련님과 이의호 도련님은 살아있다! 그들이 너를 찾을 것이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백호신은 멈췄다.
"그들이... 살아있다고?"
"그렇다! 너는 그들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이 너를 심판할 것이다!"
백호신은 감옥을 나왔다.
밖에는 햇빛이 밝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두웠다.
'이계민과 이의호... 살아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안도? 두려움? 죄책감?
모두 섞여 있었다.
9월의 전세 역전
며칠 후,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유엔군 반격!"
"인민군 붕괴!"
영광 인민위원회가 혼란에 빠졌다.
조순호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동무들,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우리는 철수해야 합니다."
"어디로?"
"지리산으로. 다시 빨치산이 되는 겁니다."
백호신도 회의에 참석했다.
"언제 철수합니까?"
"내일 새벽. 국군이 오기 전에."
리명철이 물었다.
"포로들은 어떻게 합니까?"
조순호가 차갑게 말했다.
"모두 처형합니다. 증거를 남기면 안 됩니다."
"김산돌도?"
"물론입니다."
백호신이 끼어들었다.
"김산돌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조순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개인적인... 일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김산돌의 처형
그날 밤, 백호신은 김산돌을 감방에서 끌어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처형입니다."
김산돌은 웃었다.
"드디어 죽는구나. 좋다. 빨리 죽고 싶었다."
두 사람은 마을 외곽으로 갔다. 이산갑 일가가 묻힌 공동묘지 근처.
달빛이 밝았다.
백호신이 총을 꺼냈다.
김산돌이 무릎을 꿇었다.
"쏴라. 주저하지 마라."
백호신은 총을 겨눴다. 하지만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김산돌이 말했다.
"못 쏘겠냐? 나도 죽이지 못하겠냐?"
"......"
"너는 결국 비겁자구나. 이산갑 선생님은 죽이면서, 나는 못 죽이는."
백호신의 손이 떨렸다.
김산돌이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백정치. 너는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냐? 왜 이산갑 선생님을 죽였냐?"
백호신은 대답할 수 없었다.
김산돌이 다가왔다. 총구를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여기다 쏴라. 빨리."
"......"
"아니면 내가 네 총을 빼앗아서 너를 쏠 것이다."
백호신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울렸다.
김산돌이 쓰러졌다.
백호신은 총을 내렸다.
김산돌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흘렀다. 이마에서.
백호신은 무릎을 꿇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김산돌의 시신을 이산갑 일가의 무덤 근처에 묻었다.
손으로 직접 흙을 파고, 시신을 넣고, 다시 흙을 덮었다.
땀과 눈물이 섞였다.
"김산돌... 이산갑 선생님... 모두... 미안합니다..."
일이 끝났을 때는 새벽이었다.
백호신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무덤들을 바라보았다.
열세 개의 무덤.
이름도 없는 무덤들.
"저는... 지옥에 갈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
철수
다음 날 새벽, 인민위원회는 영광을 떠났다.
인민군 잔류 병력과 빨치산들이 함께 지리산으로 향했다.
백호신도 그들과 함께였다.
마을 사람들이 나와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들은 안도의 표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이었다. 복수가 두려웠다.
백호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영광 마을이 보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민위원회가 서류를 불태운 것이다.
'나는... 이곳에 무엇을 남겼는가?'
피와 죽음.
그것뿐이었다.
국군의 진주
그날 오후, 국군이 영광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맞았다. 태극기를 흔들었다.
"국군이다!"
"우리를 구하러 왔다!"
하지만 일부는 두려워했다. 인민위원회에 협조했던 자들.
국군 지휘관이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인민위원회가 저지른 일들을 조사하겠습니다. 피해자 가족은 신고하십시오."
한 노인이 나섰다.
"이산갑 선생님 일가가... 학살당했습니다..."
"어디 묻혔습니까?"
"공동묘지에... 이름도 없이..."
국군 병사들이 공동묘지로 갔다.
새로 묻힌 무덤들을 찾았다. 열세 개.
발굴하기 시작했다.
시신들이 나왔다. 부패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알아볼 수 있었다.
"이산갑 선생입니다..."
"부인도..."
"동생들도..."
마을 사람들이 울었다.
국군 지휘관이 분노했다.
"이 만행을 누가 저질렀습니까?"
"인민위원회입니다... 특히 백호신이라는 빨치산 중대장이..."
"백호신?"
"예. 그자가 주도했습니다."
지휘관이 기록했다.
"백호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동굴 속의 이계민
그 무렵, 이계민은 동굴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발의 상처가 악화되었다. 감염되었다. 열이 났다.
물도 없었다. 음식도 없었다.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의식이 흐려졌다.
환각이 보였다. 아버지가 보였다.
"계민아..."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아들아. 너는 잘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어머니를..."
"너는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산갑의 환영이 미소 지었다.
"살아라, 계민아. 복수하려 하지 말고, 그저 살아라."
"아버지..."
환영이 사라졌다.
이계민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가지 마세요..."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누군가 오고 있었다.
이계민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누, 누구요?"
"도련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선단이었다.
남진국과 두 명의 동료가 동굴로 들어왔다.
"도련님! 살아계셨습니까!"
남진국이 이계민을 부축했다.
"남... 남진국..."
"예, 저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안전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남진국의 얼굴이 굳었다.
"...돌아가셨습니다."
이계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니 가슴이 무너졌다.
"그... 놈이... 백호신이..."
"예. 백호신입니다."
남진국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우리가 반드시 복수하겠습니다."
"아우는... 의호는..."
"살아있습니다. 강지윤 선생과 함께 불갑산에 숨어 있습니다."
이계민은 안도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리고 기절했다.
남진국이 그를 업었다.
"빨리 옮겨야 합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한선단은 이계민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영광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마을.
그곳에서 이계민은 치료받았다. 발의 총알을 제거하고,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일주일 후, 이계민은 깨어났다.
"여기는..."
"안전한 곳입니다."
남진국이 옆에 있었다.
"의호는?"
"곧 데려오겠습니다."
이계민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장님...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는 제가 하겠습니다." 남진국이 말했다. "도련님은 회복하십시오."
"아니오. 제가... 직접..."
"도련님."
남진국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산갑 선생님께서 원하신 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도련님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호신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반드시."
남진국의 눈에 결의가 담겼다.
이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남진국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백호신... 너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지리산으로
백호신과 빨치산들은 지리산에 도착했다.
다시 산속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전보다 훨씬 힘들었다.
국군의 토벌이 더 조직적이었다. 보급도 끊겼다. 민심도 완전히 떠났다.
백호신의 중대는 다시 굶주림과 추위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백호신 자신의 마음이었다.
매일 밤, 이산갑의 얼굴이 보였다.
꿈에서도, 깨어서도.
"용서하오..."
그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백호신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학살 장면이 재생되었다.
죽창에 찔리는 사람들. 피. 비명.
"그만... 그만..."
그는 소리쳤다. 동료들이 깨어났다.
"중대장 동무, 괜찮습니까?"
"...악몽이었습니다."
"요즘 계속 악몽을 꾸시는군요."
백호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악몽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이현상과의 재회
며칠 후, 백호신은 이현상을 만났다.
사령부 은신처에서.
이현상은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병이 깊어 보였다.
"호신, 왔는가."
"예, 선생님."
두 사람은 작은 불 앞에 앉았다.
"영광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백호신은 고개를 숙였다.
"...예."
"이산갑 일가를 숙청했다고."
"...예."
이현상은 오래 침묵했다.
"후회하는가?"
백호신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현상이 말했다.
"호신, 자네는 선을 넘었네."
"...선을?"
"혁명과 복수의 선. 정의와 광기의 선."
이현상이 백호신을 바라보았다.
"이산갑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가?"
"...양반이었습니다. 지주였습니다."
"그뿐인가?"
백호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산갑은 독립운동가였네. 한도회를 지원했고, 한선단을 조직했네. 일제와 싸웠네."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도 죽였다는 거로군."
백호신은 고개를 숙였다.
이현상이 한숨을 쉬었다.
"호신, 우리는 길을 잃었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있네."
"하지만 계급투쟁은..."
"계급투쟁?" 이현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네. 우리는 그저... 권력을 원했을 뿐이네."
백호신은 놀라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나도 이제 깨달았네. 너무 늦었지만." 이현상이 기침을 했다. 피가 섞여 나왔다.
"우리가 만들려던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네."
"선생님..."
"호신, 자네도 이미 괴물이 되었네. 이산갑을 죽인 순간."
이현상이 백호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네. 멈출 수 있네."
"어떻게...?"
"하산하게. 투항하게.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게."
백호신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너무 많이 왔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현상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와 같은 대답이군. 그렇다면... 끝까지 가야겠군. 함께."
두 사람은 침묵했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백호신은 생각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영광에서. 이산갑을 죽인 그날.'
이제 움직이는 것은 그저 시신일 뿐이었다.
살아있지만 죽은 자.
그것이 백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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