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1950년 가을)
중매
1950년 가을, 이계민은 한선단의 은신처에서 회복 중이었다.
발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여전히 절뚝거렸다. 평생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신체적 상처보다 더 깊은 것은 마음의 상처였다.
아버지, 어머니, 숙부들, 친척들... 열두 명이 한꺼번에 떠났다.
이계민은 말이 없었다.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았다.
"도련님, 식사하셔야 합니다."
남진국이 밥을 가져왔지만, 이계민은 거의 먹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남진국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이의호도 형이 걱정되었다.
"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님마저..."
"의호야, 나는 괜찮다."
"괜찮지 않으십니다!"
이의호가 소리쳤다.
"형님은 하루 종일 방에만 계십니다. 밥도 안 드시고, 말도 안 하시고..."
"......"
"아버지께서 보시면 슬퍼하실 겁니다!"
이계민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열여덟 살. 이제 거의 어른이 되었다.
"의호야, 미안하다. 형이 약해서..."
"아닙니다, 형님." 이의호가 형의 손을 잡았다. "저도 힘듭니다. 매일 밤 꿈에 부모님이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계민은 동생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 너 말이 맞다..."
그날 저녁, 사촌 이용님이 찾아왔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여성이었다. 이산갑의 조카딸. 학살을 피해 미리 다른 지역으로 시집간 덕에 살아남았다.
"오빠!"
"용님아, 왔구나."
이용님은 오랜만에 보는 사촌오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수척하고, 야위고, 생기가 없었다.
"오빠... 많이 힘드시죠..."
"괜찮다."
"괜찮지 않으세요."
이용님이 이계민 옆에 앉았다.
"오빠, 이러시면 안 돼요. 작은아버지께서, 작은어머니께서 슬퍼하실 거예요."
이계민은 고개를 숙였다.
이용님이 말을 이었다.
"오빠, 제가... 한 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누구를?"
"좋은 분이에요. 오빠 같은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분."
이계민은 고개를 저었다.
"용님아, 나는 지금 그럴 처지가..."
"바로 그래서입니다, 오빠."
이용님이 사촌오빠의 손을 잡았다.
"오빠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해요. 의지할 사람이."
"의호가 있지 않느냐."
"의호는 아직 어려요. 오빠를 의지해야 할 사람이지, 오빠가 의지할 수는 없어요."
이계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분 이름은 김민화예요. 서사 김학두 선생님의 큰딸이고요."
"김학두 선생님?"
"예. 아버님과 친하셨던 분이에요. 독립운동도 같이 하셨고."
이계민은 기억했다. 김학두. 아버지가 존경하던 선비.
"그분 따님이..."
"예. 스물세 살이에요. 착하고, 현명하고, 강한 분이에요."
"강하다고?"
"예. 그분도...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아버님이 독립운동 하시느라 집안이 어려웠고, 일제 때 고초를 겪으셨어요."
이용님이 이계민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오빠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이계민은 잠시 생각했다.
"...만나봐야겠구나."
"정말요?"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용님이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오빠.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첫 만남
며칠 후, 이계민은 김민화를 만났다.
한선단 은신처 근처의 작은 마을. 조용한 찻집에서.
이계민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되었다. 손에 땀이 났다.
문이 열리고 이용님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한 여성이 있었다.
김민화였다.
이계민은 일어났다. 다리가 아팠지만 참았다.
김민화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검소하지만 단정했다.
얼굴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눈빛이었다.
맑고, 강하고, 슬픔을 알고 있는 눈.
"안녕하십니까."
김민화가 먼저 인사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계민입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이용님이 차를 주문하고 자리를 떴다. 둘만 남겨두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계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셨다고요."
이계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잃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김민화의 눈에 동정이 어렸다. 하지만 동정만은 아니었다. 이해가 있었다.
"저도... 아버지를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예.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셔서... 여러 번 잡혀가셨습니다. 한번은 정말... 돌아오지 못할 뻔했습니다."
김민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저는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게 해달라고."
"...돌아오셨습니까?"
"예. 기적처럼. 하지만... 많이 다치셨습니다. 고문을 받으셔서..."
이계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고통을 알고 있었다. 상실의 두려움을.
"힘드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계민 선생님보다는... 훨씬 덜합니다."
김민화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정말로 가족을 잃으셨으니까요."
이계민은 할 말이 없었다.
김민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면...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계민은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니 말하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인민재판이었습니다. 인민위원회가... 우리 가족을..."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날의 일을.
아버지, 어머니, 숙부들이 끌려가던 것.
자신이 총에 맞아 도망친 것.
그리고 나중에 들은 학살의 이야기.
김민화는 조용히 들었다. 중간에 눈물을 닦았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은 침묵했다.
김민화가 손수건을 꺼내 이계민에게 건넸다.
이계민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셔도 됩니다."
김민화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우는 것은... 약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이계민은 눈물을 닦았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계민은 느꼈다.
이 여자는... 다르다.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만남
일주일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산책을 했다. 마을 뒷산의 오솔길을.
이계민은 심하지 않았지만 아주약간 절뚝거렸다. 김민화가 천천히 걸어주었다.
"다리가 많이 불편하시죠?"
" 다리가 아니라 발 뒤꿈치 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익숙해졌습니다."
"평생 그러실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김민화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힘드시겠어요."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김민화가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세요?"
"군대에 가려고 합니다."
"군대요?"
"예. 국군에 입대하려고요. 이번 달 안으로."
김민화가 놀랐다.
"하지만 발이..."
"괜찮습니다. 전투병은 아니어도...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계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라가 위급합니다. 저라도 해야 합니다."
"...아버님의 뜻을 이어가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조국을 위해 사셨습니다. 저도... 그래야 합니다."
김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계민이 말을 멈췄다.
"하지만?"
"군대에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이계민은 김민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결혼입니다."
김민화가 숨을 멈췄다.
"...네?"
"김민화 선생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계민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확고했다.
"저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이제 의호만 남았습니다."
"......"
"하지만 의호는 아직 어립니다. 저도 군대에 가면... 혹시 모릅니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이계민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래서... 가기 전에... 가족을 만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가족을."
김민화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사랑하시는 건가요?"
이계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사랑인지..."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 편안합니다. 당신이 저를 이해해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계민이 눈을 감았다.
"당신과 함께라면...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민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계민 선생님..."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김민화는 오래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겠습니다."
이계민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약식 결혼
일주일 후, 작은 결혼식이 열렸다.
성대한 혼례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고, 이계민 집안은 상중이었다.
한선단 은신처의 작은 방에서.
참석자는 스무 명도 안 되었다.
이의호, 이용님, 남진국과 한선단 몇 명, 그리고 김학두와 그의 가족들.
신부 김민화는 소복을 입었다. 화려한 혼례복 대신.
신랑 이계민도 검은 두루마기를 입었다.
주례는 김학두가 맡았다.
"오늘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결합을 축복합니다."
김학두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도 이산갑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이산갑 선생은... 제 친구였습니다. 평생 조국을 위해 싸운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그가 이계민을 바라보았다.
"계민, 자네는 이산갑 선생의 아들입니다.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바랍니다."
"예, 선생님."
김학두가 김민화를 바라보았다.
"민화야, 너는 이제 이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 힘든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있으면... 계민이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예, 아버지."
"그렇다면 두 사람, 서로에게 맹세하시오."
이계민과 김민화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계민이 먼저 말했다.
"김민화 선생님, 아니... 민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당신에게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처투성이이고, 절뚝거리고,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
"하지만 약속합니다. 당신을 평생 지키겠습니다.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계민이 김민화의 손을 꼭 쥐었다.
"당신과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만들겠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김민화도 말했다.
"이계민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저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고생만 했습니다."
"하지만 약속합니다. 당신 옆에 있겠습니다. 힘들 때도, 슬플 때도. 당신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김민화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희망이 되겠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절을 했다. 깊이.
참석자들이 박수를 쳤다.
소박한 잔치가 이어졌다.
음식도 많지 않았다. 전쟁 중이라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따뜻했다.
이의호가 형에게 다가왔다.
"형님, 축하합니다."
"고맙다, 의호야."
"형수님 잘 모시세요."
이계민이 웃었다.
"물론이지."
이용님도 왔다.
"오빠, 제 말이 맞았죠?"
"네가 옳았다, 용님아. 고맙다."
"언니도 좋은 분 만나셨어요."
김민화가 이용님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용님 씨. 오빠를 소개해줘서."
남진국이 축배를 들었다.
"이계민 도련님, 김민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조촉한 잔치였지만, 따뜻했다.
오랜만에 웃음이 있었다.
첫날밤
밤이 되었다.
작은 방 하나가 신혼부부에게 주어졌다.
이계민과 김민화는 방에 들어갔다.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계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긴장되십니까?"
"...조금요."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웃었다.
김민화가 말했다.
"선생님... 아니, 이제 '여보'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그럼... 계민 씨."
"민화 씨."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계민이 말했다.
"나는... 내일 군대에 갑니다."
"알고 있어요."
"언제 돌아올지 모릅니다. 혹시... 못 돌아올 수도..."
김민화가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지만..."
"돌아오실 거예요. 반드시."
김민화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약속하세요. 살아서 돌아오시겠다고."
이계민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약속합니다.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당신에게."
"저도 약속할게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몇 년이 걸려도."
두 사람은 껴안았다.
오래, 꼭.
촛불이 깜빡였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방 안은 따뜻했다.
두 사람의 온기로.
아침
다음 날 아침, 이계민은 군복을 입었다.
김민화가 옷깃을 매만져주었다.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네. 멋있어요."
이계민이 그녀를 껴안았다.
"기다려주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제발."
"그러겠습니다."
이의호가 형을 배웅하러 왔다.
"형님, 잘 다녀오세요."
"의호야, 형수님 잘 모셔드려라."
"당연하죠."
남진국과 한선단도 나왔다.
"도련님, 무운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대장님. 여러분도 건강하십시오."
이계민은 마지막으로 김민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사랑합니다, 민화."
처음으로 하는 고백이었다.
김민화가 미소 지었다. 눈물을 흘리며.
"저도 사랑해요, 계민 씨."
이계민은 돌아서서 걸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김민화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절뚝거리며 걷는 뒷모습.
하지만 당당했다.
'돌아오세요... 제발... 무사히...'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이계민도 손을 들었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그는 떠났다.
전쟁터로.
그리고 김민화는 남았다.
기다리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