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평화[2]-1
사람들의 일상의 잔상들이 잠겨진 읍내 우시장을 가로질러 한참 동안을 걷다 보면, 마침내 영광의 명산, 물뫼산의 푸른 산자락 아래에 다다른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집들은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 사이에 흩어져 있어, 마치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마치 사람들의 일상이 자연 속에 녹아든 듯한 느낌을 준다.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바람에 실린 산나물의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고, 진달래 빛 자운영 꽃들이 윙윙거리는 벌떼를 유혹하는 밭두렁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자연의 생명력이 그대로 느껴지며, 인간의 손길이 닿은 밭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여름에 어릴 적 멱을 감던 저수지 수문 아래로 흐르는 개울을 건너는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물살에 실려 와 그리움을 자극한다.
울창한 소나무 그늘이 펼쳐진 곳에 이르면, 마치 한 폭의 동양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소나무의 짙은 초록빛 그늘은 햇빛마저도 맑고 서늘하게 거르고, 그 아래서의 휴식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길섶 섬돌에 적힌 이정표를 뒤로하고 한참을 또다시 걸어가다 보면, 산 어귀의 시냇물 위를 돌로 채워놓은 징검다리를 만나게 된다.
이 징검다리는 마치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다리처럼, 사람들을 물뫼산의 깊은 곳으로 이끈다. 돌 위를 건너며 발걸음마다 물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곳에서의 여정은 단순한 산책을 넘어, 자연과의 깊은 소통이며, 사람들의 삶이 자연 속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체험하는 시간이 된다. 물뫼산의 풍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선물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던 나의 조부, 이산갑은 자신이 산감(山監)으로 일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시절의 산과 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마을과 약간 떨어진 백정치의 집 앞에 있는 나지막한 팽나무 당산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언제나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장소였다.
팽나무의 그늘 아래, 넓은 바위통에 몸을 기대고 앉은 이산갑은 오늘도 윗마을의 자신의 경작 0지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산감으로서의 삶은 고단했지만, 그만큼 보람찼다. 산림을 관리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연을 가꾸며 살아가는 일은 그에게 큰 의미였다.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었다.
바위통에 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금 느꼈다. 그의 경작지는 이제 그의 손자가 돌보고 있지만, 이산갑은 여전히 그 땅을 사랑했고, 그 땅이 주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렇게 이산갑은 팽나무 당산 언덕 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삶의 지혜를 이곳에서 자연과 나누며,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을 생각했다. 그에게 이곳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공간이었다. 이산갑의 회상은 그렇게 팽나무 아래, 넓은 바위통에 앉아 자연과 함께 이어졌다.
당산 언덕 위의 넓은 바위통에 몸을 기대고 앉은 이산갑은, 오늘도 윗마을 자신의 경작지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경작지는 마치 그의 인생처럼 넓고 깊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땀 흘려 일궈낸 삶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바위통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등을 통해 전해지며, 그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평온함을 느낀다. 이곳은 그에게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간의 교차로였다. 경작지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지만, 이산갑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기며, 과거의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마을의 평화를 지켜냈던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한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논밭과,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노력과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산갑은 이 순간, 자연과 함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난 시간들이 주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긴다.
당산 언덕 위에서의 이 시간은 이산갑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이다. 이 넓은 바위통에 기대어, 그는 오늘도 그의 삶과 경작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미래를 향한 생각에 잠긴다. 이산갑의 이 시간은, 그의 인생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평화와 성찰의 순간으로 남는다.
한동안 계몽운동에 헌신했던 이산갑은, 조선어를 가르치며 항일운동을 하던 '불온 세력'을 색출하려 읍내에 들이닥친 일본 순사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내고 마을에 평화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오늘처럼 회상에 잠기며, 함께 숨 쉬던 숲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함께 살아온 동네 사람들은 오가며 그에게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하고, 그들 일터로 향한다. 그때마다 조부는 그들의 가족 안부를 묻거나 손을 들어 반가움의 신호를 보낸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애로움과 눈가에 정겨움이 가득한 친숙함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