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비극 이산갑 시대 (1945-1950)
이산갑 시대 (1945-1950)
해방 후 좌우 대립
1945년 해방 이후, 영광은 좌우 이념 대립이 심각한 지역이 되었다.
개화기부터 유학생이 많았고, 1920년 영광중학교 설립 운동이 있었을 정도로 선진화된 곳이었다. 1921년에는 영광유치원이 개설될 만큼 문화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적 수준 때문에 이념 대립도 첨예했다.
이산갑은 한도회를 통해 온건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한선단을 조직해 실질적인 항일 무장투쟁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극단을 배척했다.
"좌든 우든, 극단은 나라를 망칩니다."
이산갑은 한도회 회의에서 자주 말했다.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원할 뿐입니다. 공산주의도, 극우도 아닙니다."
하지만 영광에는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도 많았다.
해방 후, 남로당 조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염산면에는 김삼룡이라는 남조선노동당 지하총책이 있었다.
좌우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산갑은 부르주아다!"
좌익들이 비난했다.
"양반 출신으로 독립운동 했다고? 거짓말이다! 결국은 지주 계급 아닌가!"
하지만 이산갑은 대응하지 않았다.
"말로 다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진실을 증명할 것입니다."
1946-1949, 긴장의 고조
1946년부터 상황은 악화되었다.
빨치산들이 지리산뿐 아니라 영광 구수산(351m), 월암산(338m), 물무산(257m) 등에도 거점을 만들었다.
특히 백수면 구수산의 갓봉(344m)은 빨치산 본부가 되었다.
"밤손님들이 자주 온다."
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그렇게 불렀다.
밤이 되면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징발했다. 거부하면 "반동"으로 몰렸다.
하지만 낮에 경찰이 와서 물었다.
"밤손님에게 밥 줬지?"
"아...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야 살았다.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
영광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산갑은 중립을 지키려 애썼다.
"우리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다만 조선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시대가 중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학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남하했고, 7월에 영광을 점령했다.
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조순호가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숙청"이 시작되었다.
영광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단어였다. 숙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반동 분자를 색출한다!"
경찰 가족, 군인 가족, 청년단원, 우익 인사.
그들뿐만 아니라 그 일가친척까지.
멸문지화였다.
무기가 부족한 빨치산들은 칼과 죽창을 사용했다.
백수면에서는 한 번에 열 명 이상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염산면 설도항에서는 산 사람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수장시켰다.
그리고 7월 중순, 이산갑 일가가 끌려갔다.
인민재판.
열두 명 학살.
이산갑, 부인, 동생들, 조카들.
칼과 죽창.
피.
비명.
죽음.
영광 사람들은 그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막으려 하면 자신도 죽었다.
9월 28일, 짧은 수복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며칠 후, 유엔군과 국군이 영광에 들어왔다.
지프를 탄 미군 흑인 병사들과 국군.
영광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했다.
"만세! 만세!"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유엔군과 국군은 하룻밤, 아니 그냥 스쳐 지나갔다.
주둔하지 않았다.
영광은 여전히 빨치산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보복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든 반동들을 색출하라!"
유엔군 환영에 나섰던 사람들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생산유격대를 조직한다!"
생산유격대는 인민공화국의 후방 조직이었다. 무기는 없었다. 대창(죽창)만 들었다.
하지만 살상력은 충분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태극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그 일가족 15명이 학살되었다.
염산면 야월리 김해 김씨 집안이었다.
"피란민을 하룻밤 재워줬다"는 이유로 은닉죄.
15명 몰살.
영광읍 홍곡리의 박씨 집안.
32명 학살.
이유는 "개인 감정."
일제 때 징용 보낸 구장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해방 후 그 집안 아들들이 구장 집에 가서 항의했다.
그런데 구장 아들이 공산당원이었다.
6·25가 터지자 보복했다.
박씨 일가 32명 학살.
물무산의 태극기
영광읍 물무산(257m) 정상에는 국기 게양대가 있었다.
낮에 태극기를 걸어놓으면, 밤에 빨치산들이 인공기로 바꿔놓았다.
매일 아침 누군가 올라가 태극기를 다시 걸어야 했다.
하지만 위험했다. 빨치산이 숨어 있었다.
"야든이!"
사람들이 양씨 성을 가진 한 남자를 불렀다. 별명이 야든이였다. 아버지가 여든 살에 낳았다고 해서.
야든이는 힘이 셌다. 품팔이로 살았다. 바보 취급받았지만 성실했다.
"돈 줄게. 매일 아침 태극기 걸어줘."
"예."
야든이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공짜밥은 안 먹었다.
매일 아침, 야든이는 태극기를 안고 물무산에 올랐다.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걸었다.
며칠, 몇 주, 몇 달.
야든이는 묵묵히 일했다.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관심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밥이었다.
어느 날 아침.
탕!
총성.
야든이가 쓰러졌다.
빨치산의 총탄에 맞았다.
태극기를 안은 채.
영광 사람들은 울었다.
"야든이가... 야든이가..."
이념의 희생자. 단지 밥을 벌기 위해 일했을 뿐인데.
1950년 겨울-1951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남하했다.
영광은 여전히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낮에는 경찰, 밤에는 빨치산"
영광 사람들의 공포는 계속되었다.
경찰도 가혹했다.
"빨치산에게 밥 줬지?"
"아닙니다!"
"거짓말! 총살!"
어린아이 둘을 포함해 일곱 명이 총살당했다.
한 여인은 빨치산 남편을 대신해 끌려나왔다. 등에는 갓난아기를 업고 있었다.
총성.
여인을 관통한 총알이 아기까지 관통했다.
"아이가 무슨 죄가..."
목격자들이 울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이었다.
빨치산은 더 잔혹했다.
"온 가족을 전부 죽인다!"
군경 가족은 학살 대상 1호였다.
이산갑 가족이 그랬듯이.
염산면 축동리 동산부락의 박씨들.
같은 축동리 축장 마을의 김해 김씨들.
염산면 반암리의 한씨들.
멸문지화.
기독교인 학살
특히 염산교회는 참혹했다.
전체 교인의 3분의 2인 77명이 학살당했다.
이유는 "반동 종교."
염산면 월암산 밑 오동리는 김삼룡의 고향이었다. 그를 추종하는 빨치산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한 목사는 부인과 아들,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참살당했다.
칼로.
천천히.
"신을 부르라!"
빨치산이 조롱했다.
목사는 기도했다. 죽어가면서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부인과 아들, 손자도 함께 학살되었다.
백수면 구수산
백수면 구수산에는 갓봉(344m)과 수리봉(351m)이 있었다.
갓봉에는 빨치산 본부.
수리봉에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 전진기지.
직선거리 2km.
그 사이 입석골 골짜기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0년 11월, 경찰이 토벌 작전에 나섰다.
입석골 근처 천정리를 지나야 했다.
"빨치산 협조자를 색출한다!"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일곱 명을 끌어냈다.
어린아이 둘 포함.
"총살!"
탕탕탕!
한 여인은 아기를 업고 있었다.
총알이 여인을 관통하고 아기도 관통했다.
"아이가 무슨 죄가..."
목격자는 평생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교사의 학살
길용리의 금 교사.
전쟁 전에는 노래를 잘 불렀다. 목소리가 멋졌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빨치산이 되었다.
어느 날, 금 교사가 한 아이를 끌고 왔다.
2학년인가 3학년 학생.
"반동의 가족이다!"
금 교사가 칼로 아이를 찔렀다.
그리고 고구마밭 고랑에 처박았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에게 외쳤다.
"돌을 던져라!"
아이들은 떨었다. 도망갈 수도 없었다. 도망가면 자기 가족이 죽었다.
한 아이는 돌을 들었지만 던지지 못했다.
돌이 자기 발 앞에 떨어졌다.
"너도 반동이냐!"
하지만 금 교사는 그냥 지나갔다.
그 아이는 평생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