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339) 심유(深惟)

이계민 시대 (1950-1953)

by 이 범


1950년 가을, 이계민의 귀환과 결혼
이계민은 영광의 참상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일가 열두 명 학살.
하지만 영광에 가지 못했다. 군대가 그를 필요로 했다.
대신 동생 이의호와 아내 김민화가 이산갑 댁을 지켰다.
민화는 임신 중이었다.
영광은 여전히 불안했다. 낮에는 평화로웠지만, 밤이 되면 긴장해야 했다.
"밤손님이 올 수도 있어."
마을 사람들이 경고했다.
"문단속 잘하세요. 불 끄고 조용히 계세요."
민화와 의호는 그렇게 살았다.
낮에는 이산갑 댁을 수리하고, 밤에는 숨죽이고.
1951년 9월, 이승국의 탄생
1951년 9월 15일, 아들이 태어났다.
이산갑 댁에서.
학살의 현장이었던 그 집에서, 새 생명이.
영광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산갑 선생님 댁에 경사네!"
"대를 이으셨어!"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밤손님들이 알면..."
"쉿! 조용히."
민화는 아기를 안고 이산갑이 심은 동백나무 아래 앉았다.
"승국아, 할아버지가 심으신 나무야. 네가 이 집을, 이 가문을 이어갈 거야."
1951년 가을, 영광의 긴장
영광은 여전히 낮과 밤이 달랐다.
낮에는 경찰이 순찰했다.
"빨치산 본 사람?"
"없습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밤에 봤다.
밤이 되면 빨치산이 내려왔다.
"밥 내놔."
"예..."
주지 않으면 죽었다. 주면 낮에 경찰에게 죽었다.
영광 사람들은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민화도 두려웠다.
"의호야, 만약 밤손님이 오면..."
"형수님,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킬게요."
하지만 열아홉 살 청년이 빨치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산갑 댁에는 빨치산이 오지 않았다.
아이러니했다. 이산갑을 학살한 빨치산들도, 그의 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왜일까?
어쩌면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산갑의 명망이 너무 높아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물무산의 계속되는 비극
물무산에서는 여전히 태극기와 인공기가 바뀌었다.
야든이가 죽은 후,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맡았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또 죽었어..."
"누가 할 거야?"
결국 경찰이 직접 했다.
무장하고 여러 명이 함께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위험했다. 빨치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영광읍은 혼란스러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1952년, 토벌 강화
1952년이 되자 국군과 경찰의 토벌이 강화되었다.
백수면 구수산 갓봉을 집중 공격했다.
"빨치산 본부를 소탕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갓봉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몇 번이나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민간인 피해가 늘었다.
"빨치산 협조자!"
의심만 가도 총살.
증거 불필요.
구수산 근처 마을들은 공포에 떨었다.
"우리는 피란도 못 가요. 피란 가면 빨치산에게 반동으로 몰려요. 안 가면 경찰에게 빨치산 협조자로 몰려요."
진퇴양난.
염산면의 참상
염산면은 더 심했다.
월암산 빨치산들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했다.
낮에도 감히 경찰이 들어오지 못했다.
빨치산들은 "인민재판"을 계속했다.
염산교회 교인들을 집중 학살했다.
77명.
전체 교인의 3분의 2.
어떤 가정은 온 식구가 몰살당했다.
설도항에서는 수장이 계속되었다.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산 채로.
"으아아악!"
비명이 바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구하려 하면 자신도 수장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영광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빨치산들이 여전히 산에 있었다.
구수산, 월암산, 물무산.
토벌은 계속되었다.
1953년 겨울까지.
1954년 봄까지.
조금씩, 빨치산들이 소탕되었다.
어떤 이들은 전사했다.
어떤 이들은 투항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버티다가 굶어 죽었다.
최종 집계
전쟁이 완전히 끝났을 때, 영광군은 피해를 집계했다.
피살자: 21,225명.
영광군 인구의 상당수.
누가 죽였는가?
빨치산? 경찰? 국군? 인민군?
모두였다.
좌익도 우익도 모두 죽였다.
이유는?
"반동"
"빨갱이"
"협조자"
"의심스러워서"
"개인 감정"
모두가 이유였다.
이계민의 귀향
1954년 여름, 이계민은 제대했다.
영광으로 돌아왔다.
삼 년 만이었다.
아내 민화와 아들 승국이가 마중 나왔다.
승국이는 세 살이 되어 있었다.
"아빠!"
승국이가 달려왔다. 처음 보는 아빠였지만.
이계민이 아들을 안았다.
"승국아... 많이 컸구나..."
민화가 눈물을 닦았다.
"무사히 돌아와줘서 고마워요."
"고마운 건 나야. 기다려줘서."
이계민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많은 것이 변했다.
빈집이 많았다. 주인이 죽었거나 피란 간.
마을 사람들이 인사했다.
"이 서방님, 돌아오셨어요."
"예,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누구나 가족을 잃었다.
친구를, 이웃을.
이계민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어머니, 숙부들, 친척들.
열두 명.
그는 그들의 무덤으로 갔다.
공동묘지.
열두 개의 무덤.
이계민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눈물이 흘렀다.
"제가...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키겠습니다. 이 집을, 이 가문을, 아버지의 뜻을."
승국이가 할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할아버지..."
아이의 맑은 목소리.
이계민은 아들을 안았다.
"승국아, 할아버지께서 너를 지켜주실 거야."
"응!"
희망이었다.
학살의 땅에서 태어난 새 생명.
그가 미래였다.
에필로그: 기억
영광 사람들은 기억한다.
6·25를.
21,225명의 희생자를.
야든이를.
염산교회 77명을.
이산갑 일가 열두 명을.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매년 추모제를 지낸다.
홍곡리의 박남도는 32명의 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영광 사람들은 말한다.
"영광은 아직도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상처가 너무 깊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간다.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이기에.
영광군 6·25 전쟁 피살자: 21,225명
그들을 기억한다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