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아들

씨앗은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by 이 범

죽은 아들

2115년 가을, 제주도.
선우지안(52세)은 통합 이사장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변했다. 3년 전의 교만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겸손하고, 형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리더가 되었다.
하지만 사촌 형들의 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선우태민(60세)과 선우준호(55세).
어느 날, 둘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형, 지안이 또 국제 AI 윤리 상을 받았대."
"알아. 뉴스에 나오더라."
"언론이 계속 '천재 이사장' '민준의 후계자' 이러는 거 보면... 짜증나."
태민이 술잔을 비웠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거야? 우리도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맞아. 나도 선우그룹 이사야. 형도 부회장이잖아. 근데 왜 지안만 주목받아?"
"할아버지가 그 노트북을 지안한테만 준 게 화근이야."
준호가 속삭였다.
"형, 우리... 지안을 좀 떨어뜨릴 방법 없을까?"
"무슨 소리야?"
"아니, 해치자는 게 아니라... 그냥 좀 망신을 주는 거지. 너무 잘나가잖아."
태민은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모르겠어. 하지만 기회가 오면..."

2115년 12월.
선우 가문 대회의.
안건: AI 윤리 재단의 새로운 국제 프로젝트.
예산 500억 원이 필요했다.
지안이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아프리카 10개국에 AI 윤리 교육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민준께서 꿈꾸시던 '기술이 모든 인류를 섬기게 하는' 비전의 실현입니다."
태민이 손을 들었다.
"지안, 500억이면 큰돈인데, 수익은?"
"수익은 없습니다. 순수 기부입니다."
"그럼 재단 재정이 악화되는 거 아냐?"
"3년간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준호가 끼어들었다.
"장기적으로? 지안, 넌 이상주의자야. 현실을 봐. 재단이 망하면 어쩌려고?"
"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계산했습니다."
"네 계산을 누가 믿어?"
회의는 격렬해졌다.
결국 투표.
찬성: 40%
반대: 60%
부결되었다.
지안은 충격받았다.
"여러분, 이것은 할아버지의 꿈이었습니다."
태민이 냉정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꿈이 뭐든, 재단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그날 밤, 지안은 좌절했다.
"소연아, 나 실패한 것 같아."
"왜요?"
"가족들이 나를 믿지 않아. 내 비전을 지지하지 않아."
"그래도 계속 해야죠."
"어떻게? 예산도 없는데."
지안은 결정했다.
"내 개인 돈을 쓸 거야."
"뭐요?"
"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유산. 50억 원 있잖아. 그걸로 시작할 거야."
"하지만 그건..."
"괜찮아. 이것이 옳은 일이야."

2116년 1월.
지안은 개인 재산 50억 원으로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혼자서.
가족의 지원 없이.
재단의 공식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개인 프로젝트였다.
3개월 후, 지안은 아프리카로 떠났다.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현지에서 AI 윤리 교육을 시작했다.
힘들었다. 인프라도 없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달랐다.
하지만 지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6개월 후, 한국에 소식이 들렸다.
"지안이 아프리카에서 병에 걸렸대."
"말라리아래."
"심하대. 병원에 입원했대."
아버지 요셉(71세)이 급히 아프리카로 향했다.
케냐 나이로비 병원.
지안은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버지..."
"지안아, 왜 이렇게 무리를 했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혼자서? 가족 지원도 없이?"
"가족들이 반대했잖아요."
요셉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지안아, 네 그 노트북... 할아버지 노트북 어디 있니?"
"호텔 금고에요. 왜요?"
"가져와야겠다. 네가 만약... 만약에..."
"아버지, 저 안 죽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요셉은 호텔로 가서 노트북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안은 병원에 남았다.
2주 후, 한국.
요셉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요셉 씨, 지안 씨가... 위독합니다. 빨리 오십시오."
요셉은 다시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도착하기 전에.
또 전화가 왔다.
"죄송합니다. 지안 씨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요셉의 세상이 무너졌다.
"뭐라고요?"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요셉은 주저앉았다.
"아들... 내 아들..."

장례식 준비.
지안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관과 함께.
그리고 그의 옷.
피가 묻어 있었다. 병원에서의 의료 처치 때문에.
요셉이 그 옷을 보았다.
할아버지 민준이 지안에게 준 특별한 재킷.
"AI Ethics"라고 수놓아진 재킷.
이제 피로 얼룩져 있었다.
요셉은 울었다.
"내 아들... 내 지안이..."
가족들이 모였다.
태민, 준호, 그리고 다른 형제들.
그들도 충격받았다.
"지안이가... 정말 죽었어?"
"믿을 수 없어."
태민이 요셉에게 다가갔다.
"삼촌, 조의를 표합니다."
"고맙다."
"지안이... 좋은 일을 하려다가..."
요셉이 조카를 똑바로 봤다.
"태민아, 너희가 지지했다면 이런 일 없었을 거야."
"예?"
"너희가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반대해서, 지안이 혼자 간 거야. 혼자서 50억을 쓰고, 혼자서 고생하고..."
태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삼촌, 그건..."
"너희가 내 아들을 죽인 거야!"
요셉이 소리쳤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준호가 변명했다.
"삼촌, 우리는 재단을 생각해서..."
"재단? 지안이 재단 그 자체였어! 할아버지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어!"
요셉은 피 묻은 재킷을 들어 올렸다.
"이걸 봐! 내 아들의 옷이야! 피로 물들었어!"
"사나운 세상이 내 아들을 잡아먹었어!"
"지안이가 찢겨 죽은 거야!"
요셉은 무너졌다.
장례식.
수천 명이 모였다.
지안이 가르쳤던 학생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Thank you, Jian"
"Your dream lives on"
추도사.
지안의 아내 소연이 읽었다.
"남편 지안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민준의 꿈을 이어받아, 기술이 모든 인류를 섬기게 하려는 꿈."
"그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가족의 반대에도, 혼자서도, 끝까지."
소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은 말했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이야. 누가 지지하든 안 하든.'"
"그리고 그 옳은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52세. 너무 젊은 나이에."
소연은 관을 바라봤다.
"여보, 당신 꿈은 죽지 않았어요. 계속될 거예요."
장례식 후, 아버지 요셉은 옷을 찢었다.
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아들딸들이 위로했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아버지, 그만 우세요."
하지만 요셉은 거부했다.
"아니다. 나는 슬퍼하며 죽을 것이다. 내 아들에게로 갈 것이다."
요셉은 지안을 생각하며 계속 울었다.
한 달, 두 달, 세 달...
그 무렵,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지안이 시작한 아프리카 프로젝트가 UN의 주목을 받았다는 것.
"혁신적인 AI 윤리 교육 모델"
"선우지안의 유산"
UN이 프로젝트를 공식 지원하기로 했다.
500억이 아니라 5000억 원 규모로.
그리고 다른 소식.
지안이 쓴 논문이 세계 최고 AI 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기술의 인간화: 민준에서 지안까지"
증조할아버지와 손자의 50년 여정을 담은 논문.
요셉은 그 소식들을 듣고 조용히 울었다.
"지안아, 네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네가 죽어서... 네 꿈이 살아나는구나."
그는 지안의 노트북을 열었다.
마지막 일기가 있었다.
"2116년 1월 30일, 케냐.
오늘 첫 강의를 했다.
50명의 아프리카 청년들에게.
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기술로 우리 마을을 바꿀 수 있어요?'
'그럼, 할 수 있어.'
할아버지, 이것이 할아버지 꿈이죠?
기술이 모든 사람을 섬기게 하는 것.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괜찮아요.
저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요.
혹시 제가 여기서 죽더라도
이 꿈은 계속될 거예요.
씨앗은 죽어야 열매를 맺으니까요.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요셉은 노트북을 덮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웃었다.
눈물 속에서.
"그래, 아들아. 네가 옳았어."
"네 꿈은 죽지 않았어."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어."


에필로그
1년 후.
'선우지안 AI 윤리 재단'이 설립되었다.
UN과 한국 정부, 그리고 선우 가문이 공동으로.
예산: 연 1000억 원.
목적: 개발도상국 AI 윤리 교육.
초대 이사장: 선우태민.
그는 취임사에서 말했다.
"저는 지안을 시기했습니다.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혼자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제 평생의 후회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의 꿈을 이어가겠습니다."
"지안이 뿌린 씨앗을 키우겠습니다."
태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지안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네 꿈을, 우리가 이어가마."
평창 새벽터에 새로운 돌이 세워졌다.
"씨앗의 죽음"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선우지안
2063-2116
그는 꿈을 꾸었다.
가족들이 반대했다.
혼자 싸웠다.
그리고 죽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씨앗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지안의 죽음이 그러했다.
그의 꿈은 이제
전 세계로 퍼져간다.
UN 프로젝트로,
수천 명의 학생으로,
수백 개의 학교로.
그를 반대했던 우리가
이제 그의 꿈을 이어간다.
부끄럽지만
감사하다.
씨앗이여, 안녕.
그리고 고맙다.
선우 가문
2117년"
그 돌은 오늘도
꿈꾸는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네 꿈이 반대받는다면
그것은 큰 꿈이기 때문이다.
혼자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두려워 말라.
씨앗은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