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약속

시상식

by 이 범

잊혀진 약속

2120년 봄, 제주 재단.
박민준 이사장은 재단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걸리는 것이 있었다.
선우지안의 억울함.
지안은 가족들의 반대를 받으며 혼자 아프리카로 갔다.
그리고 죽었다.
'지안이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박민준은 조용히 준비했다.
지안의 연구 논문들을 모았다.
지안이 남긴 강의 자료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민준의 노트북에 있는 자료들과 연결했다.
"지안의 전집을 출판하겠습니다."
이사회에 제안했다.
"전집이요?"
"네. 지안이 남긴 모든 글들을 한 권으로."
"의미 있는 일이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박민준이 서류를 꺼냈다.
"지안이 제안했다가 부결된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공식 재단 사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태민이 고개를 숙였다.
"그건... 우리가 반대했던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UN이 지원하고 있어요. 우리 재단이 공식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찬성합니다."
만장일치로 통과.
하지만 더 큰 일을 해야 했다.
박민준은 한 사람을 찾아갔다.
김재환(65세). 전 정부 AI 정책국장.
지안이 살아있을 때 친했던 사람.
지안의 프로젝트를 가장 먼저 지지했던 사람.
"김 전 국장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안이에 대한 추모 사업을 정부 차원에서 진행해 주십시오."
"추모 사업이요?"
"네. 선우지안 AI 윤리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매년 전 세계 최고의 AI 윤리 활동가에게 수여하는."
김재환이 눈을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있습니다. 정부 추천으로 이 상을 국제적으로 알려주십시오."
"하겠습니다."


2120년 6월.
첫 번째 '선우지안 AI 윤리상' 시상식.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전 세계 50개국에서 대표들이 왔다.
아프리카에서도.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의 대표들.
지안이 직접 가르쳤던 사람들.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박민준이 개회사를 했다.
"선우지안은 꿈을 꿨습니다."
"가족들이 반대했습니다."
"혼자 싸웠습니다."
"그리고 꿈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 증거입니다."
박수가 터졌다.
시상식 후 만찬.
김재환이 박민준에게 다가왔다.
"이사장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
"아닙니다. 정부 채널로 알려주신 덕분에 50개국이 왔습니다."
"사실... 저도 지안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왜요?"
김재환이 잠시 망설였다.
"3년 전, 지안이가 저를 찾아왔었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프리카 프로젝트 예산을 구하러 왔었어요. 정부 지원을 요청했죠."
"그래서요?"
"저는... 거절했어요."
"예?"
"당시 예산 사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은 선우 가문의 반대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끼어들기 싫었던 거예요."
김재환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지했더라면... 지안이 혼자 가지 않았을 텐데."
박민준은 조용히 들었다.
"그래서 이번 사업에 적극 참여한 거예요. 뒤늦게나마 제 빚을 갚으려고."
박민준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아닙니다. 용기 있는 고백이에요."
만찬이 끝난 후.
박민준은 소연에게 말했다.
"소연 씨, 오늘 김 전 국장이 고백한 이야기 들었어요?"
"들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소연이 잠시 생각했다.
"지안이를 기억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무슨 말이에요?"
"지안이를 도울 수 있었는데 안 한 사람들."
"김 전 국장처럼?"
"네. 그리고 우리 가족들도요. 저도요."
소연의 눈이 흔들렸다.
"저도 더 강하게 지안 편을 들었어야 했어요. 가족들에게."
"소연 씨는 충분히 했어요."
"아니에요. 더 할 수 있었는데."
두 사람은 침묵했다.


2120년 12월.
이사회 연말 모임.
태민이 발표했다.
"올해 선우지안 AI 윤리상은 큰 성공이었습니다."
"내년에는 더 크게 할 계획입니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미국 MIT에서 '선우지안 장학금'을 설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MIT가요?"
"네. 지안이 MIT 출신이잖아요. 그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겠다고."
박수.
"그리고 케냐 정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케냐요?"
"지안이 처음 강의한 나이로비에 '선우지안 AI 윤리 학교'를 설립하겠답니다."
더 큰 박수.
태민이 목이 메었다.
"우리가... 우리가 그를 막았는데."
"..."
"그런데 그가 이렇게 큰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사회가 조용해졌다.
"미안하다, 지안아."
태민이 중얼거렸다.
박민준은 그날 밤 일기를 썼다.
"오늘 이사회에서 놀라운 소식들을 들었다.
MIT 장학금. 케냐 학교.
지안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지안이 살아있었다면?
더 큰 열매가 있었을 것이다.
그를 기억하지 못한 사람들.
그를 도울 수 있었는데 안 한 사람들.
김재환 전 국장처럼.
가족들처럼.
심지어 나처럼.
나도 지안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논문을 읽었다.
하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도울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지안을 잊었다.
아니, 무시했다.
그 결과 지안은 혼자 싸웠고
혼자 죽었다.
하느님,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하소서.
살아있는 지안들을 알아보게 하소서.
죽은 후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지지하게 하소서.
아멘."


2121년 봄.
박민준은 중요한 발표를 했다.
"'살아있는 지안들을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지안이 죽은 후에야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의 꿈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는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박민준이 화면을 켰다.
"전 세계에서 홀로 AI 윤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찾겠습니다."
"가족의 반대를 받는 사람들."
"정부의 지원을 못 받는 사람들."
"혼자 꿈을 꾸는 사람들."
"그들을 발굴하고, 지지하고, 함께 싸우겠습니다."
"살아있을 때."
이사회가 감동받았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지안 네트워크'입니다. '살아있는 지안들의 네트워크'."
만장일치 찬성.
태민이 박민준에게 다가왔다.
"이사장님, 제가 하나 고백할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지안이가 살아있을 때, 저는 그를 시기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를 혼자 싸우게 만들었고, 죽게 했습니다."
태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가장 지안을 기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형제를 잊은 사람입니다."
박민준이 태민의 어깨를 잡았다.
"태민 이사님, 지금 기억하고 있잖아요."
"늦었죠."
"늦지 않았습니다. 지안 네트워크가 시작됐으니까요."
"지금 살아있는 지안들을 기억하는 거잖아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지안 네트워크 첫 번째 후원자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 자산으로 100억 원을 내놓겠습니다."
"..."
"지안이한테 빚진 것이니까요."
그날 저녁.
박민준과 소연이 제주 바닷가를 걸었다.
"여보, 오늘 태민 씨가 100억 내놓았어요."
"들었어요."
"어떤 것 같아요?"
소연이 잠시 생각했다.
"지안이가 살아있을 때 받았다면 더 좋았겠죠."
"그렇죠."
"하지만..."
소연이 미소 지었다.
"늦게라도 기억한 것은 기억하지 않는 것보다 나아요."
"그 사람이 헌작 시종장처럼."
"헌작 시종장?"
"성경에 나오는 사람이에요. 요셉이 꿈을 풀이해 줬는데, 복직 후에 요셉을 잊어버렸죠."
"아, 그 이야기."
"2년 후에야 기억했지만, 그래도 기억했잖아요."
박민준이 소연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의 앞에 설 수 있었고."
"맞아요. 늦은 기억이 구원이 됐죠."
두 사람은 걸었다.
어두운 바다가 달빛에 빛났다.
"지안의 꿈도 그렇게 될 거예요."
소연이 말했다.
"늦게 기억한 사람들이 모여 더 큰 구원을 만들 거예요."
"그 구원이 우리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거예요."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안의 진짜 유산이겠죠."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
별이 쏟아졌다.
지안을 닮은 별들이.
—끝—
에필로그
5년 후.
'지안 네트워크'는 전 세계 120개국에서 활동하는 단체가 되었다.
발굴한 '살아있는 지안들': 3000명.
그들에게 제공한 지원: 연 500억 원.
그중 많은 사람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수상 소감에서 그가 말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안 네트워크가 저를 발견했습니다."
"선우지안처럼 저도 잊힐 뻔했지만, 기억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우지안. 감사합니다, 지안 네트워크."
평창 새벽터에 새 돌이 세워졌다.
"기억의 돌"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잊지 말라
2120-2121
우리는 지안을 잊었다.
살아있을 때.
그래서 그는 혼자 싸웠고
혼자 죽었다.
하지만 늦게라도 기억했다.
그 기억이 3000명의 지안들을 살렸다.
당신 곁에
혼자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기억하라.
지금.
죽은 후에 기억하는 것보다
살아있을 때 기억하는 것이 낫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기억하라.
지금.
지안 네트워크
창립 선언문 중에서"
그 돌은 오늘도
바쁜 일상을 사는 모든 이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 곁의 지안을
기억하라.
지금."

keyword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