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 핀 예술
마지막 겨울 골목
"엄마, 아빠."
2월의 어느 저녁, 서연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학 입학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응?"
"내가 첫 아카이빙 해도 돼?"
민수와 지혜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첫 아카이빙?"
"응. 대학 가기 전에 내 이름으로 골목 하나 기록하고 싶어. 엄마 아빠처럼."
민수는 딸을 보며 미소 지었다. 3년 전 을지로에서 시작된 골목 여행이 이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청주. 대성로 122번길."
"거기는 어떤 곳인데?"
"친구가 추천해줬어. 옛날 도심에 예술가들이 모여서 만든 골목이래. 벽화도 있고, 작은 갤러리들도 있고."
"염리동이랑 비슷한가?"
"비슷한데 더 작고 조용하대. 그래서 좋을 것 같아."
지혜가 서연이의 손을 잡았다.
"좋아. 네가 기록하고 싶은 곳이면 가자."
"정말? 근데 이번엔 내가 주도해도 돼?"
"당연하지. 네 첫 아카이빙이니까."
준우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나도 갈 거야?"
"당연하지. 가족이잖아."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청주로 향했다. KTX로 한 시간 거리였다.
"청주는 처음이야."
"나도. 충청도 자체가 거의 처음."
청주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대성로 122번길로 가주세요."
"아, 그 예술 골목?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가더라고요."
15분쯤 가니 조용한 주택가가 나왔다. 오래된 동네였다. 낮은 건물들, 좁은 골목.
"여기 맞아?"
"응. 지도상으론 여기가 맞는데."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평범한 동네처럼 보였다.
"저기 표지판 있어."
'대성로 122번길 예술마을'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골목 입구에 있었다.
"여기부터가 골목이네."
서연이가 노트와 카메라를 꺼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시작할까?"
골목을 걷는 새로운 눈
골목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낡은 담벼락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추상화, 인물화, 풍경화.
"예쁘다!"
서연이가 먼저 달려갔다. 한 벽화 앞에 서서 자세히 봤다.
"이 벽화 좀 봐. 청주 풍경이래."
청주의 옛 모습을 그린 벽화였다. 1960년대로 보이는 시장 풍경, 사람들, 건물들.
서연이는 노트에 뭔가 적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벽화. 청주 옛 모습. 따뜻한 색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느낌."
민수가 옆에서 봤다. 딸이 진지하게 기록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사진도 찍어야지."
서연이는 여러 각도에서 벽화 사진을 찍었다. 전체 샷, 디테일 샷, 주변 환경까지 포함한 샷.
"엄마, 아빠는 이렇게 했어?"
"응. 근데 네가 더 체계적인데?"
"사진 동아리에서 배운 거야."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벽화들을 하나씩 감상했다. 10m마다 다른 벽화가 있었다.
추상적인 패턴의 벽화, 새를 그린 벽화, 시를 적어놓은 벽화.
"여기는 염리동이랑 느낌이 다르네."
지혜가 말했다.
"뭐가?"
"염리동은 뭔가 거칠었잖아. 근데 여기는 세련됐어. 더 계획적인 느낌?"
"그러네. 좀 더 의도된 예술 같아."
서연이가 기록했다.
"염리동과의 차이점: 더 계획적이고 정제된 느낌. 자발적 예술보다는 기획된 예술 마을?"
골목 중간쯤에 작은 갤러리를 발견했다. '대성 갤러리'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들어가보자."
갤러리는 작았지만 아담했다. 지역 작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젊은 여성이 맞아줬다. 갤러리 운영자인 듯했다.
"구경해도 돼요?"
"물론이에요. 천천히 보세요."
그림들을 둘러봤다. 대부분 청주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었다. 청주 풍경, 청주 사람들, 청주의 시간.
서연이가 한 그림 앞에 오래 섰다. 골목을 그린 그림이었다. 아마도 이 골목.
"이 그림 좋아."
"왜?"
"현실인데 현실 같지 않아. 뭔가 꿈같아."
민수가 그림을 자세히 봤다. 딸의 말이 맞았다.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색감이 몽환적이었다.
서연이가 갤러리 주인에게 물었다.
"이 골목이 언제부터 예술 마을이 됐어요?"
"한 7년 전부터요. 원래는 그냥 낡은 주택가였는데, 청주시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하면서 예술가들을 초청했어요."
"성공한 건가요?"
"글쎄요. 성공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네는 살아났어요. 사람들이 오고, 예술가들이 정착하고."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고, 불편해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서연이가 열심히 노트에 적었다.
갤러리를 나와 계속 걸었다. 작은 카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골목카페'."
들어가니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카페였다. 한옥 구조를 살려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메리카노 두 잔, 오렌지주스, 핫초코요."
마당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작은 마당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분위기 좋다."
서연이는 카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찍었다. 천장, 창문, 마당, 작은 소품들까지.
"엄마, 아빠는 이런 거까지 기록했어?"
"응. 골목의 일부니까."
"디테일이 중요하구나."
커피를 마시며 서연이가 지금까지의 기록을 정리했다.
"벽화 15개, 갤러리 1개, 카페 1개. 그리고 갤러리 주인 인터뷰."
"잘하고 있어."
"근데 뭔가 부족한 것 같아."
"뭐가?"
"사람 이야기. 벽화랑 건물만 봤지, 정작 여기 사는 사람들 이야기는 못 들었어."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중요해. 공간보다 사람."
"어떻게 찾지?"
"걸으면 만나게 돼."
골목이 품은 사람들
카페를 나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더 깊숙한 골목으로.
한 집 대문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화분에 물을 주고 계셨다.
서연이가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와. 구경 왔니?"
"네. 여기 골목 기록하고 있어요."
"기록?"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듣고. 그래서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할머니는 흔쾌히 대문을 열어주셨다.
"앉아라. 물어봐."
서연이가 노트를 펼쳤다. 손이 조금 떨렸다. 첫 인터뷰였다.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40년 살았지. 시집와서 쭉."
"예술 마을 생기기 전이네요."
"그럼. 그때는 그냥 동네였어. 조용하고."
"지금은 어떠세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좋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해. 사람들 오는 건 좋은데, 너무 시끄러울 때도 있어. 주말엔 특히."
"벽화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쁘지. 우리 집 담벼락에도 그려줬는데, 좋아."
"불편하진 않으세요?"
"아니. 차라리 나아. 낡은 벽보다 예쁜 그림이 나으니까."
서연이가 열심히 받아 적었다.
"혹시 이 동네가 어떻게 변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골목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지금처럼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게 좋아. 너무 유명해지면 힘들 것 같아. 익선동처럼."
"익선동 아세요?"
"TV에서 봤어. 사람 천지더라. 우리 동네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인터뷰를 마치고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천천히 보고 가. 우리 동네 예쁘게 기록해줘."
"네!"
할머니와 헤어지고 서연이가 흥분해서 말했다.
"엄마, 아빠! 내 첫 인터뷰야!"
"잘했어. 질문도 좋았고."
"떨렸는데, 할머니가 친절하셔서 괜찮았어."
계속 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카페 주인, 갤러리 작가, 여기서 작업실을 운영하는 도예가.
서연이는 각각 짧은 인터뷰를 했다. 처음엔 떨렸지만,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묻는 것도 기술이구나."
"그래.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답을 들어."
해가 기울 무렵, 골목 끝에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대성로 아카이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아카이브?"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전시 공간이었다. 벽에는 이 골목의 옛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여기 봐. 2015년 사진이래."
예술 마을이 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낡은 담벼락, 빈 건물들, 조용한 골목.
"완전 달라졌네."
옆에는 2025년 사진이 걸려 있었다. 벽화가 그려지고, 카페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걷는 모습.
"10년 만에 이렇게 바뀐 거야."
한쪽에는 주민들의 증언이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처음엔 반대했어요. 우리 동네에 낯선 사람들이 오는 게 싫었거든요. 근데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더라고요."
"예술가들이 와서 동네가 활기차졌어요. 빈 집도 줄어들고."
"아직도 적응 중이에요. 좋은 점도 있고 힘든 점도 있고."
서연이는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복잡한 문제구나. 좋다, 나쁘다로 나눌 수 없는.
아카이브를 나오며 민수가 물었다.
"어때? 첫 아카이빙."
"어려워."
"뭐가?"
"판단하는 게. 이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거야. 판단은 나중에 해도 돼. 일단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거지."
"그럼 내 생각은?"
"그것도 기록해. 너의 시각도 중요하니까."
세대가 이어지는 순간
저녁이 되어 청주 시내로 나갔다. 육거리 시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청주 순대 유명하대."
"먹어보자."
순대국밥을 먹으며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서연아, 오늘 어땠어?"
"힘들었어. 근데 재미있었어."
"뭐가 제일 어려웠어?"
"사람 만나는 거. 처음엔 말 걸기가 무서웠어."
"근데 했잖아."
"응. 하고 나니까 괜찮았어. 사람들이 다 친절하시더라."
"그게 아카이빙의 매력이야. 사람 만나는 거."
"엄마, 아빠는 3년 동안 이렇게 한 거야?"
"응."
"대단하다. 정말."
지혜가 딸의 손을 잡았다.
"넌 더 잘할 거야. 우리보다."
"왜?"
"젊으니까. 새로운 시각이 있으니까."
숙소로 돌아가 서연이는 오늘의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분류하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엄마, 아빠. 이거 봐줄래?"
서연이가 쓴 첫 아카이빙 글이었다.
제목은 '청주 대성로 122번길, 골목에 핀 예술'.
"청주 대성로 122번길은 변화 중이다. 10년 전 낡은 주택가에서 지금의 예술 마을로. 그 변화는 좋을까, 나쁠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좋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해.' 그게 정답인 것 같다. 변화에는 항상 양면이 있다."
"벽화는 아름답다. 카페는 아늑하다. 갤러리는 의미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불편해진 주민들도 있고, 오르는 임대료도 있다."
"이것이 도시재생의 딜레마다. 살리기 위해 바꾸지만, 바꾸는 과정에서 원래의 것이 사라진다."
"하지만 적어도 청주 대성로는 균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너무 상업화되지 않으려 하고,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완벽하지 않지만, 시도는 하고 있다."
"이것이 내 첫 아카이빙이다. 부모님처럼 완벽하지 않다.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시작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골목을 기록할 것이다. 우리 세대의 눈으로."
민수는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 딸이 이렇게 자랐구나.
"서연아."
"응?"
"잘 썼어. 정말."
"진짜?"
"응. 네 시각이 있어. 그게 중요해."
지혜도 딸을 안아줬다.
"자랑스러워. 네가."
다음 날 아침, 서연이는 혼자 대성로를 다시 찾았다.
"혼자 갈 거야?"
"응.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
"조심해서 다녀와."
서연이는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어제와는 다른 시간, 다른 빛.
아침의 골목은 조용했다. 주민들이 집 앞을 쓸고, 카페 주인들이 문을 열고, 작가들이 작업실로 들어가는 모습.
서연이는 그 일상의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았다.
어제 만났던 할머니 집 앞을 지나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 또 왔니?"
"네. 아침 풍경 보러요."
"그래. 아침이 제일 예쁘지."
할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 이 골목이 앞으로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골목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냥 이대로. 너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이 딱 좋아."
"네. 저도 그래요."
골목을 한 바퀴 돌고 가족이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어땠어?"
"좋았어. 아침 풍경 다 담았어."
"그럼 이제 서울 갈까?"
"응."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서연이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시작이구나. 나의 아카이빙.'
집에 도착한 후, 서연이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민수의 블로그가 아니라 자신의 블로그에.
제목은 같았다. '청주 대성로 122번길, 골목에 핀 예술'.
하지만 마지막에 한 문장을 추가했다.
"이것은 민서연의 첫 골목 아카이빙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 그 안의 시간들』 저자의 딸분이시군요! 기대됩니다."
"새로운 세대의 시각이 신선해요."
"계속 써주세요. 팔로우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댓글 하나.
"저는 청주 대성로에서 카페를 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만나 뵀죠. 젊은 친구가 이렇게 진지하게 기록해줘서 고마워요. 우리 골목을 부탁해요."
서연이는 댓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 책임감이 느껴졌다.
'잘해야지. 제대로 기록해야지.'
민수는 딸의 블로그를 보며 지혜에게 말했다.
"우리 역할은 끝난 것 같아."
"아니야. 이제 시작이야."
"뭐가?"
"세대 간 아카이빙. 우리는 우리 세대 골목을 기록하고, 서연이는 그녀 세대 골목을 기록하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네."
"응. 골목처럼."
한 달 후, 서연이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도시인류학과 골목아카이빙 동아리'를 만들었다.
첫 모임에 20명이 모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회장 민서연입니다. 우리 동아리는 골목을 기록합니다. 사라지기 전에, 변하기 전에."
첫 프로젝트는 대학교 뒷골목이었다. 학생들이 자주 가는 허름한 식당들, 오래된 카페들.
"20년 후면 다 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기록해야 해요."
서연이의 동아리는 한 학기 동안 대학 주변 골목 30곳을 기록했다.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 민수와 지혜도 참석했다.
"우리 딸 대단하다."
"그러게. 벌써 동아리까지 만들어서."
전시를 보며 민수는 깨달았다. 자신들의 아카이빙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것을.
서연이 세대가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도.
골목은 계속 변한다. 사라지고, 생기고, 바뀐다.
하지만 기록은 남는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청주 대성로 122번길은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벽화를 품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그리고 한 젊은 아카이버의 첫 발걸음을 기억하며.
민서연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부모가 걸었던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걷는 것.
골목 아카이빙은 계속된다. 세대를 넘어, 시간을 넘어.
청주 대성로처럼, 예술처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