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남자(2)

비서의 등장

by seungbum lee


전화가 온 것은 한성타워를 나선 지 꼭 두 시간이 지난 오후였다.
강민준이 편집국으로 돌아와 노트를 펼쳐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던 참이었다. 낯선 번호였다. 수신 표시 아래 지역번호 없이 열한 자리 숫자만 떠 있었다. 그는 잠시 바라보다가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조용하고 낮았다. 주변 소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밀폐된 공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저는……."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망설임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한성그룹에서 한재원 부회장님 비서실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지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강민준은 펜을 내려놓았다.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네. 근데……." 또 침묵. 이번엔 더 길었다. "조용한 데서요. 사람이 많지 않은."
"제가 장소를 정해도 될까요?"
"네."
"마포구 합정동에 '북카페 이스트'라는 곳 있습니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어떠세요?"
다시 침묵. 그는 그 침묵이 확인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장소가 안전한지, 혹시 자신이 그곳을 알고 있는지 계산하는 시간.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미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성타워를 나선 지 두 시간 만에 내부 인물이 접촉해왔다. 우연이 아니다. 이 여자는 강민준이 한성타워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연락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이 사건은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북카페 이스트는 합정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간이었다.
이층짜리 건물. 일층은 카운터와 테이블 네 개. 이층은 책장으로 둘러싸인 독립 좌석들. 강민준이 자주 오는 곳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고, 어둑하고, 각 좌석마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서 대화가 새어나갈 걱정이 없었다.
그는 이십 분 일찍 도착해 이층 가장 구석 자리를 잡았다. 출입구와 계단이 모두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인터뷰 상대보다 먼저 도착해서 공간을 장악하는 것.
일곱 시 정각, 여자가 올라왔다.
강민준은 그녀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읽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고 화장기가 거의 없었다. 짙은 회색 코트. 어깨에 걸친 가방은 안쪽으로 단단히 껴안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안정적이었지만 눈이 불안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두 번, 이층 전체를 훑는 시선을 보냈다. 강민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가 다가오면서 한 번 더 옆자리를 확인했다.
'공간을 점검하고 있다. 훈련된 행동이 아니라 공포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
"강민준 기자님."
"네. 앉으시죠."
그녀가 앉았다. 코트를 벗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방어.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잠깐 망설임.
"서윤아입니다."
"서윤아 씨, 오늘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서윤아는 강민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신뢰하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아직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 그 두 가지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부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저한테 뭔가를 주셨어요."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서윤아는 말을 꺼내면서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지퍼를 열었지만 바로 안에 손을 넣지는 않았다. 마치 일단 말로 먼저 꺼내놓고 싶은 사람처럼.
"USB 드라이브였어요. 검정색에 아무 표시 없는. 부회장님이 직접 건네시면서 이러셨어요. '이게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해. 근데 아직은 아니야.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전달해.'"
강민준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그녀를 읽었다.
진실이다.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을 하는 서윤아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고, 눈은 강민준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의 눈은 보통 약간 위를 향하거나 시선이 흐릿해진다. 그녀의 눈은 뚜렷했다. 이 장면을 수백 번 머릿속에서 재생한 사람의 눈이었다.
"신호를 주겠다고 하셨는데, 신호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건가요?"
"네."
"그럼 지금 이걸 저한테 가져오신 이유는요?"
서윤아가 처음으로 시선을 내렸다.
"부회장님이 돌아가신 날 아침에, 저한테 문자가 왔어요."
강민준의 등줄기에 무언가가 지나갔다.
"부회장님한테서요?"
"네. 근데……."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경찰은 부회장님이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에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근데 제 문자는 새벽 세 시 열일곱 분에 왔거든요."
"내용이 뭐였습니까?"
서윤아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발신: 한재원 부회장님 / 수신 03:17]
"윤아야. 미안해. 강민준이라는 기자 찾아가."
강민준은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죽은 사람이 보낸 문자. 혹은, 죽기 직전에 보낸 마지막 문자. 어느 쪽이든 그 세 문장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이름을 부른 것. 그리고 강민준을 지목한 것.
"부회장님이 저를 알고 계셨군요."
"저도 그게 이상했어요. 부회장님이 어떻게 기자님 이름을 아셨는지."
강민준은 고개를 들어 서윤아를 보았다.
"USB 가져오셨습니까?"
서윤아는 잠시 멈추었다가, 천천히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작은 검정 USB 드라이브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강민준은 그것을 바로 집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한재원 부회장은 죽기 사흘 전, 이것을 비서에게 맡겼다. 그리고 죽는 순간이 왔을 때, 마지막 힘으로 문자를 보내 이 USB가 강민준에게 가도록 했다. 그 말은 한재원이 강민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탐사보도 기자들 중에서 강민준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왜 자신인가.
그 질문의 답은 아직 없었다.
"이 USB, 열어 보셨습니까?"
"……아니요."
거짓말이다.
강민준은 즉각적으로 읽었다. "아니요"라는 말이 끝나는 순간 서윤아의 턱이 아주 조금 당겨졌고, 시선이 USB를 향했다가 빠르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그 거짓말을 지금 당장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그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다른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그가 USB를 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서윤아의 어깨가 그 순간 미세하게 낮아졌다. 짐을 내려놓은 사람의 몸짓.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안도가 아니라는 것도 강민준은 알았다.
아직 그녀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부회장님 비서실에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3년 됐어요."
"부회장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윤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부드러워졌다. 이건 진짜 감정이었다. 공포도 연기도 아닌, 사람을 그리워하는 감정.
"좋은 분이셨어요. 많이 바쁘시고 엄격하셨지만…… 저한테는 늘 공정하셨고, 제가 힘들 때 알아봐 주시는 분이었어요."
"언제부터 부회장님이 달라지셨나요? 최근에 뭔가 변화가 있으셨나요?"
"두 달 전쯤이에요. 갑자기 야근이 많아지시고, 혼자 계실 때 통화를 많이 하셨어요. 비서실 직원들 모르게요. 그리고……."
서윤아가 멈췄다. 강민준은 기다렸다.
"한 달 전쯤에, 부회장님 얼굴에 멍이 있었어요. 물어보니까 운동하다 다쳤다고 하셨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셨군요."
"부회장님이 운동을 안 하세요. 건강검진 때마다 의사 선생님한테 운동 좀 하시라는 말 들으시는 분인데."
강민준은 그 말을 메모지에 적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시선은 서윤아의 손 위에 있었다.
오른손 손목. 긴 코트 소매 아래로 간신히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가 커피잔을 들어올릴 때 소매가 조금 밀려났다. 그 순간 강민준의 눈에 보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멍 자국. 손가락 형태로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 붙잡혔던 흔적.
'이 사람도 다쳤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서윤아 씨, 혹시 지금 회사에 계속 다니고 계세요?"
"아니요. 부회장님 돌아가시고 나서 비서실이 해체됐어요. 이주 전에 사직서를 냈어요."
"자의로요?"
잠깐의 침묵.
"……그렇게 됐어요."
'아니다. 자의가 아니다.'
강민준은 더 깊이 파고들기로 했다.
"서윤아 씨."
"네."
"솔직하게 여쭤볼게요. 지금 누군가한테 협박을 받고 계십니까?"
서윤아의 눈이 크게 떴다. 그것 자체가 답이었다. 부정하려는 말이 입으로 올라왔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그녀의 눈에서 이미 부정의 의지가 무너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손목을 보셔서요."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목을 코트 소매 안으로 당겼다.
"언제부터입니까?"
서윤아는 오랫동안 커피잔만 내려다보았다. 강민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침묵은 약자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부회장님 돌아가시고 사흘째 되는 날이에요. 퇴근길에 누군가가 제 차를 막았어요. 남자 두 명이었고, 얼굴을 가렸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손목을 잡으면서 봉투 하나를 줬어요."
"봉투 안에?"
"USB를 돌려달라는 메모였어요. 그리고 현금 오백만 원."
"돌려주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USB가 없다고 했어요. 부회장님께 받은 적 없다고."
"그들이 믿었나요?"
서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후로 매일 집 앞에 차 한 대가 서 있어요. 회색 SUV.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기만 해요. 근데 그게 더 무서워요."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 협박에서 감시로. 그들은 서윤아가 USB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면 알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직 실력 행사를 자제하고 있다는 것은, 서윤아를 해치는 것보다 USB를 회수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달성된 뒤에는.
강민준은 그 생각을 마음속에서 멈췄다.
"서윤아 씨, 지금 가족이랑 사세요?"
"혼자 살아요.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저 말고 또 있습니까?"
"없어요."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USB, 열어보신 거 알고 있습니다. 뭘 보셨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서윤아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놀람과 체념이 동시에 있었다.
"……어떻게 사람 마음을 그렇게 읽으세요?"
"직업병입니다."


서윤아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의 소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워주었다. 먼 테이블에서 대학생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 테이블에서 나누고 있는 이야기와 너무 다른 세계의 소리 같아서.

서윤아가 입을 열었다.

"USB를 부회장님한테 받고 나서, 참으려고 했어요. 일주일은 참았어요. 근데……."

그녀가 손을 꽉 쥐었다.

"부회장님이 돌아가신 날 밤에, 혼자 열어봤어요."

"어떤 파일이 있었습니까?"

"두 종류였어요. 하나는 엑셀 파일들이었고, 하나는 동영상이었어요."

"엑셀 파일의 내용은요?"

서윤아의 눈이 흔들렸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눈이었다. 혹은, 알고는 있는데 그것을 입 밖에 냈을 때의 결과가 두려운 사람의 눈.

"계좌 내역이에요. 회사 이름이 없는 계좌들. 금액이……."

그녀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강민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수백억이에요. 이십 개가 넘는 계좌에, 수년에 걸쳐 분산돼 있는 자금들. 출처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거기 적힌 이름 중에 한성그룹 계열사 이름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가 잠시 멈췄다.

강민준은 기다렸다.

"정부 기관이에요. 구체적으로는 말 못 하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강민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정렬되기 시작했다.

한성그룹과 정부 기관이 연결된 비자금 계좌. 그것을 한재원 부회장이 USB에 담아서 비서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부회장은 갑작스럽게 죽었다.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한 달 전에 멍이 있었고, 야근과 비밀 통화가 이어졌고, 최근 건강검진에서는 정상 판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동영상은요?"

서윤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그녀가 눈을 감았다 떴다. "두 사람이 나와요. 식당처럼 보이는 공간에서, 대화를 하고 있어요. 화질이 좋지 않아서 얼굴이 선명하지 않은데, 목소리는 들려요."

"무슨 내용입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요. '재원이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우리 편에 서든지, 아니면 처리되든지.'"

그 말이 테이블 위에 놓인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처리된다.

기업의 언어로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강민준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재원 부회장은 실제로 '처리'되었다. 새벽에, 혼자, 자택에서.

"두 사람 중 한 명이 누군지 알겠습니까?"

"목소리만 들었는데……." 서윤아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재도 회장님 목소리예요. 확실해요. 3년 동안 들어온 목소리거든요."

한재도 회장.

한성그룹의 총수. 한재원 부회장의 형.

형이 동생을 '처리'했다.

강민준은 그 가능성을 두뇌 한쪽에 박아 넣으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동영상 한 편, 화질이 좋지 않은. 목소리 한 사람의 증언. 법정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사로도 쓸 수 없다.

하지만 실마리로는 충분하다.

"서윤아 씨, 혹시 이 USB를 복사해두셨습니까?"

서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분석해보겠습니다. 그동안 서윤아 씨는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주세요. 집 앞의 차를 의식하지 마시고, 핸드폰 통화는 가능하면 줄이시고."

"언제까지요?"

강민준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나 걸릴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근데 반드시 끝낼게요."

서윤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은 마지막으로 하나를 읽었다.

믿고 싶다. 제발 믿고 싶다.


카페를 나선 것은 밤 여덟 시 반이었다.
서윤아가 먼저 나갔다. 강민준은 오 분을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습관이었다. 같이 나가면 연결고리가 보이기 때문에.
합정 골목을 걸어 큰 길로 나오면서, 강민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가게 쇼윈도의 유리에 눈을 흘렸다. 반사된 뒤쪽 거리 풍경.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어떤 이는 걸음이 빠르고, 어떤 이는 느렸다.
그 중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정 패딩에 회색 모자. 강민준이 카페에서 나오기 전, 골목 입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강민준과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걷고 있었다. 핸드폰을 보는 척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았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미행이다.'
강민준은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합정역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이어갔다. 사람이 많아지는 방향으로. 미행을 뿌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섰다. 유리 냉장고 문에 비친 편의점 출입구가 보였다. 검정 패딩 남자가 출입구 앞에 멈추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어오지 않고 옆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전문가는 아니다. 아마추어거나, 아니면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거나.'
음료 하나를 집어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검정 패딩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민준은 택시를 잡아탔다.
"강남구 삼성동이요."
기사가 미터기를 눌렀다. 차가 출발했다. 강민준은 뒷좌석에 기대어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USB 안에는 비자금 계좌와 동영상이 있다. 동영상에는 한재도 회장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한재원 부회장은 그것을 증거로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USB를 회수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강민준이 지금 그 USB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짚었다. USB의 딱딱한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이것을 어디에 먼저 가져가야 할까. 편집국의 보안 컴퓨터. 아니면 자신이 믿는 IT 전문가. 그것보다 먼저, 이 USB가 진짜인지 조작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한재원 부회장이 직접 만든 파일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강민준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함정인지.
택시가 한강 다리를 건넜다. 강민준은 창밖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한재원은 왜 나를 선택했는가.
그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한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할 기자가 필요했다면, 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기자들이 있었다. 경제부 전문기자, 대형 방송사 PD, 수십만 팔로워를 가진 언론인들. 그런데 왜 강민준이었는가.
혹시 한재원은 강민준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독심술.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강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 비약이다. 아직 단서가 부족하다.
택시가 삼성동에 진입했다. 강민준의 시선이 창밖의 한성타워를 지나쳤다. 한밤중에도 그 건물의 고층부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몇 개의 창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저 건물 안 어딘가에 앉아, 누군가가 지금 강민준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신인 H.
그 알파벳이 누구의 이름 앞 글자인지, 강민준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감은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언제나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확인하는 말을 했다. 강민준은 목적지를 바꾸었다.
"아, 죄송한데요, 마포 공덕동으로 가주세요."
편집국이었다. USB는 오늘 밤 안에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누가 자신을 미행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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