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남자 (3)

심야 편집국

by seungbum lee

밤 열 시가 넘은 편집국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전화기 소리와 키보드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늘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사회부 야간 당직 기자 두 명과 포토그래퍼 한 명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고, 강민준이 탐사보도팀 쪽 자리에 앉아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강민준은 자신의 자리에 앉기 전, 편집국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 이 공간 안에 누가 있고, 누가 없는지.
야간 당직자 셋. 전부 아는 얼굴. 이상 없다.
그는 자리에 앉아 개인 노트북이 아닌 편집국 내 보안 서버에 연결된 전용 데스크톱을 켰다. 이 컴퓨터는 외부 네트워크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독립 망이었다.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하고, USB 삽입 기록이 로그로 남지 않도록 탐사보도팀이 별도로 설정해둔 기계였다. 한마디로, 민감한 자료를 다룰 때 쓰는 컴퓨터.
강민준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보았다. 작고 가벼운 물체. 하지만 한 사람이 이것을 남기고 죽었다. 그 무게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USB를 컴퓨터에 꽂았다.
드라이브 인식음이 낮게 울렸다. 화면에 파일 목록이 떴다.
폴더 두 개. 파일 이름은 없었다. 그저 숫자였다. 001과 002.
001 폴더 안에는 엑셀 파일 열한 개. 002 폴더 안에는 동영상 파일 하나.
강민준은 001 폴더를 먼저 열었다.


첫 번째 엑셀 파일을 열었을 때, 강민준은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파일 안에는 스프레드시트가 가득했다. 날짜, 계좌번호, 금액, 그리고 비고란. 한글과 영문이 섞인 항목들. 비고란에는 회사명과 이니셜, 암호처럼 보이는 두세 글자짜리 코드들이 적혀 있었다.
강민준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숫자들이 지나갔다. 일천만 원, 삼천만 원, 일억, 이억. 단위가 올라갔다. 오억, 십억, 이십억. 그것들이 수십 개의 계좌에 분산되어 있었고, 날짜는 4년 전부터 시작되어 불과 석 달 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비고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코드가 있었다. HS-R, HS-D, 그리고 GV-3.
강민준은 멈췄다.
HS는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한성(HanSung)의 약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HS-R과 HS-D는 한성그룹 내 두 개의 계열사나 계정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GV-3은 달랐다. GV. Government의 약자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이번엔 계좌가 아니라 텍스트 문서였다. 한재원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 형식의 문서. 날짜가 한 달 전이었다.
"2024년 10월 초부터 HS자산운용의 별도 계정에서 GV-3으로의 자금 이동이 확인됨. 총 누적 이동액 약 780억 원. GV-3의 실체는 기획재정부 산하 특정 외청의 비공식 예산 계정으로 추정. 해당 청 고위직 A와 한재도 회장 간의 직접 연결 확인 필요. 이 거래의 목적은 대형 국책사업 수주를 위한 사전 로비자금으로 의심됨."
강민준은 그 문서를 두 번 읽었다.
780억.
그리고 기획재정부 산하 외청.
이 나라의 국책사업 예산을 결정하는 라인. 거기에 한성그룹의 자금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한재원 부회장이 문서화했다. 그리고 한재원은 죽었다.
강민준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세 번째 파일은 더 구체적이었다. 계좌번호와 금융기관명이 실제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것을 금융감독원이나 검찰에 제출하면 계좌 추적이 가능한 수준의 자료였다. 한재원은 단순히 의혹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증거를 수집해두었던 것이다.
강민준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 자료를 기사화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가 더 필요했다. 계좌의 실제 소유자 확인, 그리고 GV-3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증. 엑셀 파일만으로는 기사가 되지 않는다. 법원이 인정할 수 있는 원본 데이터, 혹은 내부 증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파일을 누가 만들었는가.
한재원이 직접 만들었다면, 이것은 내부고발 자료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강민준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조작한 자료라면, 이것은 함정이다.
강민준은 파일 속성을 확인했다. 생성 날짜, 수정 날짜, 작성자 정보. 마지막 수정 날짜는 한재원이 사망하기 나흘 전이었다. 작성자 메타데이터에는 'HJW'라는 이니셜이 찍혀 있었다.


한재원(韓在源).
이니셜이 일치했다. 하지만 메타데이터는 조작이 가능하다. 이것만으로 진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강민준은 나머지 엑셀 파일들을 빠르게 훑었다. 내용은 대체로 유사했다. 계좌, 날짜, 금액. 하지만 파일마다 다루는 시기와 대상이 달랐고, 한 파일에는 국내가 아닌 해외 계좌 내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싱가포르, 홍콩, 케이맨 제도.
역외 자금.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강민준은 엑셀 파일들을 모두 훑은 뒤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형광등 아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탐사보도 기자로 십 년을 일하면서 큰 사건들을 여러 개 다루었다. 그중에는 장관을 물러나게 한 것도 있었고, 대기업 임원 여럿이 구속된 기사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달랐다.
규모가 다르고, 연루된 권력의 층위가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 이 자료를 세상에 꺼내려 했던 사람이 죽었다.
그는 002 폴더를 열었다.



동영상 파일은 mp4 형식이었다. 용량은 127메가바이트. 재생 시간은 4분 32초.
강민준은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열렸다. 서윤아의 말대로 화질은 좋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어둑하고 흐릿했다. 촬영 장비가 좋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리는 비교적 선명했다.
공간은 밀폐된 방처럼 보였다. 벽면에 어두운 색의 패널이 보였고, 테이블 하나가 화면 중앙에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은 뚜렷하게 식별되지 않았다. 역광 혹은 의도적인 조명 배치로 인해 윤곽만 보였다.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저음의 남자 목소리. 또렷하고 무게감이 있는 음성.
"재원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형이 그냥 넘길 수가 없어."
강민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이쪽은 더 낮고 건조했다.
"형, 나는 이미 결정했어. 이게 잘못된 거 알잖아. GV-3 계정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 같아? 누가 봐도 흔적이 남는데."
"흔적은 내가 관리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두 번째 목소리가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형. 우리 아버지가 이걸 알면 뭐라고 할까."
침묵.
"아버지는 이미 알아."
그 말이 나온 순간, 강민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무경 회장. 한성그룹의 창업주. 그가 알고 있다.
재생을 계속했다.
"아버지가 알고도 묵인한다는 거야?"
"묵인이 아니라 동의한 거야. 이 사업이 그룹의 다음 십 년을 만들어. 재원아, 너도 알잖아.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GV-3이 없으면 국책사업 수주는 없어. 수주가 없으면 다음 투자도 없어."
두 번째 목소리, 한재원의 목소리로 강민준이 추정하는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그 방식이 싫어. 형, 나는 공식적인 경로로……."
"공식적인 경로." 첫 번째 목소리가 짧게 끊었다. "그게 이 나라에서 되는 줄 알아? 현실이야. 현실."
"현실이라도 선을 지켜야지. 형."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첫 번째 목소리가 말했다.
"재원이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우리 편에 서든지, 아니면 처리되든지."
서윤아가 말한 그 문장이었다. 강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화면 속 두 번째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형이 그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게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 인물이 자리를 떠나고, 화면 속 첫 번째 인물이 테이블에 남았다.
그리고 첫 번째 인물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인물의 말은 들렸다.
"응. 설득은 안 됐어. 알아서 해."
동영상이 거기서 끊겼다.
4분 32초.
강민준은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편집국의 형광등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렸다. 멀리서 야간 당직 기자 중 하나가 기침을 했다.
알아서 해.
그 말이 내려진 것이 한재원이 죽기 얼마 전이었는지, 강민준은 알 수 없었다. 동영상에는 날짜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흐름은 충분히 읽혔다.
형이 동생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동생이 거부했다. 형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동생은 죽었다.
하지만 강민준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첫 번째 인물이 한재도 회장이라는 것은 서윤아의 증언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증언은 아직 독립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화면 속 인물의 얼굴도 식별되지 않았다.
더불어, 강민준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다.
이 동영상은 누가 찍은 것인가.
한재원이 직접 찍었다면, 그는 형과의 대화를 사전에 계획하고 녹화 장치를 설치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증거를 남기기 위해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재원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USB를 컴퓨터에서 뽑았다. 손바닥 안에 쥐었다.
이 작은 물건 하나에 한성그룹의 최고권력자가 담겨 있었다. 창업주 일가의 내부 분열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음으로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이것을 세상에 꺼내는 것은 강민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왔다.
강민준은 편집국 소파에서 두 시간쯤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윤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을 것을 기대했다. 아니면 적어도 부재중 통화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민준은 서윤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다가 끊겼다. 전원이 꺼진 것도, 통화 중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끊겼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거절한 것이다.
그는 다시 걸었다. 같은 결과였다.
세 번째 시도에서는 연결음조차 울리지 않았다. 곧바로 통화 연결이 안 된다는 자동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전원이 꺼졌다. 혹은 유심이 제거됐다.'
강민준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젯밤 카페를 나서며 서윤아에게 말했다.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고, 집 앞의 차를 의식하지 말고, 연락을 자제하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화가 끊겼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서윤아 스스로 핸드폰을 끈 것. 안전을 위해 통신을 차단한 것. 또 하나는, 그녀의 핸드폰이 강제로 차단되거나 그녀 자신이 위험에 처한 것.
강민준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지금 당장은 없었다.
그는 서윤아가 살고 있는 동네를 떠올렸다. 어젯밤 짧은 대화 중에 그녀가 언급했다. 마포구 서교동. 혼자 산다고 했다. 그 이상의 주소는 모른다.
강민준은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이혜정 팀장이 출근하기 전에, 몇 가지를 정리해야 했다. 첫째, 서윤아의 연락처를 다시 확보하는 방법을 찾을 것. 둘째, USB 파일을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에게 보내 원본 여부를 확인할 것. 셋째, GV-3이 무엇인지 독립적으로 추적할 것.
세 가지 모두 혼자서는 빠르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오전 여덟 시가 넘어서 편집국에 동료 기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민준은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는 척 노트북을 열었다. 한성그룹 관련 기사들을 검색했다. 한재원 부회장의 사망 이후 보도된 기사들, 한성그룹 측의 공식 입장, 경찰 발표.
경찰은 여전히 심장마비로 사인을 발표하고 있었다. 부검은 유족의 요청에 따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예상 결과 발표는 이주 후.
이주.
강민준은 그 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이주 동안 증거는 은폐될 수 있고, 증인은 사라질 수 있다.
오전 아홉 시, 이혜정 팀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강민준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이혜정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 눈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두 가지였다.
'뭔가를 알아냈구나.'
그리고.
'나도 알아야 한다. 근데 지금은 말하기 어렵다.'
이혜정이 고개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둘이 얘기하자는 신호였다.


회의실은 편집국 옆쪽에 딸린 유리 칸막이 방이었다.
이혜정이 먼저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강민준이 문을 닫았다. 둘은 마주 앉았다.
"어디까지 갔어?"
이혜정이 먼저 말했다.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이었다. 그게 이 사람다웠다.
"내부 제보자를 만났습니다."
"누구?"
"부회장 비서실 출신이요. 이름은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혜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보 내용은?"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이혜정을 믿는다. 지금까지 그 사람의 눈에서 악의를 읽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정보를 전부 공유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하다.
"규모가 큽니다. 기재부 라인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어요. 비자금 수준을 넘어서 국책사업 로비 자금 흐름이 보입니다."
이혜정의 표정이 굳었다.
"확인된 거야?"
"원본 검증이 필요합니다. 포렌식 해줄 수 있는 사람 알고 계세요?"
"……알아볼게." 이혜정이 팔짱을 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말을 꺼냈다. "민준아."
그 호칭이 달랐다. 평소엔 '강민준'이거나 '강 기자'였다.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은 드물었다.
"말씀하세요."
"오늘 아침에 대표이사한테 불려갔다 왔어."
강민준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한성그룹 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혜정의 턱이 한 번 움직였다. 말을 선택하는 움직임이었다.
"당분간 보류하래. 공식적으로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추측성 보도를 자제하라고."
"경찰 수사 결과가 두 주 뒤입니다."
"알아."
"그 두 주 동안 증거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알아." 이혜정이 강민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나도 알고 있어. 근데 나는 대표한테 들은 거 그대로 전달한 거야."
강민준은 그 말 안에서 미묘한 것을 읽었다.
이혜정은 '보류하라'는 지시를 강민준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그 지시에 동의한다는 감정이 없었다. 복종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었다.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내가 멈추길 바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팀장님."
"응."
"대표이사가 한성그룹으로부터 뭔가를 받은 게 있습니까?"
이혜정이 잠시 굳었다가 말했다.
"그건 내가 모르는 영역이야."
"하지만 의심은 하고 계시죠."
이혜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강민준은 그녀가 오랫동안 이 무게를 혼자 들고 있었다는 것을 읽었다. 대표이사의 지시가 내부 압력인지 외부 압력인지, 그 경계를 그녀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강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이혜정이 말했다.
"강민준."
"네."
"USB는 편집국 외부에 복사본 만들어두지 마. 그리고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말고."
강민준은 그 말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읽었다.
첫째, 이혜정은 USB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추측하고 있다. 그녀에게 USB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즉, 이 상황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이혜정이다.
둘째, 그녀는 강민준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팀장님, 혹시 열흘 전에 한재원 부회장이 우리 대표한테 전화한 내용, 알고 계십니까?"
이혜정이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들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
"팀장님이 처음 이 사건 맡기실 때 말씀하셨잖습니까. 부회장이 대표한테 전화했고, 그다음 날 한성 관련 기사 보류 지시가 내려왔다고."
"아, 그랬지."
하지만 그 눈이 흔들렸다. 강민준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혜정이 알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전화가 왔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 전화의 내용도, 혹은 그 전화의 목적도.
하지만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강민준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강민준은 회의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뭔가를 숨기고 있다.
서윤아는 USB를 열어보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이혜정은 전화 내용의 전부를 말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편집국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강민준의 움직임을 대표이사에게 보고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서윤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연결음 자체가 없었다.
완전히 꺼진 번호였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덕동의 회색 빌딩들이 흐린 하늘 아래 늘어서 있었다. 저 어딘가에, 서윤아가 있을 것이었다. 살아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단순한 취재원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강민준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어젯밤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그녀의 눈.
믿고 싶다. 제발 믿고 싶다.
그 눈이 지워지지 않았다.
강민준은 노트북 검색창을 열었다. 서교동 주변 거주자 정보를 찾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 한성그룹 전 직원 등록 정보, 퇴직자 커뮤니티, SNS 흔적.
그리고 한 가지 더.
한성타워 홍보팀장 박기태.
어젯밤 그의 핸드폰에서 본 메시지의 발신인 'H'.
그 H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이 서윤아를 찾는 것보다 먼저일 수도 있었다.
강민준은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