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의 시작
강민준은 한성그룹 조직도를 화면에 펼쳐놓고 처음부터 다시 보았다.
공개된 정보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성그룹은 지주회사인 ㈜한성홀딩스를 정점으로 스물두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건설, 바이오, 금융, 유통, 미디어. 국내 재계 3위답게 손이 뻗지 않은 산업 분야가 없었다. 임원급 이상 인원만 이백 명이 넘었다.
그 이백 명 중, 이름이 H로 시작하는 사람을 추렸다.
한(韓), 허(許), 홍(洪), 함(咸), 황(黃).
성씨만으로도 수십 명이었다. 강민준은 범위를 좁혔다. 박기태 홍보팀장과 직접적인 지시 관계에 있을 수 있는 인물. 박기태보다 직급이 높고, 홍보 혹은 대외 업무를 담당하며, 어제 강민준의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
세 조건을 교차하자 경우의 수가 줄었다.
한성그룹 대외협력실장 홍준기. 부사장급. 한재도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물. 대외협력실은 미디어 관리와 정부 로비 업무를 총괄한다.
한성그룹 홍보총괄 한상민. 전무급. 그룹 홍보 전략 전반을 지휘하며 각 계열사 홍보팀장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라인이었다.
두 사람이 남았다.
강민준은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두고 각각의 공개 정보를 검색했다. 홍준기는 사진이 몇 장 나왔다. 업계 행사에서 찍힌 것들. 쉰 대 초반, 체격이 좋고 눈매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한상민은 정보가 더 적었다. 그룹 홍보총괄이 공개 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강민준은 한성그룹 관련 기사들을 뒤졌다. 5년치 기사를 훑으면서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맥락을 확인했다. 홍준기는 국책사업 관련 기사에 여러 차례 등장했다.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의 간담회, 외국인 투자 유치 행사. 움직임이 활발하고 외향적인 인물이었다.
한상민은 달랐다. 이름이 나오는 기사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짧은 인사 기사 정도였다.
강민준은 두 사람 중 한상민에게 더 오래 시선을 두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아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성그룹 계열사에 지인이 한 명 있었다. HS금융 소속의 리서치 애널리스트, 권도준. 대학 선배였다. 그와는 가끔 술자리를 하는 사이였다.
"선배, 저 강민준이에요."
"어, 민준아. 오랜만이다. 무슨 일이야?"
"한성그룹 홍보총괄 한상민 전무 알아요?"
짧은 침묵.
"……왜?"
그 '왜'가 이미 답이었다.
"아시는군요."
"민준아, 그 사람은 건드리지 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왜요?"
"그냥. 그 사람 이름이 나오는 자리에서는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야. 나도 더는 말 못 해."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한상민.
H는 그일 가능성이 높다.
예상치 못한 접촉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강민준의 메일함에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알 수 없는 주소였다. 숫자와 알파벳이 무작위로 조합된 메일 주소. 제목란은 비어 있었다. 본문은 단 두 줄이었다.
오후 두 시. 여의도공원 북측 벤치.
혼자 오십시오. 한성그룹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민준은 메일을 세 번 읽었다.
함정일 수 있었다. 어젯밤 미행이 있었다. 한성타워 인터뷰 이후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었다. 이 메일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면, 이것은 강민준을 외진 장소로 불러내려는 시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탐사보도 기자가 모든 접촉을 두려워한다면 기사를 쓸 수 없다. 강민준은 위치 공유 앱을 이혜정의 핸드폰에 켜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었다.
오후 한 시 오십 분, 그는 여의도공원 북측 입구에 도착했다.
평일 낮이었다.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강민준은 벤치 구역을 찾아 천천히 걸었다. 나무가 드문 탁 트인 공간에 벤치들이 늘어서 있었다. 북측 벤치. 특정하기 애매한 표현이었지만, 가장 북쪽에 위치한 벤치 줄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로 보였다. 단정한 감색 코트. 흰 머리가 섞인 짧은 헤어스타일.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공원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민준이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강민준 기자?"
"네."
"앉으시죠."
강민준은 남자 옆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리고 즉시 남자를 읽기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허리가 곧았다. 군인 출신이거나 오랫동안 자세 훈련을 받은 사람의 몸이었다. 손이 안정적이었다. 긴장하지 않거나 긴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사람. 눈이 깊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봐온 사람의 눈이었다.
두려움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강민준은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읽었다. 피로. 오랫동안 쌓여온 종류의 피로. 무언가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사람의 지침.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성그룹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하셨는데,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됩니까?"
남자가 정면을 바라본 채 말했다.
"삼십 년을 그 회사에 있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의 무게를 가늠했다. 삼십 년. 한성그룹의 전성기부터 지금까지를 다 겪은 사람이다.
"지금은요?"
"작년에 나왔습니다. 자의로."
'자의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라는 표정이다.'
"저한테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직접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처음으로 강민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재원 부회장은 스스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눈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두려움도 흥분도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오랫동안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을 꺼내놓는 사람의 확신.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서윤아의 흔적
강민준의 몸이 순간 굳었다가 의식적으로 풀렸다.
"그 자리라는 게 어떤 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회장님이 돌아가신 날 밤. 저는 그 저택에 있었습니다."
"저택 안에요?"
"안은 아닙니다. 밖이었습니다."
남자가 코트 깃을 여미며 계속했다.
"저는 그날 밤 부회장님한테 연락을 받았어요. 급하게 만나자는 연락이었습니다. 저택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근데 부회장님이 나오질 않으셨습니다.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리고 새벽에 경찰차가 왔습니다."
강민준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자의 얼굴을 계속 읽고 있었다.
진실이다.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이 남자는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는 중이었고, 그 기억이 지금도 고통스럽다는 것이 눈과 눈 주변의 근육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배우가 연기로 만들어낼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부회장님이 연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한테 뭔가를 전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날 밤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만나지 못했으니까."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그날 밤 주차장에서 기다리시는 동안, 뭔가 이상한 것을 보셨습니까?"
남자의 눈이 움직였다. 처음으로 약간의 긴장이 스쳤다.
"차 한 대가 저택에서 나왔습니다. 새벽 두 시 이십 분쯤이었습니다. 번호판을 기억합니다. 외우려고 일부러."
"번호판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남자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강민준에게 건넸다. 강민준이 펼쳤다.
차량 번호가 손으로 적혀 있었다. 서울 번호판.
"이 차가 누구 차인지 확인해보셨습니까?"
"했습니다."
"결과는요?"
"한성그룹 법인 차량입니다. 그런데 해당 차량의 운행 기록에는 그날 밤 운행 기록이 없습니다. 누군가 삭제했습니다."
강민준은 그 종이를 접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이걸 가지고 왜 경찰에 가지 않으셨습니까?"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것이 스쳤다.
"경찰에 이미 갔습니다. 사흘 전에."
"그리고요?"
"담당 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다음 날 그 형사 담당에서 빠졌습니다. 다른 형사로 교체됐고, 그 형사는 제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강민준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경찰도 이미 무언가의 영향 아래 있다.
이 사건은 한성그룹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수사기관까지 연결된 문제였다.
그때 강민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서교동 주민센터 사회복지사인데요. 서윤아 씨 아세요? 이 분 핸드폰에 강민준 기자님 번호가 저장되어 있어서요."
강민준의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서윤아 씨가 어디 계십니까?"
"지금 서교동 파출소에 계세요. 오늘 새벽에 길에서 발견됐는데, 의식은 있으신데 많이 놀라신 상태라서요. 지인분이 오실 수 있냐고 여쭤봐서요."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준이 명함을 꺼내 건네자, 남자가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저도 드릴게요."
남자가 명함을 꺼냈다. 강민준이 받았다.
명함에는 이름 석 자만 인쇄되어 있었다. 회사명도, 직함도 없었다.
함재식(咸在植)
강민준은 그 이름을 기억에 박으며 공원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잡으면서 명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함재식. 삼십 년을 한성그룹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한재원 부회장이 마지막으로 만나려 했던 사람.
H의 정체 공개
서교동 파출소는 작은 건물이었다.
강민준이 도착했을 때 서윤아는 파출소 안쪽 소파에 담요를 덮고 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이마에 작은 찰과상이 있었고, 아랫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코트는 한쪽 어깨가 찢겨 있었다.
"서윤아 씨."
강민준이 다가가자 그녀가 눈을 들었다. 그 눈이 강민준을 알아보는 순간, 무언가가 무너졌다. 억눌렀던 것이 한꺼번에 내려앉는 눈이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강민준은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담당 경찰관이 음료를 들고 왔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서윤아가 천천히 말했다.
"어젯밤이에요.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잡았어요. 남자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귀에 대고 말했어요."
"뭐라고요?"
"'USB는 이미 없어진 거 알지? 괜히 설치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리고 밀쳤어요.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강민준은 그녀의 이마 찰과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경찰에 신고는요?"
"여기서 하라고 데려다 줬는데, 저는 신고는 안 하려고요."
"왜요?"
서윤아가 손가락을 꼭 쥐었다.
"겁나서요. 솔직히."
강민준은 그 말에서 거짓을 읽지 않았다.
"USB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안전한 곳에 있어요."
서윤아가 처음으로 조금 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들이 USB가 없어졌다고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지금 생각하고 있어요.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제가 모르는 다른 USB가 있는 건지."
강민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USB가 없어졌다고 한 건, 위협의 언어일 수도 있고, 실제로 다른 복사본이 사라진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윤아를 파출소에서 나오게 한 뒤, 강민준은 근처 카페로 데려갔다.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면서, 강민준은 노트북을 열었다.
한상민. 한성그룹 홍보총괄 전무.
그를 검색하면서, 강민준은 동시에 함재식이라는 이름도 검색했다.
함재식. 나이로 보면 예순에 가까웠다. 한성그룹에 삼십 년 있었다면 입사가 1990년대 중반. 그 시기 한성그룹은 급격히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검색 결과가 뜨기 시작했다.
함재식. 전 한성그룹 감사실장.
강민준은 멈췄다.
감사실장. 그것은 기업 내부의 회계, 자금 흐름, 비리를 감시하는 직위였다. 삼십 년을 한성그룹 감사실에서 일했다는 것은 이 사람이 한성그룹의 모든 자금 흐름을 보아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한재원 부회장과 마지막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 맞춰졌다.
그때 강민준의 눈에 검색 결과 중 하나가 걸렸다.
2019년 경제 전문지 기사. 제목은 「한성그룹 감사실장 전격 경질, 후임으로 한상민 전무 내정」.
강민준은 그 기사를 열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는 손가락을 멈췄다.
함재식이 감사실장에서 경질된 것은 2019년이었다.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한상민이었다. 그런데 한상민은 감사실장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홍보총괄로 이동했다.
감사실에서 홍보총괄로.
이상한 이동이었다. 감사와 홍보는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이 인사 이동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한상민이 감사실에서 파악한 내부 정보를 홍보, 즉 정보 통제 쪽에서 활용하도록 배치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한상민은 한성그룹 내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면서 그 비밀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 앞 글자는 H였다.
한(韓)상민.
H.
강민준은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발신인 H는 한상민이다.'
박기태 홍보팀장에게 "기자 내보내고 즉시 연락. 그 놈 눈이 이상해"라는 문자를 보낸 사람. 강민준의 인터뷰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던 사람.
한성그룹의 정보를 통제하는 사람이 강민준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서윤아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안색이 돌아와 있었다. 강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아 씨, 한상민이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한성그룹 홍보총괄 전무."
서윤아의 손이 멈췄다.
"……알아요."
"어떤 분입니까?"
서윤아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부회장님이 그분을 무서워하셨어요."
강민준은 그 말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무서워하셨다고요."
"네. 한 번은 제가 회의실에 서류를 들고 들어갔는데, 부회장님이랑 한상민 전무님이 계셨어요. 제가 들어가는 순간 두 분이 바로 대화를 멈추셨는데, 그때 부회장님 표정을……. 저 한 번도 그 표정을 다른 데서 본 적이 없어요."
"어떤 표정이었습니까?"
"뭔가를 들킨 사람 같기도 하고, 뭔가를 참아야 하는 사람 같기도 한. 그 복잡한 표정."
강민준은 그 묘사를 들으며 생각했다.
한재원 부회장은 비자금의 증거를 USB에 담았다. 그 USB를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그가 두려워했던 사람이 한상민이라면, 한상민은 단순한 정보 관리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성그룹의 비밀을 지키는 사람인 동시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알아서 해.'
동영상 속 첫 번째 인물이 전화 통화에서 한 말. 그 전화 상대가 한상민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판 위의 말, 복선
카페를 나온 것은 오후 네 시가 넘어서였다.
강민준은 서윤아를 잠시 머물 수 있는 지인의 집으로 안내했다. 탐사보도팀에서 오래 함께 일했던 전직 동료,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는 여성 기자였다. 강민준이 간단하게 설명하자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며칠간 서윤아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겠다고 했다.
서윤아를 그곳에 두고 나서, 강민준은 공덕동 편집국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혼자 걷고 싶었다.
걸으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편이었다. 이 사건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마포대교 위를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가웠다. 한강이 아래에서 납빛으로 흘렀다.
강민준은 생각했다.
한재원 부회장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USB를 만들었고, 비서에게 맡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강민준에게 전달하라는 문자를 보냈다. 함재식을 새벽에 불렀다. 이 모든 것이 사전에 계획된 행동이었다.
그런데 한재원이 강민준을 선택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강민준은 다시 한 번 그 질문 앞에 섰다.
왜 나인가.
탐사보도 기자들 중 강민준이 특별한 이유가 하나밖에 없었다. 독심술.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하지만 그것은 비공개였다. 공식적으로 밝힌 적도 없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직업적으로 '취재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는 있었지만 그것이 독심술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재원은 그것을 알고 있었는가.
한성타워 홍보팀장 박기태의 핸드폰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그 놈 눈이 이상해.
그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강민준은 한상민이 자신의 인터뷰 장면을 어딘가에서 모니터링하면서 강민준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했다.
한상민이 강민준에 대해 이미 사전 정보를 갖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정보가 한재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한재원이 강민준을 선택했다. 한상민은 그 선택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민준이 나타나는 순간 즉각적으로 경계 신호를 보냈다.
이 가설이 맞다면, 한재원은 죽기 전부터 강민준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강민준은 다리 난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열흘 전, 한재원이 《한국시사주간》 대표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혜정은 그 전화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았다. 대표이사는 다음 날 한성그룹 관련 기사 보류를 지시했다.
그 전화에서 한재원이 대표이사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강민준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제 하나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재원이 대표이사에게 전화한 것은 보도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한재원은 강민준을 지목하면서 이 사건을 그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대표이사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표이사 역시 한성그룹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이었다.
강민준은 천천히 손을 난간에서 뗐다.
자신이 지금 어떤 판 위에 올라와 있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한재원이 설계한 판이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증거를 남기고, 그것을 세상에 꺼낼 사람을 지정했다.
그런데 동시에 한상민이 설계한 판도 있었다. 강민준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서윤아를 위협하고, 증거를 회수하려는 판.
강민준은 두 판 위에 동시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아직 어느 판이 더 큰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다리 위를 가로질렀다. 강민준은 코트 깃을 세우고 걸음을 재촉했다.
편집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혜정에게 물어야 할 것이 하나 생겼다. 열흘 전 한재원이 대표이사에게 건 전화. 그 내용을 이혜정이 알고 있다면, 이제는 말해달라고 해야 한다.
그 전화의 내용이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일 수 있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이혜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 가능하십니까?"
답이 왔다. 빠르게.
"알고 있어. 나도 네한테 할 말이 생겼어. 일곱 시, 공덕역 근처 알지?"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으면서 멈췄다.
나도 네한테 할 말이 생겼어.
이혜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은, 그녀 쪽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무엇을.
강민준은 걸음을 빠르게 했다. 한강 다리 위로 저녁이 내려오고 있었다. 강물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것이 움직였다.
함재식의 등장. 서윤아의 위기. H의 정체.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의 판 위에 놓인 말(馬)이라는 직감.
강민준은 생각했다.
말은 판 위에서 규칙대로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는 기자였다. 규칙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이 이 직업의 본질이었다.
판을 뒤집는 것도, 결국 그 판 위의 말이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