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남자 (8)

한상민에게 수정 조건 통보

by seungbum lee

한상민에게 수정 조건 통보
목요일 아침이 왔다.
강민준은 전날 밤 일찍 잠들었다. 오래만에 침대에서 눈을 감았고, 예상보다 깊이 잠들었다. 몸이 한계를 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어났을 때 시각이 여섯 시 반이었다. 창밖의 합정동은 아직 어두웠다.
샤워를 하고 커피를 끓이면서 강민준은 오늘 할 일들을 순서대로 세웠다.


첫째, 한상민에게 연락할 것. 사흘의 유예가 오늘 끝났다. 수정된 조건을 통보해야 했다.


둘째, 성북동 편의점 사장을 만날 것. CCTV 영상 접근이 오늘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취재의 방향이 달라졌다.


셋째, 편집국 내부 정보 유출 경로를 확인할 것. 어젯밤 봉투 안의 협박 메시지는 강민준과 서윤아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한상민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신호에서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
"네. 사흘이 됐습니다."
"답을 주시겠습니까."
"드리겠습니다. 자료는 받겠습니다."
한상민이 잠시 말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 올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빼는 것은 약속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한상민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강민준은 그 안정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파악하려 했다.

전화 너머라 눈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숨소리, 말의 속도, 그 뒤에 오는 침묵의 질감.
분노가 없었다. 예상했다는 감각이 있었다.


"예상하셨습니까."
"어느 정도는요." 한상민이 말했다. "기자님이 그런 원칙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래를 철회하시겠습니까."
또 침묵.
이번 침묵은 달랐다. 결정을 내리는 침묵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것을 말하기 위해 준비하는 침묵이었다.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에서 예상치 못한 것을 읽었다.
전화 너머의 한상민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 그것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말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체념과 결심이 한꺼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기자님 이름을 빼달라는 조건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한상민이 낮게 말했다.

"자료는 드리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전달하겠습니다. 장소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기자님."
"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재원 부회장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나머지는 기자님이 쓰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말을 하는 한상민의 목소리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복잡했다.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시를 받고 움직인 구조 안에서 직접과 간접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 그것은 법원이 판단할 일이었다.


"확인하겠습니다."
강민준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합정동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가로등이 꺼지기 시작했다.


한상민이 자료를 넘기기로 했다. 이름을 빼달라는 조건 없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강민준은 생각했다.

한상민이 어딘가에서 강하게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압박이 자신의 이름이 기사에 나오는 것보다 더 두려운 무언가라는 것. 한상민은 강민준의 기사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이미 감수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한상민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기사가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였다.
강민준은 그것을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다.


편의점 CCTV 영상 확보
오전 아홉 시, 성북동 편의점.
어제 봤던 오십 대 점원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강민준이 사장을 찾았다.


"사장이요?" 그녀가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제가 사장인데요."
강민준은 잠시 자신을 정리했다. 예상과 달랐다. 어젯밤 점원이 사장에게 물어보라고 했을 때, 강민준은 중년 남성을 상상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시사주간》 기자 강민준입니다." 기자증을 꺼내 보였다.


"지난주에 이쪽 동네에서 돌아가신 한재원 부회장님 관련해서 취재 중입니다. 그날 새벽 CCTV 영상을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사장은 강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이 있었다. 경계심. 하지만 그것 아래에 다른 것도 있었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미 혼자 고민해온 사람의 눈이었다.


"어제도 오셨잖아요. 남편한테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그날 새벽 영상……." 사장이 잠시 카운터를 닦는 척하다가 멈췄다. "저도 봤어요. 그날 새벽 영상."
강민준은 기다렸다.


"이상한 게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새벽 두 시 오십분쯤에 검은 SUV가 지나갔어요. 아주 천천히요. 이 동네 차가 아니에요. 번호판이 서울 번호였는데 번호를 기억하진 못했어요."
"영상이 남아있습니까."
사장이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남아있어요. 근데 이걸 보여줬다가 저한테 불이익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강민준은 그 말에서 이 사람이 이미 영상을 보여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읽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옳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공식적으로 제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확인만 하겠습니다. 영상 원본은 사장님이 갖고 계시고, 저한테 복사본을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확인만 하겠다는 거죠?"
"네."
사장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카운터 뒤쪽 작은 창고 같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낡은 모니터 하나가 선반 위에 있었다. DVR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사장이 날짜와 시간을 조정했다. 열흘 전, 새벽 두 시 삼십 분.
화면에 밤거리가 나타났다. 흑백 영상. 화질이 나쁘지 않았다. 편의점 외벽 카메라라 화각이 넓지는 않았지만, 도로의 상당 부분이 들어왔다.


강민준은 화면을 집중해서 보았다.


두 시 사십 분. 거리는 조용했다. 가끔 차 한두 대가 지나갔다.
두 시 오십삼 분.
화면 왼쪽에서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검은색 대형 SUV. 속도가 느렸다.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화면 오른쪽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강민준은 번호판을 읽으려 했다. 화각 때문에 번호판 전체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숫자와 한글 하나는 읽혔다.


그리고 바.
함재식이 기억한 번호판. 강민준은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내 비교했다.
일치했다.
같은 차였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차가 화면 오른쪽으로 나가다가 멈췄다. 일 분 가량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 정차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반대 방향이었다.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새벽 세 시 사 분이었다.


차가 그 자리에 있었던 시간은 열한 분이었다.
한재원이 죽은 시각은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경찰 발표였다.


그 차는 그 시간 안에 저택 주변을 맴돌았다.
강민준은 화면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 이후로도 이상한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세 시 이후로 그 차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구간 영상을 제 핸드폰으로 촬영해도 되겠습니까. 화면을 찍는 방식으로요."
사장이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하세요."
강민준은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다. 두 시 오십 분부터 세 시 오 분까지의 구간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번호판이 식별되는 구간을 중점적으로.
"감사합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후련함이었다. 오랫동안 혼자 갖고 있던 무언가를 내어놓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게 맞죠?"
강민준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강민준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편집국 내부의 배신자
편의점을 나와 택시를 탄 강민준은 편집국으로 향하면서 어젯밤의 협박 메시지를 다시 생각했다.
서윤아가 카페에서 강민준에게 한 말. 혼자 살고 부모님은 지방에 계신다. 그 내용이 협박 메시지에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누군가 알고 있었다.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첫째, 카페가 도청되고 있었다. 하지만 강민준이 카페를 선택한 것은 서윤아가 전화하기 얼마 전이었다. 사전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둘째, 서윤아 또는 강민준의 핸드폰이 감청되고 있었다.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강민준이 이미 유심을 교체했지만, 교체 전 통화들이 감청되었을 수 있었다.
셋째, 편집국 내부에서 정보가 새고 있었다. 강민준이 서윤아를 처음 만나기로 한 것을 이혜정 팀장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이혜정이 다른 누군가에게 말했거나, 편집국 안의 누군가가 강민준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가능했다.
세 가지 가능성 중 강민준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은 세 번째였다.
편집국에 도착한 강민준은 자리에 앉는 대신 편집국을 한 바퀴 걸었다.
탐사보도팀. 책상 여섯 개. 지금 있는 사람은 강민준 포함 세 명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출근 전이거나 외근 중이었다.
강민준은 팀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읽었다.
이런 행동이 옳은 것인지 강민준은 늘 갈등했다.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 동의 없이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의 안전과 취재원들의 안전이 걸려있었다.
팀원 중 하나인 최재혁. 이십대 후반의 막내 기자였다. 모니터 앞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강민준이 지나가면서 그의 얼굴을 읽었다.
집중하고 있었다. 기사에 빠져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상 없었다.
또 다른 팀원 허윤서. 삼십 대 중반의 여성 기자였다. 전화 통화 중이었다. 강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강민준은 그 인사를 받으면서 허윤서를 읽었다.
통화 중인 얼굴. 외근 취재원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집중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허윤서가 전화를 끊고 컴퓨터 화면을 보는 순간, 강민준의 눈이 멈췄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읽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반사적이었다.
허윤서가 통화를 끊고 화면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강민준 쪽을 한 번 흘겼다가 돌아왔다.
0.2초.
그 0.2초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이 있었다.
죄책감.
그것도 갑자기 들킨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죄책감이 순간적으로 표면에 떠오른 종류였다. 강민준이 지나가는 것을 의식한 순간 그것이 올라왔다가 빠르게 억눌러졌다.
강민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 일도 없는 척 노트북을 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허윤서.
4년을 같은 팀에서 일한 동료였다. 성실하고 꼼꼼한 기자였다. 강민준이 그녀를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강민준은 천천히 생각했다. 증거가 없었다. 0.2초의 눈빛 하나로 사람을 배신자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독심술이 언제나 옳다고 강민준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각이었지 증거가 아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있었다.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 유심 번호로.
"팀장님, 잠깐 뵐 수 있습니까. 자리 아닌 곳에서."
오 분 후 이혜정이 일어서며 외투를 걸쳤다. 복사실 앞을 지나면서 강민준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람은 따로 나가 건물 뒤쪽 흡연 구역에서 만났다. 아무도 없는 자리였다.
"허윤서요." 강민준이 낮게 말했다.
이혜정의 표정이 굳었다.
"왜."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까 제가 지나갈 때 그 사람 눈에서 뭔가를 읽었습니다."
"뭘?"
"죄책감."
이혜정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게 전부야?"
"네. 그래서 팀장님께 먼저 여쭤보는 겁니다. 허윤서 씨에 대해 최근에 달라진 점이 있었습니까."
이혜정이 담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생각하는 동작이었다.
"……두 달 전쯤에 부업을 시작한 것 같더라고. 투잡이냐고 물으니까 요즘 좀 힘들다고 했어. 대출이 있다고."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돈. 가장 오래된 이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설명하기 쉬운 이유.
"제가 오늘 허윤서 씨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려볼게요. 그 정보가 한성그룹 쪽에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혜정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확실해야 해. 맞지 않으면 그 사람 인생이 망가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실제 취재 내용은 노출하지 않고."
이혜정이 잠시 더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건데."
강민준이 설명했다. 이혜정이 듣고 나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분노였다. 배신에 대한 분노.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이, 슬픔이 있었다.
오래 함께 일한 사람에 대한 슬픔이었다.


한상민이 가져온 자료
오후 세 시, 한상민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소는 서초구 양재동의 한 빌딩 지하 주차장이었다. 강민준은 그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쇄된 공간, 카메라가 적은 곳. 하지만 한상민은 그 장소를 의도적으로 선택했을 것이었다. 자료를 전달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장소와 시간을 공유했다. 위치 추적 앱을 켜두었다. 그리고 오후 두 시 오십분, 지하철을 타고 양재동으로 향했다.
빌딩 지하 주차장. 차량이 두 대 있었다. 한상민의 차가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강민준이 다가가자 차 창문이 내려왔다.
"타십시오."
강민준은 조수석에 탔다.
한상민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민준은 그를 읽었다.
오늘 한상민의 눈이 달랐다. 삼 일 전 레스토랑에서 봤던 눈보다 더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 피로 아래에 단호함이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린 뒤에 오는 종류의 단호함이었다.
"자료 준비됐습니까."
"네."
한상민이 뒷좌석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집어 강민준에게 건넸다.
"세 가지 드리겠습니다. 설명하겠습니다."
강민준이 봉투를 열었다.
"첫 번째는 동영상 관련입니다. 그 동영상이 촬영된 장소는 한성그룹 회장 집무실 옆 소회의실입니다. 그 방에는 고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한재원 부회장이 한재도 회장과 면담 신청을 할 때 자신이 직접 녹화 장치를 활성화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이게 당시 보안 시스템 접속 로그입니다. 접속자 이름이 한재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강민준은 그 서류를 보았다. 날짜와 시간, 접속자 정보. 한재원의 사원번호가 찍혀있었다.
"두 번째는 GV-3 계정과 기획재정부 차관보의 연결 자료입니다."
다음 서류가 나왔다. 강민준은 천천히 읽었다.
차관보의 개인 계좌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GV-3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그 계좌로 흘러들어간 자금 흐름이 도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금액은 총 43억이었다. 기간은 3년.
"이 자료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저입니다." 한상민이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감사실 출신이라 자금 흐름을 역추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저도 자체적으로 기록해두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상민을 다시 읽었다.
이 사람은 3년 전부터 기록을 해두었다. 그것은 단순히 함재식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모든 것이 무너질 때 자신이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한 준비.
그리고 지금 그 준비를 강민준에게 넘기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미 자신이 이 안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 번째입니다."
한상민이 마지막 서류를 건넸다.
강민준이 받아서 펼쳤다.
의료 기록이었다. 한재원의 이름이 상단에 있었다. 발행 기관은 서울 시내 한 병원이었다. 강민준은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간결하고 충격적이었다.
부검 전 혈액 검사 예비 결과 보고서. 특정 약물 반응 양성. 심근 수축을 강제로 유발하는 계열의 약물. 자연 상태에서는 체내에서 빠르게 분해되지만, 사망 직후 혈액 샘플을 신속히 채취하면 흔적이 남는다.
"이 서류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부검 담당 법의관 중 한 명이 저한테 연락을 해왔습니다. 이 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더니 보고서가 공식 서류에서 제외됐다고 했습니다. 그 법의관이 개인적으로 사본을 갖고 있었고, 저한테 넘겼습니다."
"그 법의관이 왜 팀장님한테 넘겼습니까."
한상민이 처음으로 강민준을 직접 바라보았다.
"그 법의관은 제 대학 동창입니다. 이 결과를 보고하러 갔다가 묵살당하고 나서 저한테 전화했습니다. 자신도 위험할 것 같다고. 저는 이 서류를 받은 뒤에 기자님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 안에서 이 사건의 구조가 다시 한 번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재원은 약물로 죽었다. 타살이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예비 검사 결과가 있었고, 그 결과는 공식 부검 보고서에서 삭제되었다. 경찰 수사가 심장마비로 결론 나도록 사전에 조율된 것이었다.
수사기관까지 손이 닿아있었다.
이것은 그 어떤 취재보다 거대한 사건이었다.
강민준은 서류들을 봉투에 다시 넣었다.
"한상민 씨."
"네."
"이 자료들을 넘겨주신 것,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한상민이 정면을 다시 바라보았다.
"후회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 말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씁쓸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아래에, 아주 작게, 오랫동안 억눌려있던 어떤 감각이 있었다.
제대로 된 일을 했다는 감각.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사람 안에 없었는지, 강민준은 그 작음의 크기로 짐작할 수 있었다.


닷새의 끝, 복선
주차장을 나온 강민준은 택시를 잡으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혜정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됐어. 허윤서가 걸렸어. 네가 흘린 잘못된 정보, 오전에 이미 한성 쪽으로 나갔어. 확인했어."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고 잠시 눈을 감았다.
됐다는 단어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됐다는 것은 허윤서가 배신자로 확인됐다는 뜻이었다. 4년을 같은 팀에서 일한 사람. 성실하고 꼼꼼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강민준은 허윤서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돈 때문이었겠지만, 그 돈이 필요했던 사정까지는 몰랐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야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알지 못한 채 그 사람을 단정하는 것도 옳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오늘 저녁에 내가 직접 얘기할게. 넌 모르는 일이야. 취재에 집중해."
이혜정이 감당하겠다는 것이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넣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강민준은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서류 봉투 안에 세 가지 자료가 있었다. 동영상 원본 증빙, 차관보 자금 흐름, 약물 반응 예비 검사 결과. 이것들을 가지고 기사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한 가지가 남아있었다.
한무경.
한재원이 마지막으로 원한 것. 이 구조의 설계자를 강민준이 직접 만나 그 눈을 보아야 했다. 한무경이 지금도 이 구조를 지키려 하는지, 아니면 이제 내려놓으려 하는지.
그것은 서류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창립기념일 행사까지 이 주가 남았다. 그때까지 버텨야 했다.
그런데 닷새의 협박 마감이 내일 자정이었다.
강민준은 봉투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자료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한상민의 자료가 있었다. 편의점 CCTV 영상이 있었다. 함재식의 추적 기록이 있었다.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가 있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지금 당장 기사를 낼 수 있었다. 한무경 없이도. 완성된 기사는 아니겠지만, 한재도와 차관보를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강민준은 멈추지 않기로 했다.
한재원이 원한 것은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재도 혼자가 아니라, 이 구조 전체를. 한무경까지 드러나야 그 구조가 끊겼다.
이 주를 버텨야 했다. 협박 마감인 내일 자정을 넘겨야 했다.
그들이 마감을 넘겼다는 이유로 서윤아의 부모님을 실제로 해칠 것인가. 강민준은 그 가능성을 생각했다.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족을 건드리면 — 그것은 한국 언론 전체가 들고 일어날 사안이 되었다. 기자 주변 인물에 대한 직접적 위해. 그것은 그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았다.
협박은 협박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내 서윤아에게 전화했다.
"부모님은요."
"전주에서 이모 집으로 가셨어요. 며칠 계시다 오신다고."
"다행입니다."
"기자님."
"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해요."
강민준은 그 물음에 솔직하게 답했다.
"이 주입니다. 이 주 안에 끝냅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믿을게요."
전화가 끊겼다.
택시가 마포대교를 건넜다. 강물이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강민준은 그 빛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주.
이 주 안에 이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새 유심 번호인데도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받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강민준이 먼저 말했다.
"누구십니까."
한참 만에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목소리. 낮고 느리고 무게감이 있었다.
"강민준 기자라는 사람이요?"
"그렇습니다."
"나는 한무경이오."
강민준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이름을 들었다.
한무경.
스스로 전화를 했다.
"……네."
"만납시다.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 거요."
강민준은 그 목소리를 읽으려 했다. 전화 너머로. 나이 든 목소리의 결, 그 느린 말의 속도, 말 뒤에 남는 공기의 질감.
두려움이 없었다. 피로가 있었다. 오래된 피로.
그리고 강민준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후회.
"언제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내가 정하겠소. 내일 연락하겠소."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쥔 채 한강을 바라보았다.
한무경이 먼저 연락을 했다.
이 구조의 설계자가 강민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민준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일 한무경을 만나면,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마음을 읽는 남자가 마음을 숨겨온 사람의 뿌리를 만나는 날.
그날이 내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