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아가 숨긴 것
서윤아의 마지막 비밀
논현동 거리의 불빛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강민준이 다가가자 서윤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더 가까이 오는 것과 더 멀어지는 것 사이에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사람처럼.
강민준이 오 미터 앞에 섰을 때, 서윤아가 먼저 말했다.
"미행은 없어요. 확인했어요."
"어떻게 확인하셨습니까."
"한 시간 동안 걸어다녔어요. 버스 탔다가 내리고, 지하철 탔다가 내리고. 따라오는 사람 없었어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서윤아를 읽었다.
어제 파출소에서 봤던 창백함이 오늘도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 어제의 창백함이 두려움에서 온 것이었다면, 오늘의 창백함은 다른 종류였다.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창백함. 밤새 무언가와 싸운 사람의 얼굴.
그리고 눈이 달랐다.
어제는 강민준을 믿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오늘은 이미 믿기로 결심한 눈이었다. 그 차이가 선명했다.
"걸으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서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논현동 이면도로로 들어갔다. 가게들의 불빛이 보도를 비췄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언제부터 말씀하시려 했습니까."
"처음부터요." 서윤아가 말했다. "카페에서 기자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려 했어요. 근데 말을 못 했어요."
"왜요."
"무서웠어요. 그 내용이 나오면 제가 더 위험해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서윤아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걸으면서 말했다.
"부회장님이 저한테만 남겨주신 거잖아요. 그게 다른 사람한테 가면 부회장님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걸었다.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 표현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다. 서윤아에게 한재원의 육성은 그가 남긴 마지막 존재 증명이었다. 그것을 넘기는 것은 그 존재를 세상에 내어주는 것이었고, 동시에 자신이 그것을 혼자 간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핸드폰에 있습니까."
"네."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서윤아가 멈춰 섰다.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그리고 강민준에게 내밀었다.
재생 버튼이 화면에 있었다.
강민준은 이어폰 한쪽을 빼 서윤아에게 주고 나머지 한쪽을 자신이 꽂았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육성 메시지의 내용
낮고 무거운 숨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의 목소리. 쉰 듯 거칠었지만 또렷했다. 강민준은 그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이었지만, 동영상에서 들은 두 번째 목소리와 결이 같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았다.
한재원의 목소리였다.
"윤아야. 이 메시지 듣고 있으면 나는 아마 없을 거야. 네가 이걸 듣게 됐다는 게, 내가 생각한 최악의 경우가 됐다는 거겠지."
서윤아의 손이 핸드폰을 쥔 채 미세하게 떨렸다.
강민준은 그것을 보면서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USB 안에 있는 것들은 네가 이미 봤을 거야. 미안해. 열어보지 말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 말을 안 했네. 근데 사실은 네가 봐도 된다고 생각했어. 너는 알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짧은 침묵이 있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윤아야, USB 안에 없는 게 하나 있어. 내가 일부러 넣지 않은 거야. 이건 네 핸드폰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강민준 기자한테 가면 같이 들려줘."
강민준은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GV-3 계정의 실제 설계자는 한재도 형이 아니야."
강민준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추는 것 같았다.
"형은 이 구조를 물려받은 거야. 처음 만든 사람은 우리 아버지야. 한무경. GV-3은 아버지가 십오 년 전에 만들었어. 처음에는 회사를 지키기 위한 방어용이었대.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용이 됐지. 국책사업 수주, 정부 인사 개입, 언론 통제. 아버지가 그 구조를 형한테 넘겼어. 형은 그걸 더 키웠고."
또 침묵.
"내가 USB를 만든 건 형을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야. 이 구조 자체를 없애려는 거야. 형을 잡아도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를 잡아도 그 구조는 다른 누군가한테 넘어가. 그걸 막으려면 구조 자체를 세상에 드러내야 해."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한무경 회장. 창업주. 일흔이 넘은 노인. 지금까지 이 사건에서 배경 인물로만 있었던 사람. 동영상에서 한재도가 '아버지가 이미 알고 있다'고 했을 때, 강민준은 그것을 묵인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묵인이 아니었다. 설계자였다.
"강민준 기자는 사람을 읽는 사람이야. 내가 기사들을 보면서 알았어. 그 사람이 한무경을 직접 만나야 해. 한무경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 구조가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그 사람이 지금도 이 구조를 지키려 하는지, 아니면 이제 내려놓으려 하는지."
강민준은 그 문장에서 멈췄다.
한재원은 강민준의 독심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을 읽는 사람. 그리고 한무경을 만나라고 했다. 증거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읽으러 가라고.
"윤아야. 미안해. 네가 이 짐을 지게 해서. 근데 너밖에 없었어. 이 메시지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짧은 숨소리.
"고마워. 항상."
메시지가 끝났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민준은 이어폰을 뺐다. 서윤아도 이어폰을 뺐다. 그녀의 눈이 젖어 있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미 많이 울어서 눈물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언제 이 메시지를 받으셨습니까."
"부회장님이 돌아가신 날 오전이에요. 아침 일찍."
"USB를 건네주신 날 밤에 녹음하신 것 같습니다."
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준은 걷기 시작했다. 서윤아도 따라 걸었다.
한무경.
이 이야기의 시작이 거기 있었다. 한재도가 아니라, 한무경. 형이 아니라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가 지금도 살아있었다. 일흔 셋, 한성그룹 창업주,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것이 업계의 상식이었다.
한재원은 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구조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의 정점에 아버지가 있었다.
강민준은 그 구조를 기사로 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한재도 회장과 기획재정부 차관보를 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위에 한무경이 있고, 그 구조가 십오 년에 걸쳐 어떻게 작동해왔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기업 비리 기사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자본과 권력이 얼마나 깊이 얽혀있는지를 드러내는 기사였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 앱을 열었다.
"서윤아 씨, 이 메시지를 복사해도 되겠습니까. 원본은 서윤아 씨가 계속 갖고 계시고."
"네."
서윤아가 파일을 전송해주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받아 저장했다. 그리고 걸으면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한무경을 직접 만나야 한다. 한재원이 그것을 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무경에게 접근하는가. 명예회장은 공식 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를 한 것이 마지막으로 7년 전이었다.
한무경의 눈을 보려면, 먼저 그 앞에 서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함재식이 준 번호판을 추적해야 했다.
법인 차량 추적
다음 날 아침, 강민준은 두 가지를 동시에 진행했다.
하나는 서윤아와 함재식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둘 다 연락이 닿았다. 서윤아는 동료 기자의 집에서 안전하게 있었다. 함재식은 이태원 근처 지인의 사무실에 머물고 있었다. 둘 다 당분간 주소를 옮기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번호판 추적이었다.
함재식이 한재원이 죽은 날 새벽, 저택 앞에서 목격한 한성그룹 법인 차량의 번호판. 강민준은 그것을 가지고 경찰 출입 기자들이 쓰는 비공식 경로로 접근했다. 차량 등록 정보는 공식적으로는 기자가 조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래 사귀어온 경찰서 담당 기자 네트워크가 있었다.
강민준이 전화를 건 것은 사건기자 출신의 선배 기자였다. 지금은 일선을 떠나 데스크에 있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이십 분 만에 답을 보내왔다.
차량 소유자 확인 결과, 소유주는 ㈜한성물산이었다. 한성그룹의 모회사급 계열사. 하지만 실제 운행 배정 기록은 선배도 접근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것은 회사 내부 기록이었다.
강민준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한재원이 죽은 날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강남구 성북동 인근 저택 주변. 그 시간대에 그 지역의 CCTV 영상을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공식적으로는 수사기관만 열람이 가능했다. 하지만 강민준에게는 다른 경로가 있었다.
저택 인근에 24시간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 외부 CCTV는 보통 일주일치 영상을 저장한다. 이미 열흘이 지나 영상이 덮어씌워졌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강민준은 직접 성북동으로 갔다.
한재원의 저택 주변을 먼저 걸어보았다. 고급 주택가. 나지막한 담과 넓은 마당이 있는 집들이 늘어선 조용한 동네였다. 저택은 막혀 있었다. 정문에 한성그룹 측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그렸다.
북쪽으로 이백 미터에 편의점이 있었다. 강민준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음료를 사면서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오십 대 남성 점원이었다. 표정이 무덤덤했다.
"저 기자인데요, 이쪽 동네 최근에 이상한 거 보신 거 없으셨어요? 밤에 차 많이 다니거나."
점원이 눈을 들었다.
"뭔데요."
"열흘 전쯤 새벽에 이쪽에서 사람이 돌아가셨잖아요. 한성그룹 부회장님이요. 그때 주변에 차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점원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복잡했다. 알고 있다. 뭔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다.
"CCTV 열흘 전 영상이 남아있을까요? 그날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점원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우리 CCTV는 2주치 저장돼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2주치라면 아직 덮어씌워지지 않았다.
"그날 새벽 영상을 볼 수 있을까요? 혹시 검은색 SUV 지나간 게 있는지."
점원이 카운터 뒤쪽을 힐끗 보았다.
"사장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사장님 계십니까."
"아침에 오세요."
그것도 정보였다. 점원이 영상을 직접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완전히 차단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사장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강민준은 편의점을 나오면서 다른 것을 확인했다.
편의점 외벽에 달린 CCTV의 방향. 두 개였다. 하나는 편의점 입구를 향하고, 하나는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거리를 향한 카메라의 각도가 북쪽이었다. 저택 방향이었다.
그 각도에서라면 저택 정문 앞을 지나는 차량이 찍힐 수 있었다.
강민준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오기로 했다.
그날 오후, 그는 한 가지를 더 시도했다.
한성그룹 내부의 전직 직원 네트워크를 통해 ㈜한성물산 차량 관리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한성 계열사 출신 인맥 중 한 명이 차량 관리팀 출신이었다. 그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접촉했다.
두 시간이 걸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해당 차량은 평소에 한성그룹 대외협력실에 배정된 차량이었다. 대외협력실장은 홍준기. H가 아니라 또 다른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차량의 열흘 전 운행 기록이 사내 시스템에서 삭제되어 있다고 했다.
"삭제된 게 확실합니까."
"네. 그날만 없어요. 전후로는 다 있는데."
"누가 삭제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시스템 관리자 권한으로 됐는데, 거기까지는 제가 모르겠어요."
운행 기록 삭제. 함재식이 경찰에 번호판을 제보했을 때 경찰이 확인하고도 아무 조치를 안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기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삭제된 기록은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 삭제했다는 것 자체가 증거였다. 그리고 편의점 CCTV에 차량이 찍혀있다면, 기록이 없어도 차량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었다.
강민준은 이 두 가지를 연결하면서 다음 날 아침 편의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두 증거의 충돌
그날 저녁,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연락했다.
새 유심 번호로. 이혜정은 새 번호를 이미 저장해두었다. 두 사람은 편집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강민준이 오늘 확인한 것들을 정리해서 말했다.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 한무경이 GV-3의 실제 설계자라는 것, 법인 차량 추적, 운행 기록 삭제.
이혜정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한무경까지 가야 한다는 말이야?"
"한재원이 그것을 원했습니다."
"한무경을 어떻게 만나."
"아직 방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거예요."
이혜정이 잠시 생각했다.
"한무경은 지금 공식 직함이 없어. 명예회장이지만 이사회에는 없어. 그리고 7년째 언론 인터뷰를 안 하고 있지. 근데……." 이혜정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 가지가 있어."
"뭡니까."
"한무경이 매년 하는 게 딱 한 가지 있어. 한성그룹 창립기념일 행사. 매년 11월 첫째 주. 그룹 임직원들이랑 협력사 관계자들, 그리고 극히 일부 언론사만 초청받는 자리야. 내부 행사라 공개는 안 하지만, 한무경이 반드시 나오는 자리야."
강민준은 달력을 생각했다.
"11월 첫째 주면 지금부터 이 주 남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도 초청을 받아. 매년. 광고주 예우 차원에서."
강민준은 이혜정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대표이사가 보내줄 리 없지." 이혜정이 말했다. "근데 내가 가면 돼. 나 혼자 갈 수는 없으니까 보조 기자 한 명을 데려가는 게 관례야."
"저를 데려가실 수 있습니까."
"대표한테 들키면 나는 끝이야."
그 말을 하는 이혜정의 눈에서 강민준은 두려움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결심도 읽었다. 이 사람은 이미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한 상태였다.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민준에게 결의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팀장님이 그 결정을 내려주신다면, 저는 반드시 이 기사를 완성하겠습니다."
이혜정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알았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서 강민준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성 메시지는 한재원이 한무경을 만나라고 했다. 그리고 한무경이 이 구조를 지키려 하는지 내려놓으려 하는지를 읽으라고 했다.
하지만 차량 추적 결과는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재원이 죽은 날 밤, 대외협력실 소속 차량이 저택에서 나왔다. 대외협력실장은 홍준기. 그 차량이 거기 있었다는 것은 한재원의 죽음에 대외협력실이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런데 한상민은 자신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재도의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세 개의 이름이 충돌하고 있었다. 한재도, 한상민, 홍준기. 그리고 그 위에 한무경이 있었다.
이 구조 안에서 실제로 누가 무엇을 했는지 — 그것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면 강민준이 직접 그 사람들의 눈을 봐야 했다.
독심술이 가장 필요한 순간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한상민 문제는 어떻게 할 거야?" 이혜정이 물었다.
"사흘 안에 답을 줘야 합니다."
"사흘이 내일 끝나잖아."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상민의 거래를 이용하되, 조건을 바꾸겠습니다. 자료는 받겠지만 이름을 빼는 것은 약속할 수 없다고 할 겁니다."
"그러면 한상민이 거래를 철회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절반의 진실로 쓰는 기사는 기사가 아닙니다."
이혜정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게 네 원칙이야?"
"네."
"좋아." 이혜정이 일어서며 코트를 걸쳤다. "나도 마찬가지야."
위험의 실체화, 복선
편집국으로 돌아온 강민준은 자신의 자리에서 오늘의 것들을 정리했다.
취재 일지를 업데이트했다.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 내용, 한무경의 역할, 차량 추적 현황, 편의점 CCTV 접근 계획. 그리고 한상민과의 거래 방향.
한 가지씩 정리될수록 그림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위험도 선명해졌다.
강민준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함재식의 직원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서윤아가 협박을 받았다. 박진수가 압박을 받았다. 그리고 아직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미행이 있었다.
이 사건을 파고들수록 강민준은 더 많은 사람들의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후 열 시, 편집국이 조용해진 시각에 강민준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오늘 밤은 집으로 가기로 했다. 편집국 소파에서 자는 것이 며칠 연속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야 판단이 흐려지지 않았다.
마포구 합정동의 자신의 원룸. 걸어서 이십 분 거리였다.
밤거리를 걸으면서 강민준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읽었다. 뒤따라오는 사람 없었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가게 유리에 반사된 거리를 확인했다. 이상 없었다.
원룸 건물 앞에 도착했다.
도어락을 누르려는 순간, 강민준의 눈이 멈췄다.
현관문 아래 바닥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봉투였다. 흰색 봉투. 주소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바닥에 놓여 있었다.
강민준은 봉투를 줍지 않고 먼저 주변을 살폈다.
건물 앞 골목. 오른쪽으로 이십 미터, 왼쪽으로 삼십 미터까지 시야가 들어왔다. 사람이 없었다. 차도 없었다.
그는 장갑을 꺼내 끼고 봉투를 집었다.
안에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꺼내서 펼쳤다.
손으로 쓴 글씨였다. 세 줄.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 자정까지 멈추지 않으면, 멈추게 됩니다.
서윤아 씨의 부모님이 지방에 계신다고 하셨죠.
강민준은 그 종이를 읽고 다시 읽었다.
서윤아 씨의 부모님이 지방에 계신다.
서윤아가 강민준과 처음 만난 카페에서 한 말이었다. 혼자 살고, 부모님은 지방에 계신다고. 그 대화를 누군가 듣고 있었거나, 서윤아의 핸드폰이나 강민준의 핸드폰이 도청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
오늘이 수요일이었다. 닷새 남았다.
닷새 안에 멈추지 않으면 서윤아의 부모님이 위험해진다. 그 협박이었다.
강민준은 종이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장갑을 낀 손에 봉투를 들고 잠시 서 있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왔다. 분노와 냉정함.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닿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을 댄 것이었다. 취재 대상이 아닌 사람의 가족을 이용하는 것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냉정함은 훈련에서 나왔다. 이 협박은 그들이 아직 강민준을 직접 제거할 수 없다는 신호였다. 기자를 직접 해치면 언론의 역풍이 온다. 그래서 가장자리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서윤아, 서윤아의 부모님. 강민준이 멈추도록 강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서윤아에게 전화했다.
"지금 괜찮습니까."
"네, 왜요?"
"부모님이 지방에 계신다고 하셨잖아요. 어디십니까."
"전주요. 왜요?"
"지금 당장 부모님께 전화하셔서 며칠 동안 다른 곳에 머물러 달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여행이라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서요. 제가 설명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은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게 먼저입니다. 지금 바로 전화하실 수 있습니까."
"……네."
"통화하시고 나서 저한테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봉투를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 봉투를 놓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한상민의 라인인지, 홍준기의 라인인지, 아니면 그 위의 누군가인지.
하지만 이 협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닷새 안에 이 사건의 방향이 결정된다.
기사가 먼저 나오거나, 강민준이 먼저 멈추거나.
그는 도어락을 눌렀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위험은 이미 앞에 있었다.
원룸 불을 켰다. 작은 방.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창문 밖으로 합정동의 불빛이 보였다.
강민준은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닷새.
그 닷새 안에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이 있었다. 편의점 CCTV, 한상민과의 거래, 한무경과의 만남, 기획재정부 차관보 접근, 부검 담당 법의학자.
그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기사가 흔들렸다.
그 모두가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강민준은 펜을 집었다.
그리고 목록 맨 위에 한 줄을 추가했다.
서윤아 부모님 안전 확인.
그것이 먼저였다. 모든 것에 앞서서.
그 한 줄이 이 취재를 단순한 기사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사를 쓰는 이유가 단지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움직인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민준은 그것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느꼈다.
창밖의 불빛들이 밤 안에서 흔들렸다.
닷새.
그 닷새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닷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