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남자 (9)

창업주의 눈

by seungbum lee

한무경과의 만남
금요일 오전 열 시, 한무경에게서 문자가 왔다.


장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한 고택이었다. 주소만 적혀 있었고 다른 말은 없었다. 강민준은 지도를 검색했다. 용인 외곽의 야산 자락, 도로에서 한참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었다. 주변에 건물이 거의 없었다.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주소를 공유했다.
"혼자 가는 거야?"
"네."
"위험하면 어떡하려고."
"한무경이 저를 해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혜정이 한참 후에 답했다.


"두 시간마다 연락해. 안 되면 내가 경찰에 신고한다."
강민준은 렌터카를 빌렸다. 자신의 차를 쓰면 추적이 될 수 있었다. 일반 렌터카를 현금으로 빌렸다. 오전 열한 시에 출발해서 용인으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강민준은 생각을 정리했다.


한무경이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어젯밤이었다. 그리고 만남 장소로 자신의 개인 거처를 지목했다. 한성타워도 아니고, 중립적인 공간도 아니고, 자신의 공간. 그것은 강민준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반대로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는 만나봐야 알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도로를 벗어나 좁은 길로 안내했다. 야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도로. 나무들이 양쪽에서 가지를 뻗고 있었다.

늦가을이라 잎이 거의 다 떨어져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 사이로 회색 하늘이 보였다.
오 분을 더 들어가자 기와지붕이 나타났다.


고택이었다. 현대식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안의 건물은 오래된 한옥이었다.

마당에 수백 년은 됨 직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대문 앞에 차를 세우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오십 대 남자였다. 정장 차림. 경호원이거나 집사였다.
"강민준 기자님이십니까."
"네."
"들어오십시오."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들어갔다. 한옥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따뜻했다. 나무 바닥과 흰 벽이 단정한 공간이었다.


중앙 방으로 안내받았다.
거기 한무경이 있었다.
강민준은 그를 보는 순간, 멈출 뻔했다.


일흔 셋이라고 했다. 그 나이가 맞았다. 머리는 완전히 희었다. 체구는 작았다. 한때 대한민국 재계를 흔들었다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노쇠해 보이는 외모였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고, 무릎 위에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늙은 몸과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깊고 맑았다. 오랫동안 많은 것을 보아온 사람의 눈. 그 눈이 강민준을 보는 순간, 강민준은 자신이 그 눈에 의해 읽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읽히고 있다.
강민준이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앉으시오."
낮고 느린 목소리. 어젯밤 전화에서 들은 것과 같았다.


강민준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차가 놓여 있었다.
강민준은 즉시 한무경을 읽기 시작했다.


피로. 몸에서 오는 피로가 먼저 보였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피로 너머에 다른 것이 있었다. 강민준이 한동안 들여다본 뒤에야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것.


이 사람은 오랫동안 혼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짐. 이름 붙이기 어려운 짐.
"차 드시오."
"감사합니다."
강민준이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보이차 향이 올라왔다.


"재원이가 기자한테 연락을 남겼다는 것, 나도 알고 있소."
한무경이 먼저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재원이가 나한테도 연락을 했으니까."
강민준은 그 말에서 무언가가 조각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창업주의 고백
"재원이가 죽기 나흘 전에 나한테 왔소. 여기 이 방에서."
한무경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나무가 보이는 창이었다.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버지, 저 이제 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용서하세요." 한무경이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소. 그 말을 하고 갔어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무경의 눈을 읽었다.


슬픔이었다. 숨기지 않는 슬픔. 오래 쌓인 슬픔이 지금 이 순간 표면에 올라와 있었다.

연기가 아니었다. 강민준이 오랫동안 사람의 눈을 읽어오면서 진짜 슬픔과 만들어진 슬픔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진짜였다.


"아드님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한무경이 고개를 돌려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소."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강민준은 그 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한재원이 죽은 날부터 타살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무경이 무릎 위의 담요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감정을 정리하는 동작이었다.


"내가 만든 구조가 내 아들을 죽였소. 그 사실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강민준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한무경은 GV-3을 만들었다. 그 구조가 한재원을 '처리'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아버지가 만든 것이 아들을 죽인 것이었다. 그 아이러니를 한무경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GV-3을 처음 만드신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한무경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1990년대 초반이었소. 그때는 이 나라에서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정치권과의 연결이 필수였소.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노골적이었어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돈이 들어갔고, 장관 인사 때마다 사람이 들어갔소.


내가 GV-3을 만든 건 그 흐름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서였소. 내가 주도적으로 관리하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한재도한테 넘기고 나서부터요." 한무경이 창밖을 보았다. "재도는 그것을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썼소. 국책사업 수주, 언론 통제, 경쟁사 제거. 내가 넘긴 것이 그 아이 손에서 달라졌어요. 그리고 나는 늙어서 막을 수가 없었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무경을 계속 읽었다.


진실이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에서 한무경이 빠뜨린 것이 있었다. 강민준은 그 빠진 부분의 윤곽을 느꼈다.


"막을 수 없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무경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막지 않은 것이겠죠.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강민준은 계속했다.


"한재원 부회장이 GV-3에 반대했을 때, 회장님이 한 번만 한재도 회장을 막으셨다면 한재원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이 방 안에 놓였다.


한무경의 눈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오랫동안 쌓아두었던 것이. 강민준은 그 무너짐을 보면서 자신이 너무 날카롭게 들어갔나 생각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한재원이 자신에게 원한 것이었다. 이 사람의 눈을 보는 것.


"……알고 있소."
한무경이 낮게 말했다.
"재원이가 나한테 왔을 때, 나는 재도를 막았어야 했소.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보내버렸어요. 재도를 선택한 거요. 그게 아비가 할 짓이 아닌데."
그 말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복잡했다.


후회. 자책. 그리고 그 자책을 오래 혼자 들어온 무게. 이 사람은 아들이 죽은 뒤로 매일 이 방에 앉아 그 선택을 다시 살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강민준은 그 감정에 함몰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한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무경이 원하는 것
"기자가 쓸 기사에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하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자진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재도만 잡아서는 안 되오. 내가 만든 구조라는 것이 드러나야 이 구조가 없어지오. 재도를 잡아도 나를 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구조를 이어받소. 내가 만들었고 내가 넘겼다는 것이 활자로 남아야 이 구조가 끊기오."
강민준은 한무경의 눈을 읽었다.


진심이었다. 두려움이 없었다. 나이 든 사람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내리는 결정의 눈이었다. 이미 잃을 것을 다 잃은 사람의 눈이기도 했다.


"회장님이 이 구조의 설계자임을 인정하시면, 법적 책임이 따릅니다."
"알고 있소."
"그것을 감수하시겠다는 겁니까."
"내가 감수해야 하오. 재원이한테 빚진 것이 있으니까."
강민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 만남이 이렇게 흐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한무경이 버티거나 회유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것을 기사에 쓰라고 먼저 요청하고 있었다.


"한재도 회장은 이 만남을 알고 있습니까."
한무경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알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요."
"회장님이 자수 의사가 있으시다면, 저보다 검찰에 먼저 가시는 것이 옳습니다."


"기사가 먼저요." 한무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사가 나가야 검찰이 움직이오. 지금 검찰 라인에도 재도의 손이 닿아있소. 기사가 없으면 묻힐 수 있어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이 이 나라의 권력 구조를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를 느꼈다. 칠십 년을 이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말하시오."
"한재원 부회장이 저한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회장님이 이 구조를 지키려 하는지, 아니면 내려놓으려 하는지 읽어보라고요."
한무경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이오?"
강민준은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두 개가 동시에 있었다. 내려놓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도 여전히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이 사람 안에서 오랫동안 싸워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었다.


"반반입니다."
한무경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있다가 웃었다. 처음으로 웃었다. 씁쓸하고 지친 웃음이었다.
"정직하게 말하는군."
"그래야 제가 드릴 말씀도 정직해지니까요."
"뭐요."
"내려놓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지키려는 마음은 이미 늦었습니다.


그 구조는 이미 균열이 났습니다. 한상민이 자료를 넘겼고, 법의관이 검사 결과를 보존했고, 함재식이 3년을 추적했습니다. 회장님이 선택하지 않아도 기사는 나갑니다.


다만 회장님이 함께 말씀해주신다면, 이 기사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됩니다. 그게 한재원 부회장이 원한 것이었습니다."
한무경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의 소나무가 바람에 가지를 움직였다. 그 소리만 방 안에 들어왔다.
"녹음해도 되오?"
"회장님의 동의 없이는 쓰지 않겠습니다."
"녹음하시오."
강민준이 핸드폰을 꺼내 녹음 앱을 열었다.
그리고 한무경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이야기. 처음에는 방어용이었던 구조가 어떻게 공격용으로 변했는지. 누구의 이름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연결됐는지.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처음 GV-3에 편입된 경위. 한재도에게 구조를 넘기기로 결정한 시점.
강민준은 녹음을 하면서 동시에 필기를 했다. 그리고 간간이 질문을 던졌다.


두 시간이 흘렀다.
한무경이 말을 마쳤을 때 창밖의 빛이 달라져 있었다. 오후의 낮은 빛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됐소?"
"네. 충분합니다."
"재원이한테……." 한무경이 잠시 멈췄다. "미안하다는 말이 전해질 수 있겠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기사에 담겠습니다."
한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조용한 것이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조용함. 오래 싸우다가 내려놓은 사람의 고요함.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사가 나가기 전에 한재도 회장 쪽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안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한무경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


"늙은이 걱정은 마시오. 내 아들 걱정이나 하시오."
강민준은 그 말의 무게를 가지고 방을 나왔다.


만남 직후 한재도의 움직임
고택을 나온 것은 오후 두 시 반이었다.
강민준이 렌터카에 탔다. 시동을 걸기 전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혜정에게서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연락이 왜 없어."
"강민준 지금 어디야."
"빨리 연락해."
마지막 문자는 오 분 전이었다.


"지금 편집국이 이상해. 빨리 연락해."
강민준은 즉시 전화를 걸었다.
이혜정이 두 번째 신호에서 받았다.


"어디야 지금."
"용인 출발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 오전에 우리 회사 대표이사 호출을 받았어. 한성그룹 법무팀에서 공문이 왔대.

한성그룹 관련 보도를 준비 중인 것이 확인됐으며 보도가 나갈 경우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내용이야."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액셀을 밟았다.


"허윤서를 통해 새어나간 겁니까."
"아니. 허윤서는 어제 저녁에 내가 직접 얘기했어. 그 사람은 지금 편집국에 없어. 근데 공문은 오늘 오전에 왔어. 허윤서가 흘린 것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이 공문에 담겨있었어. 취재 내용 요약, 증거 종류, 취재원 이름까지."
강민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취재원 이름. 서윤아, 함재식, 한상민. 그 이름들이 공문에 담겨있다면, 그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흘린 것이었다.


"그 정도를 아는 사람이 팀장님과 저 말고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근데 민준아, 공문에 한상민 이름도 있어."
강민준은 그 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한상민 이름이 공문에 있다. 한상민이 자료를 넘겼다는 것을 한재도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한상민의 움직임이 이미 한재도에게 보고됐다는 것이었다.


한상민 주변에도 감시가 있었다.
"한상민한테 연락해야 합니다."
"나도 방금 그 생각 했어. 근데 더 큰 문제가 있어."
이혜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대표이사가 기사를 완전히 봉쇄하겠다고 했어. 취재 중단 지시야. 네 기자증을 회수하겠다고."
강민준은 고속도로 진입로를 지나면서 속도를 높였다.


기자증 회수. 그것은 기사를 쓸 수 없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었다. 기자증이 없으면 공식적인 취재 행위가 불가능했다.


"대표이사가 실제로 그렇게 할 권한이 있습니까."
"있어. 편집국장 결재만 받으면 돼. 근데 편집국장이 대표 편이야."
"얼마나 빨리 진행됩니까."
"오늘 안에 할 수도 있어."
강민준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빠르게 계산했다.


기사를 오늘 안에 써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기사의 핵심을 확보된 상태로 만들어두어야 한다. 기자증이 회수되어도 이미 완성된 기사 원고는 막을 수 없었다. 기사를 실어줄 다른 매체를 찾을 수도 있었다.


"팀장님, 저 오늘 밤 기사 씁니다."
이혜정이 잠시 침묵했다.
"편집국 들어오면 대표한테 잡혀."
"편집국 말고 다른 곳에서 씁니다."


"어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쓸 곳을 찾겠습니다."
이혜정이 말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지금 당장 한상민에게 연락해서 그의 이름이 공문에 실렸다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그 사람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그리고 함재식에게도요."
"할게."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서윤아에게 연락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나오지 마세요. 절대로."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는 그 집에서 있어주세요."
강민준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조수석에 놓았다. 고속도로의 차들이 양쪽에서 스쳐갔다.


한재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기자증 회수도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 압박은 그다음에 올 것이었다.
강민준은 액셀을 더 밟았다.
서울까지 한 시간이었다.


최대 위기 예고 복선
서울로 돌아온 것은 오후 세 시 반이었다.


강민준은 편집국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합정동 자신의 원룸으로 향했다. 렌터카를 건물 앞에 세우고 올라가면서 주변을 읽었다. 오늘은 의심스러운 차가 보이지 않았다.


원룸으로 들어가서 노트북을 열었다.
기사를 써야 했다. 오늘 밤 안에.
한무경의 녹음이 있었다. 한상민의 자료 세 가지가 있었다. 함재식의 추적 기록이 있었다.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가 있었다. 편의점 CCTV 영상이 있었다.
그것들을 조합하면 기사가 됐다.


강민준은 빈 문서를 열었다. 제목을 입력했다.
한성그룹 한재원 부회장 타살 의혹 — 비자금과 국책사업 로비, 그리고 창업주 한무경의 15년.
제목이 길었다. 나중에 다듬을 것이었다.


지금은 내용이 먼저였다.
강민준은 타이핑을 시작했다.
첫 문단. 한재원의 죽음. 공식 발표는 심장마비. 하지만 예비 혈액 검사 결과는 심근 수축 유발 약물 반응 양성이었다.


두 번째 문단. GV-3. 한성그룹과 기획재정부 산하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내 비공식 예산 계정. 780억 규모의 자금 흐름.


세 번째 문단. 기획재정부 차관보와의 연결. 43억. 계좌 정보.
강민준은 타이핑을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 문단. 한재원이 이 구조에 반대했다는 것. 동영상 속 대화. 형이 동생에게 '처리'를 예고한 것.


다섯 번째 문단. 한무경의 증언. GV-3의 기원.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공격용으로 변한 것. 그리고 한무경이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


한 시간이 흘렀다.
강민준은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이 뜨거웠다. 머리가 과열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기자증이 회수되기 전에, 한재도의 다음 움직임이 있기 전에, 이 기사의 원고가 완성되어야 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 이혜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상민 연락 안 돼. 전화가 꺼져있어."
강민준은 그 문자를 보고 손을 멈췄다.
한상민의 전화가 꺼졌다.


어제 자료를 넘긴 날 밤까지는 연락이 됐다. 오늘 오전에 공문이 왔다. 그 사이에 한상민이 연락 두절이 됐다.
다음 문자가 왔다.


"함재식도 연락 안 돼."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동시에 연락이 끊겼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재도가 움직였다. 공문은 외부를 향한 것이었다. 이것은 내부를 향한 것이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들었다. 서윤아에게 전화했다.
연결됐다.
"서윤아 씨, 지금 괜찮습니까."
"네, 있어요. 왜요?"
"한상민 씨와 함재식 씨 연락이 끊겼습니다."
침묵.
"……그게 무슨 의미예요."
강민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절대 혼자 있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기사를 완성해야 했다. 지금 당장.
한상민과 함재식의 안전이 걱정됐다. 하지만 강민준이 그들을 직접 찾으러 다니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다. 최선은 기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기사가 세상에 나가면 — 한재도는 더 이상 사람을 건드릴 수 없게 됐다.


기사가 나간 뒤에 증인이 다치면 그것이 곧 증거가 됐다.
기사가 방패였다.
강민준은 타이핑을 재개했다.


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창밖의 합정동이 어두워졌다. 가로등이 켜졌다. 강민준은 커튼을 쳤다. 조명을 켰다.
원고가 쌓여갔다.


여섯 번째 문단. 함재식의 증언. 한재원이 죽은 날 밤 저택 앞에서 목격한 차량. 법인 차량 번호판. 편의점 CCTV 영상.
일곱 번째 문단. 편집국 내부 정보 유출. 언론사 내부에서도 이 사건을 막으려는 압박이 있었다는 것.


여덟 번째 문단. 한무경의 직접 증언. 그의 말을 인용했다. 내가 만든 구조가 내 아들을 죽였소.


강민준은 그 문장을 타이핑하면서 잠시 멈췄다.
그 문장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한무경의 목소리로, 한무경의 언어로 나온 자기 고백. 이것이 활자가 되면 이 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서 이혜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사 쓰고 있어?"
"네. 거의 다 됐습니다."
"어디에 실을 거야? 우리 회사에서는 막혔어. 오늘 저녁에 대표한테 직접 불려갔다가 왔어. 내 팀 전체 취재 활동 중단 지시야."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다른 매체를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탐사보도 전문 온라인 매체 중에 독립성이 보장된 곳으로요."
"알아볼게. 근데 시간이 있어?"
"원고를 오늘 밤 안에 완성하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보낼 수 있습니다."
이혜정이 잠시 침묵했다.


"민준아."
"네."
"한상민이랑 함재식이 걱정돼."
강민준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기사가 먼저입니다."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문단을 써야 했다.


이 기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 한재원이 남기고 싶었던 것. 그리고 이 사건이 단순한 기업 비리가 아니라, 이 나라의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연결되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강민준은 타이핑을 시작했다.


마지막 문단이 화면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새 유심인데도 모르는 번호였다. 강민준은 받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차갑고 낮았다. 한상민도 아니고 한무경도 아니고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강민준 기자."
"네."
"기사 쓰고 있지요?"
강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밤 안에 완성하면, 내일 아침에 함재식 씨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함재식.
연락이 끊긴 함재식.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기사를 쓰면 함재식이 위험하다는 것.
강민준은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놓은 채 멈춰 있었다.


한재원이 설계한 판과 한재도가 설계한 판이 지금 이 방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기사를 쓰는 손을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위협이 함재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게 만드는 위협임을 알고 계속 써야 하는가.


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사람은 지금 이 방에 강민준 혼자였다.
독심술로 읽을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뿐이었다.
강민준은 눈을 감았다.


오래된 방법을 썼다. 자신의 내면을 읽는 방법. 지금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함재식이 다치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이 기사가 나가지 않는 것. 한재원이 원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 두려움도 같은 크기로 있었다.
그렇다면.
강민준은 눈을 떴다.


핸드폰을 들어 경찰에 전화했다.
"실종자 신고를 하고 싶습니다."
함재식의 이름, 마지막으로 머물었다는 주소, 오늘 연락이 끊긴 것. 짧고 명확하게 신고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기사를 썼다.
멈추지 않았다.
한재원이 설계한 판이 살아있었다. 그 판에서 강민준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끝까지 쓰는 것.
밤이 깊어갔다. 원고가 완성되어 갔다. 그리고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이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전과 배신과 최대 위기의 장이 시작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