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의 밤
자정이 넘었다.
원룸 안에는 노트북 화면의 빛만 있었다. 강민준은 커피를 세 잔 마셨다. 네 번째 잔을 옆에 두고 타이핑을 계속했다.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기사는 이미 기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이었다. 한재원이 죽음으로 시작한 이야기, 함재식의 젊은 직원이 도로에서 끝난 이야기, 서윤아가 계단에서 굴렀던 이야기,
그리고 일흔 셋의 노인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이야기. 그 모든 것이 활자가 되어야 했다. 활자가 되어야 진짜가 됐다.
강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 원고의 골격이 완성됐다. 총 이만 삼천 자. 탐사보도 기사로는 긴 편이었다. 하지만 한 글자도 뺄 수 없었다. 각 문단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완성된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수정했다. 불필요하게 날카로운 표현을 다듬었다. 사실과 추론의 경계를 명확하게 했다. 한무경의 증언은 직접 인용으로, 한상민의 자료는 문서 출처를 명기하는 방식으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단정적 표현들을 검토했다.
기자가 감정으로 쓰면 기사가 무기가 아니라 표적이 된다는 것을, 강민준은 십 년 동안 배웠다.
새벽 두 시 반, 퇴고가 끝났다.
강민준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완성됐다.
이 원고를 어디에 실을 것인가. 이혜정이 알아봐주기로 했지만 아직 연락이 없었다. 이 시간에 연락할 수는 없었다.
강민준은 국내 독립 언론 매체들을 머릿속에서 목록화했다.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온라인 매체, 언론 자유 지수가 높은 곳, 한성그룹 광고를 받지 않는 곳. 세 조건을 만족하는 매체가 두 개 떠올랐다.
《탐사와 기록》. 소규모 독립 언론이었지만 두 번의 한국기자상을 받은 곳이었다. 광고 수익 없이 구독료로만 운영했다.
또 하나는 《더 팩트 코리아》. 영문 병기 매체로 국내외 독자를 동시에 겨냥하는 곳이었다.
강민준은 두 곳의 편집장 이름을 알고 있었다. 직접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언론계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이였다.
내일 아침 이혜정과 상의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강민준은 원고 파일을 USB에 저장했다. 이메일 초안으로도 저장했다. 클라우드에도 올렸다. 세 군데에 백업했다. 원고가 지워지거나 탈취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그리고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함재식의 전화가 꺼진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하지만 경찰이 얼마나 빨리 움직여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경찰 라인에도 한재도의 손이 닿아있다는 것을 한무경이 말했다.
강민준은 눈을 감았다.
잠은 새벽 세 시 넘어서 왔다. 얕은 잠이었다.
꿈을 꿨다. 한재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꿈이었다. 육성 메시지와 같은 목소리. 하지만 꿈 안에서 그 목소리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강민준 옆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함재식 발견
새벽 다섯 시 사십 분,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준은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이 핸드폰을 향해 움직였다. 오랜 기자 생활이 만들어낸 반사였다. 새벽 전화는 무조건 받는다.
"강민준 기자님이십니까."
모르는 번호였다. 남자 목소리.
"네."
"마포경찰서 수사과 김형사입니다. 어젯밤에 함재식 씨 실종 신고하셨죠?"
강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네, 맞습니다."
"함재식 씨 발견됐습니다. 용산구 한남동 인근에서요. 지금 병원 이송 중입니다."
강민준은 침대 끝에 앉았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짧은 침묵.
"의식은 있습니다. 하지만 두부 외상이 있고 늑골이 두 개 골절됐습니다. 지금 응급처치 중이에요."
두부 외상. 늑골 골절.폭행이었다. 사고가 아니었다.
"어느 병원입니까."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입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빠르게 옷을 챙겼다. 재킷을 입으면서 이혜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함재식이 발견됐습니다. 폭행 당한 것 같습니다. 한강성심병원 응급실. 저 지금 갑니다."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강민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새벽이 아직 어두웠다. 가로등들이 빈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함재식이 폭행을 당했다.
어젯밤 전화가 생각났다. 기사를 쓰면 함재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던 목소리. 기사를 멈추지 않았고, 함재식이 다쳤다.
강민준은 그 연결을 외면하지 않았다. 직면했다.
자신이 멈추지 않은 것이 함재식을 위험하게 한 것인가.
아니면, 멈추었더라도 어차피 이렇게 됐을 것인가.
두 질문이 동시에 있었다.
그 어느 쪽도 지금 당장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은 새벽이었지만 분주했다. 강민준은 접수 데스크에서 함재식의 위치를 확인했다. 처치실에 있었다. 아직 일반 병실로 이동하기 전이었다.
형사가 접수 데스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십 대 초반, 피곤한 얼굴이었다.
"강민준 기자님이세요?"
"네."
"함재식 씨랑 어떤 관계세요?"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제보자입니다. 취재 중에 만났습니다."
"어떤 취재 건입니까."
강민준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 형사가 안전한 라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한무경이 경찰 라인에도 한재도의 손이 닿아있다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취재라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함재식 씨는 만나볼 수 있습니까."
형사가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단순한 의심이었다. 직업적 의심.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는 눈이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형사가 처치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5분 정도 됩니다."
강민준이 처치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함재식이 누워있었다. 이마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눈 주위가 부어있었다. 하지만 눈은 떠있었다.
강민준이 침대 옆에 섰다. 함재식이 눈을 들었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강함이었다. 몸이 다쳤지만 눈이 살아있었다.
"기사 썼소?"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함재식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행이오."
강민준은 그 두 글자에서 오래 머물렀다.
"제가 멈추지 않아서 이렇게 되신 겁니다."
"아니오." 함재식이 낮게 말했다. "내가 선택한 거요. 기자한테 자료를 넘긴 것도,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누가 했습니까."
"얼굴을 가렸소. 둘이었어요.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오."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나가면 이 분들도 수사 대상이 됩니다."
함재식이 입가에 아주 작은 것을 만들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작았지만,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어서 나가시오. 기사 마저 하시오."
강민준은 처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잠시 서 있었다. 형광등 아래 병원 복도가 하얗게 빛났다. 새벽의 병원은 낮의 병원보다 더 고요하고 더 날카로웠다.
강민준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함재식이 살아있었다. 다쳤지만 살아있었다. 그리고 기사를 쓰라고 했다.
강민준은 병원을 나섰다.
한상민의 귀환과 두 번째 배신
병원 밖에서 택시를 잡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한상민이었다.
"살아계십니까."
"네."
한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보다 더 지쳐있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 계십니까."
"지금 이동 중입니다. 기자님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한강성심병원 앞입니다."
"삼십 분 뒤에 도착하겠습니다."
강민준은 병원 입구 앞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건드렸다. 밤새 자지 못한 몸이 그 차가움에 조금 깨어났다.
강민준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삼십 분 후, 차 한 대가 병원 앞에 섰다.
한상민이 내렸다. 어젯밤 레스토랑에서 봤을 때와 달랐다. 수트 재킷이 구겨져 있었다. 넥타이가 없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강민준이 일어섰다.
"괜찮으십니까."
"네."
"함재식 씨가 폭행을 당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한상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자님을 찾아온 겁니다."
두 사람은 병원 인근 24시간 카페로 들어갔다.
새벽이라 손님이 없었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한상민이 재킷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강민준이 받았다. 열었다.
사진이었다. 여러 장. 선명한 사진이었다. 강민준은 첫 번째 사진을 보고 눈을 멈췄다.
사진 속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강민준이 알지 못하는 남자였다. 다른 한 명은.
이혜정이었다.
강민준은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혜정 팀장이 낯선 남자와 식당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가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이혜정이 봉투를 받고 있었다.
사진 뒤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삼 주 전.
"이 사람이 누굽니까." 강민준이 남자를 가리켰다.
"한성그룹 대외협력실 소속 직원입니다. 홍준기 실장 라인의 사람이에요."
강민준은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이혜정 팀장님이 한성그룹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는 겁니까."
"사진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강민준은 사진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혜정. 이 사건을 처음 강민준에게 맡긴 사람. 대표이사의 보류 지시에 맞서 강민준을 도왔던 사람. 한무경과의 만남에서 두 시간마다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
하지만 동시에. 한재원의 전화 내용을 처음 말하기를 주저했던 사람. 허윤서의 배신을 강민준에게 알리면서 직접 처리하겠다고 했던 사람. 오늘 아침 함재식이 발견됐다는 문자에 아직 답이 없는 사람.
강민준은 독심술을 활용해 이혜정의 눈을 읽어온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의 눈에서 악의를 읽은 적이 없었다. 두려움, 분노, 결심, 슬픔. 그것들은 읽었다. 하지만 거짓을 숨기는 눈의 패턴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독심술이 틀릴 수 있다는 것도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완벽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눈마저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혜정은 이십 년 기자였다.
"이 사진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저도 어젯밤에 받았습니다. 한재도 회장 측에서 보낸 겁니다."
강민준은 그 말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왜 한재도가 이것을 팀장님한테 보냈습니까."
"저를 흔들기 위해서요. 기자님 주변 사람들이 이미 매수됐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기자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겁니다."
강민준은 그 의도를 분석했다.
맞을 수 있었다. 한재도가 강민준의 취재 네트워크를 흔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진을 흘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혜정이 실제로 무언가를 받았는지 여부와 별개로, 강민준이 이혜정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만으로도 한재도에게는 이익이었다.
하지만.
삼 주 전. 그 날짜가 걸렸다.
한재원이 《한국시사주간》 대표이사에게 전화를 건 것이 열흘 전이었다. 그 전화 이후에 이혜정이 강민준에게 이 취재를 맡겼다.
그 사건이 있기 전, 삼 주 전에 이혜정이 한성그룹 직원을 만난 사진이 있었다.
시간 순서가 이상했다.
"한상민 씨, 이 사진이 조작된 것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 한재도는 그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강민준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식당 배경. 두 사람의 위치. 봉투를 건네는 각도. 이 사진이 진짜라면 감시 카메라 수준의 원거리 촬영이었다. 조작이라면 매우 정교한 조작이었다.
어느 쪽인지, 강민준은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사진을 가지고 이혜정을 의심하면, 강민준에게는 남은 아군이 없었다. 이혜정이 마지막 아군이었다.
강민준은 사진을 봉투에 넣었다.
"이 사진, 제가 갖겠습니다."
"가져가십시오."
"한상민 씨는 어젯밤 어디 계셨습니까."
한상민이 눈을 내렸다.
"한재도 회장한테 불려갔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셨습니까."
"네가 배신했다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한상민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재원이 때처럼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상민의 눈을 읽었다.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젯밤의 두려움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두려움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님한테 왔습니다."
"……네."
"왜요."
한상민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재원이가 선택한 사람이 기자님이었으니까요. 저도 같은 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 말이 카페 안에 놓였다.
강민준은 그 말 안에서 한상민의 내면을 읽었다. 복잡했다. 두려움, 죄책감, 결심.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것. 강민준이 한상민에게서 처음 읽는 것이었다.
신뢰.
강민준에 대한 신뢰가 그 안에 있었다.
원고를 막는 새로운 장벽
카페를 나온 것은 오전 일곱 시였다.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번 울렸다. 받았다.
"함재식 소식 들었어?"
이혜정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잠을 못 잔 목소리였다.
"네.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다행히 살아있어서. 나 지금 편집국 가고 있어. 오늘 중에 원고 실어줄 매체 연락됐어. 《탐사와 기록》 편집장이 오늘 오전에 보내주면 내일 새벽에 올려주겠대."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이혜정의 목소리. 지쳐있었다. 분주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없었다.
한상민이 가져온 사진을 강민준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팀장님, 오늘 아침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만날 수 있습니까."
"편집국으로 와. 근데 대표한테 걸리면."
"다른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공덕역 근처 카페 어떻습니까."
"알았어. 한 시간 후에."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서둘러 합정동 원룸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열었다. 원고 파일을 다시 확인했다. 이상 없었다. 클라우드에 업로드된 것도 확인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
여자 목소리였다. 차분하고 낮았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누구십니까."
"저는 법무법인 한성 소속 변호사입니다. 한성그룹 대리인으로 연락드립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댔다.
"무슨 일입니까."
"기자님이 현재 준비 중인 기사와 관련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기사가 공개될 경우, 기사에 등장하는 당사자들이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기자님께 한 가지 사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말씀하십시오."
"기자님이 취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 중 일부가 불법적으로 획득된 것입니다.
한무경 명예회장의 사저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명예회장의 정신 건강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것으로,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담당 주치의 소견서가 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손을 쥐었다.
정신 건강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
한무경의 증언을 무력화하려는 것이었다. 한무경이 치매나 인지 저하 상태였다고 주장하면, 그 증언은 법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됐다.
기사에 인용할 수 없게 됐다.
한무경과 마주했던 강민준은 그 사람이 온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이 살아있었다. 판단이 정확했다. 말이 일관성 있었다.
하지만 주치의 소견서가 있다면.
"주치의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소견서는 이미 법원에 제출됐습니다. 기자님이 이 기사를 강행하실 경우, 한무경 명예회장 측에서 기자님을 노인 보호법 위반으로 고소할 예정입니다."
"한무경 명예회장이 직접 요청한 겁니까."
"가족이 요청했습니다."
가족. 한재도였다.
한재도가 아버지를 이용해서 아버지의 증언을 막고 있었다. 한무경이 스스로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어제 만남에서 녹음까지 동의하며 기사에 담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려면 한무경의 현재 정신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이 먼저 입증되어야 했다.
그리고 한재도는 그 입증을 불가능하게 만들 소견서를 이미 법원에 제출했다.
강민준은 말했다.
"기사를 강행합니다."
"그러시면 법적 대응이 시작됩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강민준은 잠시 앉아서 생각했다.
한무경의 증언이 법적으로 무력화됐다. 기사에 인용은 할 수 있지만, 법원에서 이 증언이 공격받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무경의 증언에 기대지 않아도 기사가 성립하는가.
강민준은 원고를 다시 열었다.
한무경의 증언이 빠지면 어떤 기사가 남는가.
GV-3 계좌 자료. 기획재정부 차관보와의 자금 흐름. 동영상 원본 증빙 서류. 편의점 CCTV 영상. 함재식의 추적 기록.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 부검 예비 혈액 검사 결과.
한무경의 증언이 없어도 사건의 핵심은 남아있었다.
GV-3의 기원이 한무경이라는 것을 직접 언급하지 못하게 됐지만, 나머지 구조는 충분히 입증됐다.
기사는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재원이 원한 것, 이 구조의 뿌리를 드러내는 것은 절반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민준은 이혜정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한상민의 사진 문제도 정리해야 했다.
오전 여덟 시, 공덕역 근처 카페.
강민준이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다. 이혜정이 오 분 후에 들어왔다. 어제보다 얼굴이 더 수척해 보였다.
자리에 앉으면서 이혜정이 말했다.
"한상민이 살아있다는 거 확인했어. 다행이야. 근데 편집국에 들어오기 어려울 것 같아. 대표가 오늘 아침에 한성그룹 법무팀이랑 회의중이야."
강민준은 봉투를 꺼냈다. 사진을 꺼내 이혜정 앞에 놓았다.
이혜정이 사진을 보았다.
표정이 굳었다.
강민준은 그 굳음을 읽었다.
놀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을 본 사람의 놀람. 숨기려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사진을 처음 보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이게 뭐야."
"한상민이 어젯밤 한재도 측에서 받았다고 합니다."
이혜정이 사진을 들어 가까이 봤다.
"이 남자……." 이혜정이 멈췄다. "이 남자 알아. 한성그룹 쪽 사람이야. 삼 주 전에 우리한테 연락이 왔어. 한성그룹 내부에서 비리를 고발하고 싶다면서 만나자고. 나 혼자 나갔어."
"그래서요."
"나갔더니 이 사람이 봉투를 주더라고. 봉투 안에는 편지 한 통이었어. 한성그룹 관련 기사를 보류해달라는 요청이었어. 돈은 없었어."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이혜정의 눈을 읽었다.
진실이었다.
봉투 안에 돈이 없었고, 편지였다. 그것을 사진으로만 보면 매수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요청 편지였다.
한재도가 삼 주 전에 이혜정을 만나게 한 것은 이런 상황을 위한 포석이었다.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이혜정을 배신자처럼 보이도록 쓸 수 있는 패였다.
"팀장님, 저는 믿습니다."
이혜정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짧게 말하고 이혜정이 사진을 테이블에 놓았다.
"근데 이게 《탐사와 기록》 편집장한테 전달되면 우리 신뢰성에 타격이 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먼저 팀장님께 드리는 겁니다."
"어떻게 할 거야."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팀장님이 그날 만남을 공식적으로 기록해두셨습니까. 메모라든가 이메일이라든가."
이혜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메일에 그날 만난 것 적어두고 팀 공유 폴더에 넣어뒀어. 이상한 요청이 왔다는 것을 기록해둔 거야."
"그 기록이 있으면 사진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편집장한테 같이 보내자. 사진이랑 내 기록이랑."
두 사람은 카페에서 한 시간을 더 보냈다.
《탐사와 기록》 편집장에게 보낼 원고와 함께 제출할 보충 자료들을 정리했다. 사진과 이혜정의 기록, 한상민 자료 세 가지, 편의점 CCTV 영상 파일, 함재식의 추적 문서, 한재원의 육성 메시지 파일.
오전 아홉 시 반, 이혜정이 《탐사와 기록》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민준은 옆에서 들었다.
편집장이 받았다. 이혜정이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편집장이 물었다. 이혜정이 답했다.
전화가 끊겼다.
이혜정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후 두 시까지 원고와 자료 전체 보내달래. 편집장이 직접 검토하고 오늘 밤 결정하겠대."
강민준은 시계를 보았다.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네 시간이 남았다.
"됩니다."
오후 두 시 정각, 강민준은 원고와 자료 전체를 이메일로 발송했다.
수신인은 《탐사와 기록》 편집장 이름 앞으로. 이혜정이 소개한 공식 이메일 주소였다. 용량이 컸다. 영상 파일과 음성 파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송하는 데 사 분이 걸렸다.
전송 완료 알림이 떴다.
강민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보냈다.
십이 일. 한재원이 죽은 날부터 오늘까지 열이틀이었다. 그 열이틀 동안 서윤아가 계단에서 굴렀고, 박진수가 압박을 받았고, 함재식이 폭행을 당했고, 허윤서가 정보를 팔았고, 한무경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메일 한 통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강민준은 노트북을 닫았다.
이제 편집장의 판단을 기다려야 했다. 원고를 보냈다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편집장이 게재를 결정해야 했다. 법적 검토가 필요할 수도 있었다. 추가 확인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한재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들었다. 서윤아에게 전화했다.
"원고 보냈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안에 기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서윤아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요?"
"네."
또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서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조금 떨렸다.
"부회장님이 마음 편히 계실 수 있겠네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덕동의 오후 하늘이 흐렸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이혜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원고 발송했습니다. 편집장 결정 기다리겠습니다."
이혜정의 답이 왔다.
"알았어. 나도 기다릴게. 근데 민준아."
"네."
"오늘 밤 혼자 있지 마. 한재도가 다음에 어디를 건드릴지 모르니까."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 오후 두 시. 손님이 조금 있었다.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거리로 나오면서 주변을 읽었다. 이 골목, 저 골목. 지나가는 사람들. 서 있는 차들.
회색 SUV가 한 대 보였다.
골목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멈춰있었다. 강민준은 그 차를 지나치면서 유리창 안을 흘겨보았다.
사람이 있었다. 앞좌석에 남자 한 명. 핸드폰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미행이었다. 이제 숨기지도 않는 미행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한재도가 이제 조심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거나, 조심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거나.
강민준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편집장이 오늘 밤 게재를 결정하면 내일 새벽에 기사가 올라간다. 그 이후에는 한재도도 멈춰야 한다. 기사가 세상에 나간 뒤에 기자에게 직접 해를 가하면 그것은 사건의 증거가 됐다.
하지만 기사가 나가기 전에 한재도가 움직이면.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한상민에게 전화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태원 지인 사무실입니다. 어제부터 여기 있어요."
"혼자이십니까."
"네."
"오늘 밤 혼자 계시면 안 됩니다. 안전한 사람이랑 같이 계세요."
"……알겠습니다."
강민준은 전화를 끊었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함재식은 병원에 있었다. 서윤아는 동료 기자의 집에 있었다. 한상민은 이태원에 있었다. 한무경은 용인 고택에 있었다.
그리고 강민준은 공덕동 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회색 SUV가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강민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일.
내일 새벽에 기사가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까지 오늘 밤을 버텨야 했다.
그런데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탐사와 기록》 편집장 이름이 떴다.
오후 두 시 십칠 분. 원고를 보낸 지 고작 십칠 분이 지났다.
너무 빨랐다.
강민준은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 방금 원고 받았습니다."
편집장의 목소리는 낮고 명확했다.
"네."
"바로 확인했습니다. 한 가지 여쭤볼게요."
"말씀하십시오."
"한무경 명예회장의 증언, 녹음 파일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녹음에서 명예회장이 자신의 신원을 직접 밝히는 부분이 있습니까."
강민준은 한무경과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시작 부분에 한무경이 자신을 소개했다. 강민준이 이름을 확인하는 질문을 했고, 한무경이 직접 답했다.
"있습니다."
"법무 검토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한성그룹 측 주치의 소견서 문제는 저희가 대응할 수 있습니다. 명예회장이 자신의 신원을 직접 밝히고 녹음에 동의한 상황이라면, 소견서가 인터뷰 자체를 무력화하기 어렵습니다."
강민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게재하시겠습니까."
편집장이 잠시 침묵했다.
"오늘 밤 열두 시에 올립니다."
오늘 밤.
내일 새벽이 아니라, 오늘 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십팔 분.
아홉 시간 사십이 분이 남았다.
"감사합니다."
"기자님."
"네."
"이 기사, 한국 언론상 받을 겁니다." 편집장이 말했다. "살아서 받으세요."
전화가 끊겼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여전히 낮게 깔려 있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뒤에서 회색 SUV가 멈춰 있었다.
아홉 시간 사십 분.
그 시간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긴 아홉 시간이 될 것이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들어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두 번만에 받았다.
"함재식 씨, 병원에서 퇴원 가능하십니까."
"……왜요."
"오늘 밤 제 옆에 있어주십시오. 기사가 오늘 밤 열두 시에 나갑니다."
긴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함재식이 말했다.
"퇴원하겠소."
강민준은 전화를 끊었다.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회색 SUV가 따라왔다.
오늘 밤이 지나면.
전(轉)이 시작되는 것은 기사가 세상에 나간 뒤였다. 반전과 배신과 최대 위기. 강민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
하지만 알 것이었다.
오늘 밤 열두 시 이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