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귀 (Hepatica)(1)

봄의 첫 숨결

by 이 범

땅속의 기억
겨울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이른 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깊은 산자락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었다. 북쪽으로 향한 비탈에는 지난겨울의 흔적이 희끗희끗하게 남아 있었고, 낙엽 썩은 냄새와 얼음이 녹는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계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직 어떤 풀도 고개를 내밀지 않은 시간, 어떤 새도 완전한 봄의 노래를 시작하지 않은 그 경계의 시간에, 산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한결은 배낭을 조정하며 산길을 올랐다. 서른여섯 살의 식물생태학자. 국립생태원에서 파견 나온 연구원이었지만, 오늘은 어떤 공식적인 임무도 없었다.


그저 봄의 첫 신호를 찾아 혼자 이 산에 들어온 것이다. 매년 이맘때 그는 혼자 이 산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산의 특정한 비탈을 찾았다.

낙엽 참나무와 서어나무가 어우러진, 약간 완만한 경사면. 부엽토가 깊이 쌓인 그 자리.
노루귀가 피는 곳.


한결은 그 장소를 처음 발견한 것이 열아홉 살 때였다고 기억했다. 아버지 이덕수와 함께 처음으로 이 산에 올랐던 그 봄. 아버지는 산림청 공무원이었고, 주말마다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그 시절 한결에게 산은 그저 아버지를 따라가야 하는 의무의 공간이었다.




축구를 하고 싶었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낡은 등산화를 챙기며 아들을 깨웠다.


"한결아, 일어나라. 봄이 왔다."


그 말이 아버지의 입버릇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첫 봄 산행을 할 때면, 아버지는 반드시 그 말로 시작했다. 봄이 왔다. 아들아, 봄이 왔다. 그 말의 무게를 한결이 이해하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열아홉 살의 그 봄날, 아버지는 산길 옆 낙엽 더미를 조심스럽게 헤치며 한결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봐."
한결이 다가가자, 낙엽 사이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솜털이 빽빽하게 돋은 여러 개의 가느다란 줄기 위에, 작고 둥근 보랏빛 꽃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마치 작은 주먹처럼, 혹은 막 눈을 뜬 아이들처럼 하늘을 향해 있었다.


"노루귀야."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노루귀?"
"응.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 중 하나야.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피거든. 그리고 잎이 나오면 잎 모양이 노루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노루귀라고 불러."
한결은 쪼그리고 앉아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은 꽃받침이라는 것, 진짜 꽃잎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 순간에는 그저 그 작은 꽃의 색깔에 압도되었다. 보라색이라고 해야 할지, 파란색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자주색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미묘한 색깔. 이른 봄의 갈색 낙엽 위에서 그 색깔은 거의 초자연적으로 보였다.


"예쁘다."
한결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가 웃었다.
"그래. 예쁘지. 그런데 이 꽃이 얼마나 용감한지 알아?"
"용감해요?"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핀다. 땅 위에 아직 눈이 남아 있을 때도 핀다.


다른 꽃들이 아직 땅속에서 자고 있을 때, 이 꽃은 혼자서 먼저 나와서 피어."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뭔가 특별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열아홉 살의 한결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이 꽃을 단순한 식물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노루귀는 한결의 봄이 되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식물생태학을 공부했다. 논문 주제를 정할 때 지도교수는 더 실용적인 연구를 권했지만, 한결은 봄 식물의 개화 시기와 기후 변화의 관계를 연구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연구의 중심에는 언제나 노루귀가 있었다.

Hepatica asiatica. 동아시아 특산종. 한국, 일본, 중국 북부에 분포하는 작고 이른 봄꽃.
연구를 핑계로, 아니 연구의 일환으로, 한결은 매년 이 산의 이 비탈을 찾았다.


개화 시기를 기록하고, 개체수를 세고, 토양 온도를 측정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데이터는 핑계였다. 그는 단지 이 꽃을 보고 싶었다. 봄이 왔다는 것을 이 꽃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도 그랬다.
능선을 넘어 북사면으로 접어들자, 공기의 질감이 달라졌다. 더 차갑고, 더 습했다. 발 아래 낙엽이 아직 얼어 있어서 바스락거리지 않고 뭉개지는 소리를 냈다. 한결은 천천히 걸으며 낙엽 더미를 살폈다. 아직이었다.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아직 이른 것일까.


그때 바람이 불었다.
낙엽 몇 장이 날렸고, 그 사이로 뭔가 보였다.
한결의 발걸음이 멈췄다.
낙엽 사이, 작고 솜털 덮인 줄기 위에,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보랏빛 꽃봉오리 하나.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왔구나."
혼자 중얼거렸다. 그 말은 꽃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봄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혹은 오래전 여기서 함께 이 꽃을 보았던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한결의 아버지 이덕수는 삼 년 전 세상을 떠났다. 폐암이었다.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폐암이라는 사실이 모두를 황당하게 했지만, 의사는 라돈이 원인일 수 있다고 했다.


오래된 집, 오래된 산. 아버지는 담담하게 진단을 받아들였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봄이 되면 산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 봄에 아버지는 산에 가지 못했다.
병원 침대에서 창문 밖의 하늘만 볼 수 있었던 그 봄, 아버지는 한결에게 말했다.


"올해 노루귀 봤냐?"
"아직요."
"빨리 보러 가. 나 대신에도."
"같이 가요. 나으면."
아버지는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었는지, 한결은 그때 몰랐다.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지도.
아버지는 그해 여름에 세상을 떠났다.


노루귀가 지고, 산이 다시 초록으로 뒤덮인 그 여름. 한결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아버지의 눈이 천장 어딘가를 향했고,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한결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다만 나중에, 밤새 울고 난 아침에, 아버지가 '봄이 왔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한결의 봄 산행은 다른 의미를 가졌다.추모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었다. 다만 이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보여준 것을 계속 보는 것. 아버지가 사랑한 것을 계속 사랑하는 것. 그게 한결이 매년 이 비탈을 찾는 이유였다.


"실례합니다."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한결은 거의 반사적으로 돌아섰다. 산에서 갑작스러운 소리는 언제나 긴장을 불러온다.
산길 위쪽에서 한 여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등산복 차림이 어색한 여자. 배낭보다 어깨에 멘 커다란 천 가방이 더 눈에 띄었다.


천 가방에는 뭔가 평평하고 딱딱한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스케치북이나 화판 같은.
"혹시 이 꽃... 뭔지 아세요?"
여자가 물었다. 한결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리, 그 노루귀를 가리키며.
"노루귀요."


"노루귀요?"
"네. Hepatica asiatica.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에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눈이 꽃에 집중되었다.


한결은 그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 꽃을 제대로 보는 사람의 눈빛.
"와."
짧은 탄성이었다.
"솜털이 이렇게 많은 거 처음 봤어요."
"추위를 견디기 위한 거예요. 털이 단열재 역할을 해요."


"색깔이 정말..."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결은 그 침묵을 이해했다.


"표현하기 어려운 색이죠. 파랑도 보라도 아닌."
"맞아요. 정확하게 뭐라고 해야 할지. 제가 그림을 그리는데, 이 색을 어떻게 섞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제야 한결은 천 가방의 정체를 이해했다.


"화가예요?"
"그냥 그림 그리는 사람이에요. 화가라고 하기엔..."
여자가 쑥스럽게 웃었다.
"오 서진이라고 해요."
"이한결입니다. 국립생태원 연구원이에요."
"생태원요? 그럼 이 꽃 연구하세요?"
"노루귀 포함한 봄 식물 개화 시기를 연구해요. 기후 변화와 관련해서."


서진이 다시 꽃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꽃의 윤곽을 따라가는 시늉을 했다. 실제로 꽃을 건드리지는 않으면서.
"만지면 안 되죠?"
"안 만지는 게 좋아요. 솜털이 쉽게 손상돼서요."
"그럼 저는 눈으로만."


서진이 천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연필을 집고, 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한결은 잠시 보다가 자신의 조사를 계속했다. 개화 개체수를 세고, 위치를 메모하고, 토양 온도계를 꽂았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같은 꽃 앞에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그 꽃과 대화했다.


서진이 먼저 일어났다.
"고마워요. 이름 알려주셔서."
"자주 오세요? 이 산에."
"아니요. 처음 왔어요. 지인이 추천해줘서. 봄꽃이 예쁘다고."


"노루귀는 빨리 져요. 한 달도 못 가요. 제대로 보려면 이맘때가 딱이에요."
서진이 스케치북을 내려다보았다. 연필 스케치가 빠르게 그려져 있었다. 한결은 그 그림을 힐끗 보았다. 정확했다. 솜털의 방향, 봉오리의 각도,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꽃받침의 주름. 세밀하고 정확했다.


"그림 잘 그리시네요."
"아직 멀었어요. 실제 색을 담는 게 너무 어려워서. 수채화로 다시 그려볼 생각인데, 저 색을 어떻게 낼지..."
"울트라마린과 퀴나크리돈 바이올렛을 섞으면 비슷할 수 있어요."
서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아세요, 물감을?"
"대학 때 동아리 활동으로 수채화를 좀 했었어요. 오래됐지만."
서진이 웃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웃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감사해요."
그녀는 배낭을 메고 산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결은 다시 노루귀 앞에 앉았다. 바람이 불자 솜털이 흔들렸다. 작은 꽃봉오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뭔가를 더 말했어야 했나. 한결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엇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그는 고개를 흔들고 조사를 계속했다.
그 봄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서울로 돌아온 한결은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생태원의 연구실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혼자 집에 돌아와 책을 읽거나 논문을 검토했다.

서른여섯의 한결은 스스로의 삶이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복잡하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았다. 연구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연애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했다.

삼십대 초반의 짧았던 관계 이후로는 딱히 누군가를 만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외롭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봄날 산에서 만난 여자의 스케치가 자꾸 떠올랐다. 노루귀의 솜털을 정확하게 잡아낸 그 연필 선이. 그리고 저 색을 어떻게 낼지 모르겠다고 했던 그 말이.
한결은 그 생각을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 서서히 잊어갔다.


봄이 깊어졌다.
노루귀가 지고, 산에는 다른 봄꽃들이 이어서 피었다. 꿩의바람꽃, 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한결은 데이터를 계속 수집했다. 올해 노루귀의 개화 시기는 지난해보다 사흘 빨랐다. 십 년 전과 비교하면 열하루가 빨라졌다. 그 수치가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기후가 변하고 있었고, 꽃들은 그 변화에 반응하고 있었다.


한결은 그 데이터를 논문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태학적 의미, 생물다양성에 대한 영향, 식물 물상학의 변화. 숫자들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딘가 불완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숫자들이 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 꽃의 색깔, 그 솜털의 촉감, 이른 봄 아침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 꽃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


어떻게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다고 했던 서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름이 되었다.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왔다. 한결은 혼자 산소를 찾았다. 꽃을 가져갔다. 시장에서 산 흔한 꽃이 아니라, 들에서 뜯어온 작은 들꽃들을. 아버지는 화원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인위적이라고 했다.


산소 앞에 앉아 한결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해내려 했다. 마지막 순간의 얼굴이 아닌, 산에서 함께 노루귀를 보던 날의 얼굴. 기쁘고 따뜻하고 뭔가 깊은 것을 담고 있던 그 얼굴.
"아버지, 저 잘 있어요."


혼자 말했다.
"노루귀 올해도 봤어요. 열하루나 일찍 폈어요. 기후 변화 때문에. 아버지도 알고 있었나요? 이 꽃이 온도에 그렇게 민감하다는 거."
바람이 불었다. 산소 옆 억새가 흔들렸다.
"이 꽃을 처음 보여준 사람이 아버지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이 꽃이 아버지예요. 봄마다 이 꽃이 피면 아버지가 온 것 같아요."
바람이 잦아들었다.


한결은 일어섰다. 오래 앉아 있었다. 다리가 저렸다. 그는 산소를 한 번 더 내려다보고, 산길을 내려갔다.
가을이 왔다가 갔다.


겨울이 왔다. 노루귀는 땅속에서 자고 있었다. 한결은 그 비탈의 좌표를 알고 있었고, 그 자리를 생각할 때면 뭔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꽃은 거기 있다.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그 겨울, 한결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국립생태원 홈페이지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공지되었다. '생태 사진 및 예술 연계 전시회'. 연구자와 예술가가 협업하여 생태계를 주제로 한 전시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연구원들에게 협업 예술가를 신청받는다는 공고였다.


한결은 그 공고를 보았을 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프로젝트 담당자인 동료 김민지가 그를 찾아왔다.


"한결 씨, 이번 전시 참여 어때요? 봄 식물 연구하시잖아요. 딱인데."
"저 그런 거 잘 못해요."
"연구자가 직접 뭘 만드는 게 아니에요. 협업 예술가가 있어요. 같이 작업하는 거예요. 봄꽃 주제로 한 수채화 작가가 있는데, 생태학적 배경이 있는 연구자를 찾고 있어요."
"수채화요?"
그 단어가 한결을 멈추게 했다.


"네. 봄 식물 수채화. 과학적 정확성을 담으면서도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작가 이름이 오서진 씨예요."
한결은 잠시 멈추었다.


"오서진."
"아세요?"
"아마도."

솜털의 기억

오서진의 작업실은 서울 성수동의 낡은 건물 2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나무 문이 하나 있고, 문 위에 'O STUDIO'라고 흰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한결이 노크를 했다.

"잠깐만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오서진이 나왔다. 손에 물감이 묻어 있었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결을 보자 잠시 표정이 고정되었다가,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 눈빛으로 변했다.


"혹시..."

"이한결입니다. 생태원 연구원요."

"아! 노루귀요!"

서진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진짜 기쁨이 담겨 있었다.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하죠. 그날 이후로 수채화를 세 점이나 그렸는데요. 들어오세요."

작업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한쪽 벽 전체가 창문이어서 북쪽 빛이 들어왔다. 큰 작업 테이블 위에는 여러 장의 수채화가 놓여 있었다. 수십 개의 물감 튜브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크고 작은 붓들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노루귀 수채화가 세 점 걸려 있었다.

한결은 그 그림들 앞에 섰다.

그것들은 단순한 식물 세밀화가 아니었다. 정확하기는 했다. 솜털의 방향, 꽃받침의 수, 줄기의 구조, 모든 것이 식물학적으로 정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갈색 낙엽 위에서 피어오르는 그 작은 꽃들의 색깔이, 지난봄 그 비탈에서 직접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던 색깔을 서진은 결국 찾아낸 것이었다.


"색깔을 찾으셨네요."

"울트라마린이랑 퀴나크리돈 바이올렛을요."

서진이 웃으며 말했다. 한결도 웃었다.


"하지만 비율이 중요해요. 처음에는 계속 너무 진하게 나왔거든요. 노루귀 색은 짙은 것 같아도 실은 굉장히 투명하거든요. 그 투명함을 내려면 물을 아주 많이 희석해야 해요."

"투명하죠. 꽃받침이 빛을 담아서요."

"맞아요, 빛을 담아요. 아침에 역광으로 보면 거의 발광하는 것 같거든요."

"올해도 찍은 사진이 있어요."

한결은 배낭에서 태블릿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서진이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집중되었다.

"이 각도로 찍은 게 없었어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각도."

"바닥에 엎드려서 찍었어요."

"연구자가요?"

"식물 사진 찍을 때는 늘 그래요. 식물의 눈높이에서 봐야 제대로 보여요."


서진이 태블릿을 돌려 다시 보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노루귀. 하늘을 배경으로, 역광 속에서, 솜털이 빛을 산란시키며 반짝이는 그 사진.

"이 사진을 기반으로 작업해도 될까요?"

"그러시려고 저한테 연락하신 거 아닌가요?"

서진이 웃었다.

"맞아요. 그럼 협업 시작할까요?"

협업은 예상보다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한결은 노루귀에 대한 모든 생태학적 정보를 서진에게 제공했다. 개화 시기, 서식지 조건, 다른 봄 식물과의 관계, 수분 방법, 종자 산포 방식. 서진은 그 정보들을 흡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그림이 있었다.


서진의 그림은 단순히 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꽃이 살아가는 방식을 담으려 했다. 땅속 뿌리줄기부터 꽃봉오리까지, 성장의 전 과정을. 수분을 위해 찾아오는 초봄의 파리와 꽃등에를. 씨앗에 붙은 엘라이오솜이라는 기름 덩어리를 먹으러 오는 개미를.


"엘라이오솜이요?"

서진이 개미와 씨앗의 관계를 설명하자, 한결이 반색했다.


"알고 계세요?"

"오늘 처음 들었어요. 개미가 씨앗을 운반해준다는 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가요?"

"노루귀 같은 종산포 식물에게는 핵심이에요. 개미가 없으면 씨앗이 적절하게 분산되지 못해요. 그래서 개미와 노루귀는 공진화한 거예요.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서진이 스케치북에 뭔가를 빠르게 그렸다.


씨앗을 물고 가는 개미. 그 주변으로 노루귀 줄기들.

"이게 이야기가 되겠어요. 꽃만 그리는 게 아니라, 꽃의 관계들을."

"맞아요. 생태계가 그런 거니까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의 네트워크."

서진이 연필을 내려놓고 한결을 보았다.


"연구원님은 왜 노루귀를 연구하게 됐어요?"

질문이 갑작스러웠다.

한결은 잠시 망설였다.


"아버지가 처음 보여주셨어요."

"아버지가요?"

"어릴 때 산에 자주 데리고 다니셨는데. 노루귀를 보여주시면서, 이 꽃이 봄에 제일 먼저 핀다고. 용감한 꽃이라고."

서진이 조용히 들었다.


"지금도 그 아버지와 산에 가세요?"

"삼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

"매년 혼자 가요. 그게 저한테는... 아버지와 계속 연결되어 있는 방법이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이 다시 스케치북을 들었다.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결은 그녀가 그리는 것을 보지 않으려 했다.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보다 더 많이 알게 됐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할 만큼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할머니예요."

서진이 말했다. 여전히 그리면서.

"처음 수채화를 가르쳐주신 분이. 어릴 때 매주 토요일마다 할머니 댁에 가면, 마당에 앉아서 같이 그림을 그렸어요. 할머니가 수국이나 맨드라미 같은 마당 꽃들을 그리시면, 저는 옆에서 따라 그리고."


"할머니도..."

"칠 년 전에요. 저는 그때 대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고 있었는데. 그림이랑은 완전히 멀어져 있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다시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남기신 물감들이랑 붓들이 있었거든요."


서진이 연필을 멈추고 그 그림을 한결에게 보여주었다.

할머니와 손녀가 마당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스케치.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과 작은 아이. 그 사이에 꽃들.


"저도 이어가는 거예요. 다른 방식이지만."

한결은 그 그림을 오래 보았다.

"같네요."

"네. 같아요."

함께 작업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만남의 목적이 점점 불분명해졌다. 회의를 위해 만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만나기 위해 회의를 하는 것인지.


한결은 그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려 했다. 정의하는 순간 무언가가 달라질 것 같았다.


서진의 작업실에는 항상 커피가 있었다. 서진은 드립 커피를 내리는 데 시간을 들였다. 물의 온도를 재고, 커피 가루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물을 부었다.


한결은 그 과정을 보면서 서진이 모든 것에 그런 방식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림을 그릴 때도, 이야기를 들을 때도. 천천히, 주의 깊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한결 씨는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 있었어요?"

어느 날 서진이 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니요. 어릴 때는 이유를 묻는 아이였어요. 왜 이건 이래요, 왜 저건 저래요. 아버지가 그 이유를 알려주셨는데, 아버지의 대답이 항상 '자연이 원래 그래'였어요."

"'자연이 원래 그래'가 과학으로 이어졌어요?"

"처음에는 답답했어요. 왜 자연이 원래 그런지를 알고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이 원래 그런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이유들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예를 들면요?"

"노루귀가 겨울이 끝나기 전에 피는 이유요. 왜 그러는지 알아요?"

"추위를 좋아해서요?"

서진이 장난기 있게 대답했다. 한결이 웃었다.


"비슷해요. 이 시기에 경쟁자가 없거든요. 다른 식물들이 아직 잠들어 있을 때 피면, 수분 곤충들이 이 꽃만 찾아와요. 독점이에요."

"전략가네요."

"생존 전략이요. 그런데 그 전략이 너무 정교해요. 추위를 버티기 위한 솜털, 적은 빛으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잎의 구조, 온도에 정밀하게 반응하는 개화 시스템. 이게 다 수백만 년의 진화가 만들어낸 거예요."

서진이 듣다가 붓을 들었다.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그 전략성을. 용감한 게 아니라, 영리한 거잖아요."

"용감하면서 영리하죠."

"그래요. 둘 다."

그들은 함께 웃었다. 작업실 창문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왔다. 서진의 벽에 걸린 노루귀 그림들이 그 빛을 받아 환해졌다.

한 달이 지났다.


전시 준비가 구체화되었다. 서진의 노루귀 연작은 열두 점이 될 예정이었다. 꽃이 땅에서 나오는 것부터, 개화하고, 수분하고, 씨앗이 맺히고, 개미가 운반하고,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한 해의 노루귀 생애 전체를 담는 것이었다.


한결은 각 그림에 대한 생태학적 설명 텍스트를 쓰기로 했다. 과학적이면서도 일반 관람객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그것이 쉽지 않았다. 논문 언어와 일상 언어 사이 어딘가.

"너무 어렵게 쓰셨어요."

서진이 처음 초안을 읽고 말했다.


"어렵나요?"

"'수분 매개자의 방문 빈도가 개화 지속 시간과 정비례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꽃에 벌레가 많이 오면 오래 핀다는 거요."

"그렇게 쓰세요."

"그게 논문 언어가 아닌데."

"전시는 논문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읽는 거예요. 느끼는 거예요."

한결은 고쳤다. 다시 고쳤다. 서진이 읽고 또 고쳤다. 그 과정에서 한결은 자신이 오랫동안 쌓아온 지식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번역 과정에서 자신이 왜 이 꽃을 사랑하는지가 더 명확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글을 쓰는 동안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는 학자가 아니었지만, 이 꽃에 대해 가장 정확한 말을 했다. 용감한 꽃. 솜털 달린 줄기. 봄이 왔다. 그 단순한 언어들이 열아홉 살의 한결을 움직였다. 학술 논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


한결은 글을 다시 썼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겨울이 돌아왔다.

전시가 일 년 후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준비는 여유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결과 서진의 만남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전시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서진의 작업실에서 야근을 하다가 배가 고파 둘이 근처 식당에 갔다. 고깃집이었다. 고기를 구우면서 서진이 말했다.

"저 이 일이 너무 좋아요."

"그림요?"

"그림이랑 이 협업이요. 예전에는 혼자 그렸는데, 이렇게 다른 관점이 더해지니까 그림이 달라지는 느낌이에요."

"어떻게요?"

"예전에는 아름다운 것을 포착하는 게 목표였어요. 예쁘게, 잘 그리는 것. 근데 지금은... 아름다움의 이유를 이해하고 그리는 것 같아요. 노루귀가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이 색깔인지, 왜 지금 이 시기에 피는지. 그걸 알고 나서 그리면, 그냥 예쁜 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야기가 담기는 것 같아서요."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갔다.

"저도 달라진 것 같아요."

한결이 말했다.

"어떻게요?"

"오래 연구해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림으로 보니까 다르게 보여요. 서진 씨가 그린 노루귀가 제가 측정한 노루귀보다 더 진짜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리가요."

"진짜예요. 데이터는 정확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없거든요. 근데 서진 씨 그림에는 살아있어요."

서진이 고기를 집으면서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보는 게 다른 거겠죠. 한결 씨는 숫자와 구조를 보고, 저는 색과 빛을 보고. 근데 그게 사실은 같은 꽃이잖아요."

"맞아요. 같은 꽃."

그 말이 공기 중에 떠 있었다. 연기처럼.

한결은 그날 밤 집에 돌아가면서, 자신이 서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인식했다. 인식하고 나니,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인식이 곧바로 무언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결은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확신이 없을 때 먼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연구에서도 그랬다.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으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감정에서도 그랬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먼저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서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협업자? 친구? 아니면 그 이상?

서진은 언제나 따뜻하고 편안하게 그를 대했다.


그러나 그게 그 사람의 성격인지, 아니면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인지, 한결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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