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색깔에 대하여
두 번째 봄이 왔다.
한결은 다시 인제의 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전시를 위한 현장 사진 촬영을 겸해서, 서진과 함께였다.
산을 오르는 서진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익숙한 모습이었다. 배낭도 적절하고, 등산화도 새것이었다. 그 사이에 여러 산을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봄꽃 보러 다녔어요?"
"네. 바람꽃 보러 가기도 하고, 복수초 보러도 가고. 이제 봄 산행이 좋아졌어요."
"봄 식물들을 그리면서요?"
"그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도요. 이른 봄 산에 오면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아직 잎이 없어서 빛이 바닥까지 내려오고, 공기가 차갑고. 그 안에서 이렇게 작은 꽃들이 피어있는 거 보면."
"그 느낌을 아세요."
"알죠. 당연히."
비탈에 접어들었다. 한결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다가 멈췄다. 낙엽 사이에서 솜털이 보였다.
"여기예요."
서진이 다가왔다. 그리고 멈췄다.
작년에 하나였던 개체 옆에, 올해는 여러 개가 함께 올라와 있었다. 각각 다른 단계였다. 아직 봉오리인 것, 반쯤 열린 것, 활짝 핀 것. 이른 아침의 사광이 비탈을 가로질러 그 꽃들을 비추고 있었다.
서진이 말이 없었다. 한결도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서진이 카메라를 꺼냈다. 한결은 생태 조사를 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한동안 그 꽃들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 무렵, 능선 아래쪽 양지바른 곳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한결 씨,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왜 이제까지 혼자 살았어요?"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
"너무 개인적인가요? 안 대답해도 돼요."
"아니, 그냥...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정말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됐고. 그 전에도 특별히 적극적으로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일이 바빴고."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서진이 조용히 말했다.
한결이 그녀를 보았다. 서진은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얼굴.
"맞아요. 그것만은 아니에요."
"뭔데요?"
한결은 잠시 생각했다. 말로 정리해본 적이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 할 때의 느낌.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실수하는 게 두려웠어요. 사람에 대해서. 충분히 알기 전에."
"충분히 안다는 게 어느 정도예요?"
"..."
"연구자 스타일이네요. 데이터가 충분히 모이기 전에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한결이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비효율적이죠."
"아니에요. 신중한 거죠."
서진이 이제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저는요, 반대예요. 너무 빨리 뛰어들었다가 다쳤어요. 한번요."
"..."
"삼 년 전요. 그래서 그림에만 집중하면서 지냈어요.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는데."
서진이 말을 잠깐 멈췄다.
"작년에 이 산에서 한결 씨 만났을 때, 뭔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한결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다른 느낌이요."
"응. 그냥... 같은 걸 보는 사람이다 싶었어요.
같은 방향을 보는."
"저도요."
말이 나오기 전에 입이 먼저 열렸다.
"저도 그랬어요. 처음 만났을 때."
서진이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서요."
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크게. 산에 그 웃음이 퍼졌다.
"지금은요?"
"지금은... 충분한 것 같아요."
그러나 그 봄날의 솔직한 대화 이후에도, 둘의 관계는 예상처럼 매끄럽게 발전하지 않았다.
한결과 서진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저녁 약속을 잡은 것은 그 산행 이후 삼 주가 지나서였다. 그날 저녁은 좋았다. 밤늦게까지 이야기했고, 헤어지면서 서로 웃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서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결 씨,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만난 카페에서 서진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이에요?"
"일이요.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서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영국 에든버러의 예술가 레지던시. 여섯 달. 출국은 두 달 후.
"잘됐네요."
한결은 그 말을 하면서 뭔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서진에게 좋은 일이고, 진심으로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좋은 거잖아요."
"지금 이 타이밍에."
서진이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전시는 내년이고, 거기 있다가 돌아오면 되고."
"그럼 되죠."
한결이 말했다. 그러나 그 '그럼 되죠'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여섯 달. 먼 거리. 새로운 환경에서의 새로운 사람들. 그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한결 씨."
"응."
"기다려줄 거예요?"
서진이 물었다. 직접적이었다. 서진답지 않게, 아니면 서진답게.
한결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네."
한 단어였다.
서진이 웃었다. 살짝 눈이 붉어진 것 같은 웃음.
"고마워요."
서진이 출국했다.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에든버러 도착했다고. 비가 온다고. 날씨가 서울보다 훨씬 춥다고.
한결은 답장을 했다. 조심히 잘 지내라고.
거기서도 봄꽃 피면 알려달라고.
서진이 에모티콘을 보냈다. 꽃 모양.
연락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서너 번, 때로는 열흘씩 잠잠했다가 갑자기 긴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강도가 높다고 했다. 다른 나라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그러나 자극이 된다고. 그림이 변하고 있다고.
한결은 서진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그녀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성장이 기쁜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있었다. 성장이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
여름이 지나갔다.
한결은 연구에 집중했다. 기후 변화와 봄꽃 개화 시기에 대한 논문을 마무리하고 제출했다. 국제 학술지에서 게재 승인이 났다. 동료들이 축하했다. 한결은 기뻤지만, 그 기쁨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이 서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발견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그 여름의 한가운데,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
서진이 아니었다. 서진의 언니라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진이 친구분이세요?"
"... 네, 함께 작업을 하고 있어요."
"서진이 많이 얘기했어요. 한결 씨라고. 제가 갑자기 연락드려서 실례인데, 서진이 요즘 연락이 잘 안 돼서요."
"레지던시가 바쁜 것 같던데."
"그것도 그렇고... 사실 서진이 거기서 좀 힘든 것 같아요. 직접 얘기를 안 해서 정확히는 모르는데, 가끔 전화할 때 목소리가."
한결은 잠시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해볼게요."
그날 밤, 한결은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차를 계산하니 에든버러는 오후였다.
서진이 받았다.
"한결 씨."
목소리가 달랐다. 평소보다 낮고, 조금 잠긴 것 같은.
"어때요?"
"그냥 그래요. 괜찮아요."
"거짓말 같은데요."
서진이 잠깐 침묵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가 다르니까."
긴 침묵이 있었다.
"여기 작업이 너무 어려워요. 다른 작가들이 너무 좋아서, 제가 너무 작게 느껴져요. 뭘 그려야 하는지 모르겠고."
"슬럼프요."
"그런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노루귀 연작을 하면서 방향이 있었는데, 여기 와서 새로운 걸 시도하다 보니까 잃어버린 것 같아요."
한결은 잠시 생각했다.
"서진 씨."
"응."
"거기 봄이에요?"
"아직 여름인데요."
"맞다, 시차 때문에 헷갈렸어요. 근데, 에든버러에도 노루귀가 있어요."
"진짜요?"
"Hepatica nobilis. 유럽종이에요. 한국 노루귀랑 다른 종이지만 같은 속이에요. 봄에 피어요. 거기 숲이나 공원에서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봄에요? 지금은 없겠네요."
"지금은 없죠. 하지만 봄이 오면 나와요. 거기서 봄을 기다려 봐요. 한국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그리고 나면 뭔가 달라질 거예요."
잠시 침묵.
"한결 씨."
"응."
"고마워요."
"괜찮아요. 그거 찾으면 사진 보내줘요."
서진이 웃었다. 전화 너머로도 알 수 있는 웃음.
"보낼게요."
가을이 왔다.
서진에게서 에든버러의 가을 사진이 왔다.
낙엽이 물든 공원, 오래된 돌 건물들, 회색 하늘. 그리고 메시지.
"다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어요. 그림 소재가 달라졌어요. 노루귀만이 아닌, 거기서 본 것들도 들어가고. 근데 이상하게 한국 노루귀 생각이 많이 나요."
"당연한 거예요."
"응. 뿌리는 그대로니까."
겨울이 왔다.
서진이 돌아오는 것은 다음 해 봄이었다. 레지던시가 예상보다 두 달 연장됐다. 한결은 그 연장 소식을 듣고 순간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정리했다. 좋은 이유로 연장된 것이었다. 서진의 작품이 레지던시 운영자들의 인정을 받아서, 추가 전시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한결은 '잘됐네요'라고 답장했다. 이번에는 그 말이 조금 더 편하게 나왔다.
그 겨울, 한결은 뭔가를 결심했다.
봄이 오면 노루귀가 핀다. 그 꽃이 기다리지 않듯이. 추위 속에서, 아직 땅이 얼어있는 채로, 그냥 나온다. 준비가 됐을 때가 아니라, 나와야 할 때.
한결은 서진이 돌아오면, 충분히 알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겨울의 끝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서진에게서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한결 씨, 나 여기서 만난 사람이 있어요."
봄이 왔다
그 메시지를 읽은 것은 밤이었다.
한결은 휴대폰을 놓고 창밖을 보았다. 서울의 밤. 가로등 불빛들. 아직 겨울이었다.
'만난 사람이 있어요.'
그 다음 문장을 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코틀랜드 작가인데. 같은 레지던시에 있어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걸 한결 씨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결은 오랫동안 그 메시지를 보았다.
감정이 여러 겹으로 있었다. 첫 번째는 아픔.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아픔. 두 번째는 자신에 대한 화.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냥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세 번째는, 역설적으로, 서진에 대한 이해. 서진은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답장을 쓰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잘됐네요. 좋은 사람이면.'
보내고 나서 한결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봄이 되면 노루귀가 핀다. 그 꽃은 기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결국 기다리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면, 처음부터 둘의 계절이 맞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한결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뭐라고 했을까.
봄이 왔다.
아들아, 봄이 왔다.
서진이 돌아온 것은 그 다음 해 봄이었다.
전시 준비는 계속 진행됐다. 서진과 한결의 협업 작품은 예정대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것과 직업적인 것을 분리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한결은 분리하려 노력했다고 말할 것이다.
서진이 돌아온 뒤 처음 만난 것은 작업실이었다.
서진은 반 년 사이에 달라져 있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가 달랐다.
작업 방식이, 이야기하는 방식이.
"한결 씨, 오래 기다렸죠."
서진이 먼저 말했다.
"아니에요."
"미안해요."
"미안할 게 없어요. 제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못 했으니까."
서진이 한결을 보았다.
"그사람은 어떻게 됐냐고 묻지 않을 거예요?"
"궁금하긴 한데, 제가 물어볼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예요."
한결은 잠시 서진을 보았다. 그 말에 담긴 것들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데이터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서진 씨, 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응."
"오래 전부터요. 산에서 같이 노루귀 봤을 때부터."
"나도 알아요."
"알고 있었어요?"
"알았죠."
"그럼 왜."
서진이 잠시 웃었다.
"나도 무서웠어요. 다시. 그래서 도망갔는지도 몰라요. 에든버러로. 그 사람도 그 도망의 일부였고."
한결은 그 말을 이해했다.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는 것.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서진은 다른 무언가로 달려가는 것으로.
"지금은요?"
"지금은 덜 무서워요. 거기서 혼자 봄을 기다리면서."
"노루귀 봤어요? 유럽종."
"봤어요. 3월에. 스코틀랜드 식물원에서."
"어땠어요?"
"한국 거랑 달랐어요. 꽃받침 수도 다르고, 색도 조금 달라요. 그런데 같은 거 있어요."
"뭐가요?"
"그 느낌이요. 이른 봄에 혼자 피어있는 그 느낌. 낙엽 속에서."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씨 말이 맞았어요."
"뭐가요."
"봄을 기다리면 뭔가 달라진다는 거."
둘은 잠시 침묵 속에 있었다.
한결이 먼저 말했다.
"밥 먹으러 가요."
서진이 웃었다.
"응."
전시는 그해 늦가을에 열렸다.
제목은 '봄의 첫 호흡'이었다. 서진의 노루귀 연작 열두 점과, 에든버러에서 작업한 새로운 그림들이 함께 걸렸다. 한결의 텍스트가 각 작품 옆에 놓였다. 과학적 정보와 개인적인 기억이 뒤섞인 글들.
오프닝 날, 전시장이 가득 찼다.
한결은 전시장 한쪽에서 관람객들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서진의 그림 앞에 멈추었다. 노루귀 앞에서. 그림 속 꽃의 색깔이 조명을 받아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을 서진은 결국 완벽하게 담아냈다.
서진이 다가왔다.
"어때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논문 제목도 생각했어요?"
한결이 웃었다. 전시를 위한 텍스트 작업을 하면서, 언젠가 일반인을 위한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진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봄의 과학이라고 할까요."
"노루귀의 과학이라고 하세요."
"그게 더 구체적이긴 한데."
"구체적인 게 좋아요. 막연한 것보다."
한결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구체적인 게 좋아요."
서진이 웃었다.
전시가 끝난 후 겨울이 왔다.
한결과 서진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고,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관계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특별한 선언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어느 저녁, 서진의 작업실에서 서진이 그림을 그리고 한결이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서진이 잠시 붓을 놓고 한결에게 말했다.
"한결 씨 아버지, 어떤 분이었어요?"
한결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
"왜요?"
"그냥 궁금해서. 노루귀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까."
한결은 잠시 생각했다.
"조용한 분이었어요. 말수가 많지 않으셨는데, 산에 가면 항상 뭔가 얘기를 해주셨어요. 꽃 이름, 나무 이름, 왜 여기는 이 식물이 많고 저기는 저 식물이 많은지. 교과서처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분이셨겠다."
"좋은 분이셨어요."
잠시 침묵.
"저는 아버지한테 뭘 물려받은 것 같아요. 관찰하는 것. 지나치지 않고 멈춰서 보는 것."
"그게 연구자가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맞아요. 그리고... 그게 서진 씨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뭐가요?"
"노루귀 앞에서 말을 잃었을 때. 그게 멈춰서 보는 사람이다 싶었어요."
서진이 조용히 웃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멈추는 거예요. 멈추지 않으면 기억 못하니까."
"저는 연구자라 멈추는 거고요."
"방식이 달라도 같은 이유네요."
"응."
서진이 다시 붓을 들었다. 한결이 다시 책을 폈다.
작업실에는 조용한 소리들만 있었다. 붓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소리.
봄이 또 왔다.
한결은 인제의 산을 찾았다. 이번에도 서진과 함께였다. 비탈에 접어들었을 때, 또다시 낙엽 사이에서 솜털이 보였다.
"여기예요."
한결이 말했다.
서진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꽃의 윤곽을 따라갔다. 실제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매년 봐도 매번 새로운 것 같아요."
"같은 꽃이지만 매년 다른 봄이니까요."
"아버지가 이 꽃 보면서 뭐라고 하셨어요?"
한결이 노루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봄이 왔다고요."
"봄이 왔다."
서진이 그 말을 조용히 반복했다.
"그 말이 많은 걸 담고 있네요."
"네. 그 말이 많이 담고 있어요."
바람이 불었다. 노루귀의 솜털이 흔들렸다.
이른 봄 아침의 빛이 비탈을 가로질러 그 작은 꽃들을 비추었다.
보라도 파랑도 아닌, 그 표현하기 어려운 색깔.
그러나 이제 한결은 알았다. 그 색깔이 어디서 오는지. 빛을 담는 반투명한 꽃받침에서. 이른 봄의 차가운 공기에서. 갈색 낙엽이라는 배경에서. 그리고 이 꽃을 처음 보여준 사람의 기억에서.
"아버지한테 말하고 싶어요."
한결이 혼자 조용히 말했다.
봄이 왔다고.
아버지가 심어준 씨앗이, 다른 곳에서도 피고 있다고.
그해 여름, 한결은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 서진은 그 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루귀만이 아니었다.
모든 봄꽃들. 꿩의바람꽃, 복수초, 현호색, 얼레지. 각각의 이야기와 각각의 색깔.
책은 과학책이자 개인적인 기억의 책이자 어쩌면 작은 사랑 이야기이기도 했다.
편집자는 대중적으로 팔리기 어렵겠다고 했다. 너무 전문적이지도 않고, 너무 감성적이지도 않고. 한결은 괜찮다고 했다.
"팔리려고 쓰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쓰세요?"
한결은 잠시 생각했다.
"계속되게 하려고요."
겨울이 왔다가 또 봄이 왔다.
한결과 서진은 결혼했다. 봄에. 인제의 그 산 아래 작은 카페를 빌려서,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식에서 꽃은 노루귀가 아니었다.
노루귀는 꽂을 수 있는 꽃이 아니니까. 들에서 가져온 다른 봄꽃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아버지의 사진이 작은 액자에 담겨 테이블 한쪽에 있었다.
한결은 식이 시작되기 전 잠시 그 사진 앞에 섰다.
봄이 왔어요, 아버지.
몇 해가 더 지났다.
한결의 책이 나왔다. 제목은 결국 '봄이 왔다'가 됐다. 서진의 그림이 들어가 있었다.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작은 책이었다. 큰 서점보다는 독립 서점에서, 식물원 기념품 가게에서, 국립공원 방문자 센터에서 팔렸다.
책을 산 독자 중 한 명이 온라인에 리뷰를 남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봄에 산에 혼자 갔다가 이 꽃을 발견했어요. 이름도 몰랐는데, 나중에 이 책을 읽고 노루귀라는 걸 알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울었어요.'
한결은 그 리뷰를 서진에게 보여주었다.
서진이 읽고 조용히 말했다.
"계속되네요."
"응. 계속되네요."
그 봄에도 노루귀는 피었다.
인제의 그 비탈에, 낙엽 사이에서, 솜털 달린 줄기 위에. 아직 다른 꽃들이 나오기 전에, 혼자서. 보라도 파랑도 아닌, 빛을 담은 그 색깔로.
땅 위에는 아직 잔설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솜털이 흔들렸다.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