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과 공부
1961년, 격변과 공부
연말 - 승국의 과외 시작
12월 중순.
외할아버지 김학두가 계민을 불렀다.
"계민이."
"네, 장인어른."
"승국이 말인데."
"네?"
"그 아이, 똑똑하더구먼."
김학두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한문도 잘 배우고, 산수도 잘하고."
"...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그래."
김학두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학교 교육만으로는 부족해."
"......"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는."
계민은 장인의 말을 경청했다.
"승국이한테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과외를 붙여주게."
"과외요?"
"그래. 영어랑 산수를 집중적으로."
계민은 잠시 생각했다.
'과외...'
'돈이 들겠지.'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장인이 승국을 위해 하는 제안이었다.
"알겠습니다."
"자네가 돈 걱정하는 거 아나?"
김학두가 웃었다.
"내가 도와줄게. 선생님 구하는 것도, 비용도."
"장인어른..."
"승국이는 우리 집안의 보배야."
"제대로 교육받아야 해."
"... 감사합니다."
며칠 후.
외삼촌 김규승이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매형, 선생님 모셨습니다."
젊은 여자였다.
스물여섯쯤 되어 보였다.
안경을 쓰고, 깔끔한 옷차림.
"안녕하십니까. 이정수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광주에서 사범대학을 나왔습니다."
"교육대학교요?"
"네. 영어 전공입니다."
계민은 젊은 선생을 살폈다.
진지하고 성실해 보였다.
"승국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승국이 불려 나왔다.
"승국아,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안녕, 승국아."
이정수가 무릎을 굽혀 승국과 눈을 맞췄다.
"나는 이정수 선생님이야."
"......"
"앞으로 선생님이 영어랑 산수를 가르쳐줄 거야."
"네, 선생님."
"열심히 할 수 있겠니?"
"네!"
승국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첫 과외 수업
그날 저녁.
이정수 선생이 첫 수업을 시작했다.
계민이 마련한 작은 서재에서.
"승국아, 영어 알아?"
"아니요."
"그럼 오늘부터 배우자."
이정수가 칠판에 알파벳을 썼다.
A, B, C, D...
"이게 영어의 기본이야. 알파벳."
"알파벳..."
"하나씩 따라 해 볼까?"
"네!"
"에이."
"에이."
"비."
"비."
승국은 집중했다.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알파벳을 배웠다.
"잘했어, 승국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음 시간에는 간단한 단어를 배워보자."
"네!"
수업이 끝나고.
이정수가 계민에게 말했다.
"승국이, 정말 똑똑합니다."
"그런가요?"
"네. 집중력이 대단해요."
"한 시간 내내 딴생각 하나 없이 집중했어요."
계민은 뿌듯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여덟 시까지.
이정수 선생이 와서 승국을 가르쳤다.
영어와 산수.
"승국아, 오늘은 단어를 배워보자."
"Apple. 사과."
"애플."
"Book. 책."
"북."
"Cat. 고양이."
"캣."
승국은 열심히 따라 했다.
산수 시간.
"승국아, 4학년 과정을 미리 배워보자."
"네!"
"분수 알아?"
"조금요."
"그럼 더 깊이 배워보자."
이정수는 꼼꼼하게 가르쳤다.
승국도 열심히 배웠다.
한 달이 지났다.
승국의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승국아, 영어 문장 읽어볼까?"
"네. This is a book."
"발음이 좋아졌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이 문장을 한국말로 해석해 볼까?"
"이것은 책입니다."
"맞아! 그럼 반대로, '저것은 연필이다'를 영어로 해봐."
승국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That is a pencil."
"대단하다!"
이정수가 감탄했다.
"산수 문제 풀어볼까?"
"네!"
승국은 4학년 문제를 척척 풀었다.
"대단하다, 승국아."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셨어요."
이정수는 뿌듯했다.
'이 아이는... 정말 특별해.'
외삼촌들의 격려
어느 날, 외삼촌 김원태가 찾아왔다.
"승국아, 과외 어때?"
"재미있어요, 외삼촌."
"영어 배우니까 어때?"
"신기해요. 다른 나라 말이잖아요."
"그렇지. 나중에 크면 영어 잘하면 좋아."
"네!"
김규승도 격려했다.
"승국아,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네, 외삼촌."
"우리가 비용 대는 거니까."
"... 감사합니다."
"고마워하지 마. 네가 잘 되는 게 우리 기쁨이야."
승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삼촌들이...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잘해야 해. 기대에 부응해야 해.'
남평과 백수에서 온 소식
며칠 후.
남평에서 정화 이모가 편지를 보냈다.
"언니, 승국이가 과외를 시작했다고 들었어. 호영이(남편 백호영)가 선생이라 그런지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승국이 잘 가르쳐. 우리 아이들한테도 책 사주고 있어."
백수에서도 복화 이모가 편지를 보냈다.
"언니, 승국이가 똑똑하다던데 과외까지 시작했다니 대단하네요. 화상이(남편 박화상)가 기자라 전국을 다니는데, 요즘 교육열이 대단하대요. 승국이 잘 키우세요."
민화가 편지들을 계민에게 보여줬다.
"동생들도 다 관심 가지고 있네요."
"가족이니까요."
"정화는 매형이 선생이라 교육에 관심이 많고."
"복화는 매형이 기자라 세상 돌아가는 걸 잘 아시나 봐요."
"그렇죠."
범현이의 질투
범현이가 형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형, 또 공부해?"
"응."
"매일매일 공부하네."
"해야지."
"나도 영어 배우고 싶어."
"너는 아직 어려."
"형만 선생님이 오잖아."
범현이가 입을 삐죽였다.
계민이 범현이를 불렀다.
"범현아."
"네, 아빠."
"형이 공부하는 거 부러워?"
"... 조금요."
"너도 크면 배울 수 있어."
"정말요?"
"그럼. 하지만 지금은 형이 먼저야."
"왜요?"
"형이 더 크니까."
"... 알겠어요."
범현이는 조금 섭섭했지만, 이해했다.
민화의 걱정
그날 밤.
민화가 계민에게 말했다.
"계민 씨, 승국이가 너무 공부만 하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숙제하고, 저녁 먹고 과외하고..."
"......"
"놀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외가에서 기대가 크잖아요."
"그래도..."
민화가 걱정스러웠다.
"승국이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요?"
"글쎄요."
계민도 걱정이 됐다.
"한번 물어볼까요?"
"그래요."
계민이 승국을 불렀다.
"승국아."
"네, 아버지."
"과외 힘들지 않니?"
"... 아니요."
"정말?"
"네. 재미있어요."
"친구들이랑 놀고 싶지 않아?"
승국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조금은 그래요."
"......"
"하지만 공부가 더 중요해요."
"왜?"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들도 제가 잘 되길 바라잖아요."
"......"
"그리고 저도 잘하고 싶어요."
계민은 아들을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승국아."
"네?"
"너무 무리하지 마."
"네, 아버지."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네."
하지만 계민은 알았다.
승국이 쉽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연말의 평가
12월 말.
이정수 선생이 계민을 불렀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네, 선생님."
"승국이가...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가요?"
"네. 제가 가르친 학생 중에서 가장 뛰어나요."
"... 과찬이십니다."
"아닙니다."
이정수가 진지하게 말했다.
"영어를 석 달 배웠는데, 해석과 영작 능력이 뛰어납니다."
"정말입니까?"
"네. 간단한 문장은 척척 해석하고,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것도 잘해요."
"......"
"산수도 4학년 과정을 거의 다 마쳤어요."
"이대로 가면 중학교 갈 때쯤엔 정말 뛰어난 학생이 될 겁니다."
계민은 뿌듯했다.
'우리 승국이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그날 저녁.
외할아버지 김학두가 찾아왔다.
"계민이, 이 선생한테 들었네."
"네?"
"승국이가 정말 잘한다고."
"... 과찬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선생님이 감탄하더군."
김학두가 흡족하게 웃었다.
"영어 해석과 영작이 뛰어나다면서?"
"그렇답니다."
"역시 우리 승국이야."
김학두가 계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키우고 있어. 계속 이렇게 해."
"네, 장인어른."
그날 밤, 일기를 썼다.
"1961년 12월."
"승국이가 과외를 시작했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이 선생님을 구해주셨다."
"이정수 선생님. 광주 사범대 영어과 출신."
"승국이가 정말 열심히 한다."
"영어도 배우고, 산수도 미리 배우고."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로 잘한다고 한다."
"특히 영어 해석과 영작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너무 공부만 하는 것 같아서."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다."
"하지만 승국이는 괜찮다고 한다."
"잘하고 싶다고 한다."
"외가 식구들의 기대를 알고 있는 것 같다."
"정화, 복화도 관심 가져준다."
"정화 매형은 선생이고, 복화 매형은 기자다."
"모두 승국이를 아낀다."
"어린 나이에... 이런 부담을."
"하지만 승국이는 강하다."
"잘 견뎌낼 것이다."
"우리가 잘 지켜봐야겠다."
민화가 방에 들어왔다.
"계민 씨, 아직 안 자요?"
"응, 일기 쓰고 있어."
"승국이 걱정돼요."
"... 나도."
"너무 어린 나이에 공부만 하잖아요."
"하지만 승국이가 원하는 것 같아요."
"정말요?"
"응. 아까 물어봤더니 자기가 잘하고 싶대."
"......"
"외가 식구들의 기대를 알고 있어."
"그게 부담이 될까 봐 걱정이에요."
"우리가 잘 지켜봐야죠."
"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았다.
1961년이 저물어갔다.
쿠데타의 해.
홍수의 해.
그리고 승국에게는 공부의 시작이었다.
외가 식구들의 기대.
남평의 정화 이모와 매형 백호영.
백수의 복화 이모와 매형 박화상.
영광의 외삼촌들 - 김영태, 김화태, 김규승, 김원태.
모두가 승국을 아꼈다.
승국은 그 기대를 안고 공부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묵묵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