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겨울 - 책과 빛
천재라는 이름
승국은 동네에서 유명했다.
"저 집 큰아들, 천 재래."
"국민학교 3학년인데 영어를 한대."
"산수도 4학년 거 푼다던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외가 식구들의 자랑도 컸다.
"우리 승국이가 말이야..."
외할아버지 김학두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선생님이 감탄할 정도래."
"영어 해석도 잘하고, 영작도 잘하고."
동네 사람들이 듣고 또 들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국이는 다르지."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이야기했다.
"똑똑하고, 성실하고."
"모범생이야."
하지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렇게 칭찬만 받으면..."
"교만해지지 않을까?"
"아이가 건방져질 수도 있어."
주유소에서도 손님들이 말했다.
"사장님 아들, 천재라던데요?"
"네... 과찬이십니다."
계민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조심하세요."
"너무 칭찬만 받으면 버릇없어질 수 있어요."
"... 명심하겠습니다."
계민도 걱정이 됐다.
'승국이가... 교만해지진 않을까.'
하지만 승국은 달랐다.
칭찬을 들어도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승국아, 너 정말 똑똑하구나!"
동네 아주머니가 말했다.
"... 감사합니다."
"앞으로 큰 사람 될 거야!"
"... 열심히 하겠습니다."
승국은 겸손하게 대답하고 지나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야, 승국아!"
친구들이 불렀다.
"너 영어 진짜 잘한대?"
"... 그냥 배우고 있어."
"선생님이 온대?"
"응."
"부럽다!"
승국은 자랑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할 일을 했다.
수업 시간엔 집중하고.
쉬는 시간엔 책을 읽고.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적당히 어울리고.
하지만 과하게 나서지 않았다.
"승국이는... 특이해."
친구들이 말했다.
"똑똑한데 건방지지 않아."
"그러게. 착하더라."
선생님도 감탄했다.
"승국이는 정말 모범생이야."
"성적도 좋고, 태도도 좋고."
"저렇게 칭찬받아도 교만하지 않네."
승국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다.
'칭찬은 고마운 거야.'
'하지만 그게 나를 만드는 건 아니야.'
'내가 노력해야 해.'
'더 잘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공부했다.
사람들의 평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만 했다.
모범학생으로.
계민의 선물
어느 날 저녁.
계민이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여보, 왔어요?"
민화가 맞았다.
"응."
"술 드셨어요?"
"조금... 주유소가 오늘 잘 됐어."
계민은 약간 취기가 있었다.
빰이 붉고, 걸음이 조금 흔들렸다.
"물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계민이 웃었다.
"승국이 어디 있어?"
"방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래? 잠깐 나오라고 해."
"왜요?"
"선물 사 왔어."
"선물요?"
민화가 놀랐다.
승국이 불려 나왔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그래, 승국아."
계민이 아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
"선물을 사 왔어."
"선물이요?"
"그래. 나 따라와."
계민이 승국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세요?"
민화가 물었다.
"문화사!"
"책방이요? 지금요?"
"응! 금방 올게!"
계민과 승국은 밤길을 걸었다.
읍내 큰길.
문화사 책방이 있었다.
영광에서 유일한 제대로 된 책방.
"아버지, 여기..."
"응. 책 사러 왔어."
"저한테요?"
"그럼. 네가 책 좋아하잖아."
계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이 반겼다.
"아, 계민 사장님!"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들 책 좀 사려고요."
계민이 승국을 가리켰다.
"아, 큰 아드님! 천재라고 소문났죠?"
"과찬이십니다."
"학원이라는 잡지 있습니까?"
"학원이요? 월간지 말씀이시죠?"
"네."
"있죠. 종합 교양 월간지잖아요."
"그거 주세요. 최근 것으로."
"몇 권 드릴까요?"
"있는 것 다요."
"네!"
주인이 책을 꺼냈다.
학원.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 교양 월간지.
문학, 역사, 과학, 시사...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계민이 서가를 둘러봤다.
"세계 사상대계 있습니까?"
"세계 사상대계요?"
주인이 놀랐다.
"전집 말씀이시죠?"
"네."
"그건... 상당히 어려운 책인데요."
"괜찮습니다. 주세요."
"정말요? 이건 철학 전집인데... 한 질이 열 권이 넘어요."
"네. 승국이가 똑똑하니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주인이 세계 사상대계 전집을 꺼냈다.
동양사상, 서양철학...
깊은 내용의 책들이 한 질로 묶여 있었다.
열다섯 권.
무거운 책들이었다.
"모두 합해서..."
"얼마죠?"
"전집이라... 오천 환입니다."
"여기요."
계민이 돈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배달해 드릴까요?"
"아니요, 들고 갈게요."
주인이 끈으로 책을 묶어줬다.
계민과 승국은 무거운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승국아."
"네, 아버지."
"이 책들, 네 거야."
"... 감사합니다."
승국이 책을 받았다.
무거웠다.
하지만 설렜다.
'새 책이다...'
'이렇게 많은 책이...'
'전집이야...'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학원 월간지.
최근 몇 단치가 있었다.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었다.
시, 소설, 수필, 논설...
'재미있을 것 같아.'
세계 사상대계 전집.
열다섯 권.
제1권을 펼쳤다.
동양사상 편.
어려운 한자가 많았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천천히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2권, 제3권...
서양철학 편.
'노력해 보자.'
'천천히, 하나씩.'
민화가 계민에게 말했다.
"계민 씨, 세계 사상대계 전집이요?"
"응."
"그건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 그럴까?"
계민이 갑자기 걱정됐다.
취기에 무리한 선물을 한 게 아닐까.
"승국이가 아직 어린데..."
"정신적 과부하가 올 수도 있어요."
"전집을... 다 읽으려면..."
계민은 아들 방으로 갔다.
"승국아."
"네, 아버지."
"그 책들... 너무 어려우면 안 읽어도 돼."
"... 괜찮아요."
"정말? 전집인데..."
"네. 천천히 읽어볼게요."
승국이 웃었다.
"한 권씩, 조금씩."
"감사합니다, 아버지."
계민은 안도하면서도 걱정이 됐다.
하지만 승국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특선의 빛
그 무렵, 영광의 전기 사정은 좋지 않았다.
일반선과 특선.
두 가지 전기 공급 제도가 있었다.
일반선은 자주 끊겼다.
특히 밤에.
"어머, 또 나갔네."
동네 집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촛불을 켜고, 호롱불을 켜고.
어둠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특선은 달랐다.
안정적으로 전기가 공급됐다.
돈을 더 내야 했지만, 끊기지 않았다.
계민의 집은 특선이었다.
주유소가 잘 돼서 여유가 있었다.
"우리 집은 전기가 안 나가네요."
민화가 말했다.
"다행이죠."
"네. 특선 신청하길 잘했어요."
밤이 되면 승국의 방에 불이 켜졌다.
책상 위의 전등.
환한 빛.
그 빛 아래서 승국은 책을 읽었다.
학원 월간지.
세계 사상대계 전집.
그리고 학교 교과서.
영어 교재.
산수 문제집.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
어려운 책도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 사상대계의 한자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읽었다.
제1권부터 시작했다.
'이건... 공자 이야기네.'
'인(仁)이라... 사람을 사랑하는 거구나.'
천천히, 조금씩.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어렵지만... 재미있어.'
학원 월간지는 더 재미있었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수필을 읽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구나.'
밤 열 시.
동네는 어두웠다.
일반선 집들은 전기가 나갔다.
하지만 승국의 방만 환했다.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했다.
"저 집은 전기가 안 나가나 봐."
"특선이래."
"부자네."
"저 아이가 천재라던 그 아이지?"
"맞아. 밤늦게까지 공부한대."
승국은 그런 소리를 몰랐다.
그냥 책을 읽었다.
전등 불빛 아래서.
어느 날 밤.
계민이 승국의 방문을 열었다.
"승국아, 아직도 안 자니?"
"... 아, 네."
승국이 책을 덮었다.
"뭐 읽고 있었어?"
"세계 사상대계 제2권이요."
"어려운 거 아니야?"
"조금요. 하지만 재미있어요."
"... 그래?"
계민은 아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승국아."
"네, 아버지."
"아버지가... 특선 전기를 신청한 거 알지?"
"네."
"돈이 좀 더 들어."
"... 죄송해요."
"아니야, 미안할 거 없어."
계민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공부하는 데 필요하니까."
"......"
"밤늦게까지 책 읽으려면 불이 있어야 하잖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승국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당연한 거야."
"......"
"너는 우리 아들이고, 잘 되길 바라니까."
승국은 그날 밤 깨달았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지.'
'특선 전기도, 과외 선생님도, 책도.'
'월간지도, 전집도.'
'다 아버지 덕분이야.'
'감사해야 해.'
'잘해야 해.'
마음속에 효심이 싹텄다.
아버지에 대한 감사.
그리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
전 - 혼자만의 시간
시간이 지나면서 승국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범현이는 아직 어렸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놀기 바빴다.
하경이, 희경이, 란경이는 더 어렸다.
의호 삼촌은 서울에 있었다.
친구들은 있었지만, 많이 어울리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왔다.
숙제를 하고.
저녁을 먹고.
과외를 받고.
그리고 혼자 책을 읽었다.
방 안에서.
전등 불빛 아래서.
조용히.
때로는 외로웠다.
'다른 애들은... 놀고 있겠지.'
'술래잡기하고, 구슬치기하고.'
하지만 책이 있었다.
학원 월간지를 읽으면 다른 세상이 보였다.
매달 새로운 이야기가 실렸다.
시인들의 시.
작가들의 소설.
학자들의 논설.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생각이 있구나.'
세계 사상대계 전집을 읽으면 더 깊은 세계가 펼쳐졌다.
제1권, 제2권, 제3권...
천천히 읽어나갔다.
공자의 인(仁).
맹자의 의(義).
노자의 도(道).
그리고 서양 편으로 넘어가면.
소크라테스의 대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어렵지만... 신기해.'
'이런 걸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책을 읽으면 외롭지 않았다.
책 속의 인물들이 친구가 됐다.
공자, 소크라테스, 시인들, 작가들.
그들이 승국에게 말을 걸었다.
전집을 읽는다는 것.
한 권 한 권 쌓아가는 것.
그것이 승국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제3권까지 읽었어.'
'다음은 제4권.'
'천천히, 끝까지 읽어보자.'
그렇게 승국은 자랐다.
혼자서.
책과 함께.
전등 불빛 아래서.
어느 날 밤.
민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계민 씨, 승국이가 너무 혼자 있는 것 같아요."
"... 그런가요?"
"네. 친구들이랑 안 놀고, 혼자 방에만 있어요."
"책 읽는다던데요."
"그래도... 아이가 너무 혼자 있으면..."
"......"
"외로울 것 같아요."
계민도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승국에게 물었다.
"승국아."
"네, 아버지."
"혼자 있어서 외롭지 않니?"
승국이 잠시 생각했다.
"... 가끔은 외로워요."
"......"
"하지만 책이 있어요."
"책?"
"네. 책을 읽으면 외롭지 않아요."
"... 그래?"
"책 속에 사람들이 있어요."
승국이 말했다.
"시인도 있고, 철학자도 있고."
"그들이랑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응?"
"전집을 읽는 게 재미있어요."
"전집?"
"네. 한 권씩 읽어나가는 거요."
"제3권까지 읽었어요. 이제 제4권 읽을 거예요."
계민은 아들을 보며 놀랐다.
'이 아이가...'
'벌써 이런 생각을...'
'전집을 읽어나간다고...'
"승국아."
"네?"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야."
"...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친구들이랑도 놀아야 해."
"... 네, 아버지."
"책도 중요하지만, 사람도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계민은 알았다.
승국이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책과 함께 사는 세계.
월간지와 전집.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세계.
그것이 승국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우리 아들이...'
'이렇게 자라고 있구나.'
그날 밤, 일기를 썼다.
"1961년 겨울."
"승국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승국이는 교만하지 않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모범적이다."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만 한다."
"오늘 승국이에게 책을 선물했다."
"학원 월간지와 세계 사상대계 전집."
"취기에 무리한 선물을 한 게 아닐까 걱정했다."
"특히 전집은... 어린아이가 읽기엔 너무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승국이는 기뻐했다."
"열심히 읽고 있다."
"벌써 제3권까지 읽었다고 한다."
"특선 전기 덕분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
"승국이가 감사해했다."
"효심이 싹트는 것 같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걱정도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외롭지 않을까."
"하지만 승국이는 괜찮다고 한다."
"책이 있다고."
"책 속의 사람들과 이야기한다고."
"전집을 한 권씩 읽어나가는 게 재미있다고."
"우리 아들이..."
"어느새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는 아이가 됐구나."
민화가 들어왔다.
"계민 씨, 아직도 일기 쓰세요?"
"응."
"승국이 걱정되죠?"
"... 조금."
"저도요."
"하지만 승국이는 강해요."
"그렇죠."
"우리가 믿어야죠."
"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았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1961년의 마지막 눈.
승국의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책 읽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묵묵하고, 혼자서.
하지만 외롭지 않게.
월간지와 전집과 함께.
한 권 한 권 쌓아가며.
그렇게 승국은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