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무게
수사의 본격화
한재도 회장이 검찰에 출두한 다음 날부터 세상이 빠르게 움직였다.
강민준은 그것을 편집국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지켜봤다. 편집국은 아직 들어가기 어려웠다. 대표이사가 강민준의 기자증을 공식 회수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이혜정이 법적으로 막고 있었지만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자증이 없어도 강민준이 할 일은 있었다.
이틀 동안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면 이랬다.
한재도 회장이 검찰에 출두했다. 변호인과 함께였다. 진술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협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박기태가 자수했다. 한재원 부회장 사망 당일 저택에 있었다는 것, 약물 복용을 목격했다는 것, 이후 부검 보고서 조작에 관여했다는 것을 진술했다. 강민준이 녹음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소환 조사 이틀 만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GV-3을 통한 43억 수수 혐의였다. 함재식이 3년에 걸쳐 추적한 자금 흐름이 수사의 핵심 근거가 됐다.
한성그룹 주가는 사흘째 하락 중이었다. 거래정지가 풀렸지만 시장은 냉정했다. 주요 계열사 대표들이 차례로 검찰에 참고인 소환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성그룹 광고를 주요 수입원으로 하던 여러 언론사들이 이 사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다음에는 더 직접적으로. 광고주가 흔들리면 보도 방향도 흔들린다는 것이,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했다.
강민준은 그 뉴스들을 읽으면서 함재식에게 문자를 보냈다.
"차관보 구속영장 청구됐습니다."
함재식의 답이 왔다.
"봤소. 감사히 받겠소."
그 짧은 문자가 강민준에게 닿았다. 3년을 혼자 들고 다닌 사람이 이제 그 무게를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민준은 노트북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한무경. 한상민. 그리고 서윤아.
이 세 사람과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민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을 생각했다.
용인이었다.
한무경의 법적 책임
용인 고택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연락 없이 왔다. 도착해서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집사가 나왔다. 강민준이 이름을 대자 집사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들어오십시오."
한무경은 같은 방에 있었다. 창가의 의자. 무릎 위의 담요. 소나무가 보이는 창.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무경의 얼굴이 더 수척해 있었다. 이틀 사이에 무언가를 소진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한재도가 출두했다는 것을. 박기태가 자수했다는 것을.
강민준이 자리에 앉았다.
"오실 줄 알았소."
한무경이 먼저 말했다.
"왜요."
"아직 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무경을 읽었다.
피로가 더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눈이 살아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고요함이 여전히 있었다. 체념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의 고요함.
"검찰에서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한재도 회장과 박기태의 진술이 회장님을 가리키게 될 겁니다."
"알고 있소."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무경이 창밖의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소나무는 수백 년 된 나무였다. 이 집보다 오래됐을 나무. 한무경이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있었던 나무.
"기자 양반, 내 나이가 일흔 셋이오."
"네."
"이 나이에 법정에 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소."
강민준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래도 서야 하오." 한무경이 창밖에서 강민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설계한 것이오. 내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오. 그 책임은 내가 져야 하오."
강민준은 그 말을 읽었다.
진심이었다. 이 사람이 이미 이 결정을 하고 있었다. 강민준이 오기 전에 이미.
"변호인은 구하셨습니까."
"어제 연락했소."
"한재도 회장과 같은 변호인은 이해충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으로 했소."
강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GV-3의 설계자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녹음이 기사에 담겼습니다. 검찰이 그것을 증거로 쓸 것입니다. 주치의 소견서 문제는 기사가 나간 뒤에 법적으로 대응했지만, 회장님이 직접 자수하시면 소견서 문제는 무의미해집니다."
"알고 있소."
"자수하실 겁니까."
한무경이 잠시 담요를 손으로 짚었다. 그 동작이 지난번보다 더 느렸다. 몸이 더 힘들어진 것이었다.
"검찰에 연락을 했소. 오늘."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출두 날짜를 잡았습니까."
"다음 주 월요일로 했소."
일 주일이 남았다.
"건강이 괜찮으십니까."
한무경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잠깐 무언가가 지나갔다. 감사함 같은 것이었다. 강민준이 법적 문제가 아닌 것을 물었다는 것에 대한.
"크게 나쁘지는 않소."
"출두하실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한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강민준이 일어서려는 순간, 한무경이 말했다.
"기자 양반."
"네."
"재원이 기일이 다음 달이오. 기자 양반이 시간이 된다면, 그날 와주겠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한재원의 기일. 이 이야기가 시작된 사람. 강민준이 한 번도 살아서 만나지 못한 사람.
"가겠습니다."
한무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준은 방을 나왔다.
마당을 걸어 대문을 나오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창 너머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상민의 처리
한상민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용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자였다.
"기자님, 오늘 제가 검찰에 출두했습니다. 진술을 마쳤습니다."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한상민이 자진 출두했다.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하지만 막상 받으니 다른 감각이 왔다. 이 사람이 검찰에 갔다는 것. 지금쯤 조사실에 앉아있을 것이라는 것.
강민준은 답을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상민의 답이 빠르게 왔다.
"기자님을 한 번 더 뵐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가 답했다.
"어디 계십니까."
"서초구 검찰청 근처 카페에 있습니다."
"한 시간 후에 가겠습니다."
서초구 카페에 도착했을 때 한상민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민준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렸다.
변화가 있었다.
처음 레스토랑에서 봤을 때의 한상민과 달랐다. 그때는 기름이 표면에 떠있는 눈이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도록 훈련된 눈.
지금은 달랐다.
닫혀있던 것이 열려있었다. 표면의 기름이 걷힌 것 같았다. 아래에 있던 것들이 올라와 있었다. 피로와 후회와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가벼움.
아주 작은 가벼움이었지만, 거기 있었다.
진술을 마친 사람이 느끼는 가벼움이었다. 오랫동안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것.
강민준이 맞은편에 앉았다.
"진술이 어떻게 됐습니까."
"모두 했습니다. 한재도 회장의 지시를 받았던 것, GV-3 운영에 관여했던 것, 박기태에게 지시를 전달했던 것.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변호인의 조언에 따른 겁니까."
"반은요." 한상민이 말했다. "반은 제 판단이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읽었다. 진실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상민이 커피잔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동작이 더 이상 정확하지 않았다. 훈련이 느슨해진 것이었다. 아니면 일부러 느슨하게 두는 것이었다.
"기자님이 처음 저를 만났을 때, 저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강민준은 그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피로를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원하지 않는 역할을 해온 사람의 피로를."
한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한재도 회장의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다 보면 기준이 흐려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눈 감고, 다음에는 더 큰 것을 눈 감고. 어느 순간 눈을 감는 것이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한재원 부회장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눈을 제대로 떴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있었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상민을 읽었다.
자기 분석이었다. 정확하고 냉정한. 이 사람이 스스로를 보는 방식이 지금 달라져 있었다.
"기자님한테 드릴 말씀은 이겁니다." 한상민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기자님 기사에 제 이름이 담겼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저는 이름이 담겨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하십시오."
"저는 한재원 부회장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큼은 기사에서 명확히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지 않았다. 그 사이 어딘가에 한상민이 있었다.
"기사에는 사실을 씁니다. 팀장님이 한재도 회장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 박기태에게 전달했다는 것, 한재원 부회장의 직접 죽음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사실이면 그렇게 씁니다."
한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두 사람은 잠시 더 앉아 있었다.
강민준이 일어서면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한상민 씨."
"네."
"처음 저한테 연락하셨을 때, 자료를 주는 대신 이름을 빼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조건을 철회하신 이유가 뭐였습니까."
한상민이 잠시 생각했다.
"기자님이 거절했을 때, 저는 그것이 기자님의 원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원칙이 있는 사람한테 자료를 넘겨야 이 일이 제대로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칙이 있는 사람."
"네. 원칙 없는 기자한테 자료를 넘기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원칙이 있는 기자한테 넘기면, 적어도 사실 안에서 다뤄집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상민의 눈에서 마지막으로 읽었다.
이 사람은 지금 후회 중이었다. 많은 것에 대한 후회. 하지만 그 후회 안에서 한 가지가 후회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강민준에게 자료를 넘긴 것.
"잘 되시기 바랍니다."
강민준이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오면서 강민준은 생각했다.
한상민은 이제 법이 감당할 사람이었다.
강민준이 그 결과를 결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사실이 흐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강민준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기사로 됐다.
서윤아의 마지막 부탁
서윤아를 만난 것은 저녁이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조용한 식당이었다. 서윤아가 제안한 곳이었다. 강민준이 들어가자 서윤아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처음 서윤아를 봤을 때를 강민준은 기억했다. 강남구 카페. 긴장하고 두려워하던 얼굴. 부회장이 죽었는데 USB를 갖고 있는 사람의 얼굴.
지금은 달랐다.
창백함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창백함이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지쳐온 사람이 겨우 숨을 고르는 창백함이었다.
눈이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강민준을 믿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지금은 이미 다 된 것을 보는 눈이었다. 안도와 슬픔이 같이 있는 눈.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잠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서윤아가 먼저 말했다.
"기자님, 감사합니다."
"감사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해야 해요." 서윤아가 말했다. "부회장님이 원하신 것이 이루어졌으니까요. 저는 그것을 옆에서 봤어요. 기자님이 한 사람씩 만나면서, 한 가지씩 찾아나가면서."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서윤아의 눈을 읽었다.
순수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순수한 눈이었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는 눈. 그냥 보이는 것을 말하는 눈.
"부탁이 있습니다."
서윤아가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그리고 강민준에게 내밀었다.
사진이었다.
남자의 사진이었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단정한 머리, 온화한 눈. 강민준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누구입니까."
"부회장님이에요."
강민준은 그 사진을 다시 보았다.
한재원. 사진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목소리로는 들었다. 육성 메시지에서. 동영상 속에서 형에게 말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얼굴은 처음이었다.
온화한 눈이었다.
강민준이 이 이야기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의 눈을 읽으면서, 한 번도 직접 읽지 못한 눈.
그 눈이 지금 화면 안에서 강민준을 보고 있었다.
"이 사진을 드리고 싶어요."
"저한테요?"
"부회장님이 기자님을 선택한 이유가 있잖아요. 기자님이 사람을 읽는 분이라는 것. 그래서 부회장님이 기자님한테 기대셨잖아요. 그런데 기자님은 부회장님의 눈을 직접 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서윤아가 계속했다.
"부회장님이 살아계실 때 정말 따뜻한 분이셨어요. 화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누군가한테 목소리를 높이시는 것도요. 그냥 조용하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이 구조에서 버티기가 힘드셨을 거예요. 그런 분이 그 안에 있으면."
강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재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눈. 그 눈이 지금 강민준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선택한 것이 강민준이었다. 강민준의 기사를 보고, 강민준이 사람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그 능력을 믿고 USB를 남겼다.
강민준은 그 신뢰의 무게를 처음으로 이 사진 앞에서 실감했다.
"간직하겠습니다."
서윤아가 사진을 핸드폰에서 강민준에게 전송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말씀하세요."
"기사를 하나 더 써주시면 좋겠어요.
부회장님이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한 기사요. 구조나 비리가 아니라, 그 분이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한 기사."
강민준은 그 부탁을 들었다.
사람에 대한 기사.
비리 기사, 수사 기사, 폭로 기사. 강민준이 쓰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서윤아가 부탁한 것은 다른 종류였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옳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담은 기사.
그것이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어려운 기사였다.
"쓰겠습니다."
서윤아가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꼭이요?"
"꼭이요."
서윤아의 눈에서 무언가가 풀렸다. 오래 잡고 있던 것이 천천히 놓이는 것.
음식이 나왔다. 두 사람은 오래간만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먹었다.
그것이 편안했다.
이 이야기에서 강민준이 처음으로 편안하게 앉아 밥을 먹었다.
직전의 고요
밤이 됐다.
강민준은 합정동 원룸으로 돌아왔다.
방 안이 조용했다. 노트북이 책상 위에 있었다. 핸드폰이 그 옆에 있었다. 취재 노트가 쌓여있었다.
강민준은 코트를 벗으면서 방을 둘러보았다.
열닷새 동안 이 방에서, 카페에서, 병원에서, 용인 고택에서, 한강변 아파트에서. 그 모든 곳에서 벌어진 것들이 지금 이 방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민준은 책상에 앉지 않고 침대 끝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 방금 서윤아에게서 받은 사진을 열었다.
한재원의 얼굴.
온화한 눈.
강민준은 그 눈을 읽으려 했다. 반사적이었다. 이 직업을 하면서 생긴 반사.
하지만 사진에서는 읽을 수 없었다.
사진은 움직이지 않는다. 동공이 반응하지 않는다. 근육이 실마리를 주지 않는다.
강민준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어떤 눈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살아서 만났다면 강민준은 무엇을 읽었을까.
한재원이 직접 말한 것이 있었다. 본인도 그런 능력이 있다고, 아주 조금이지만. 그렇다면 한재원은 강민준을 읽었을 것이었다. 기사를 보면서. 그 기사를 쓴 사람의 내면을.
강민준이 어떤 사람인지 읽고, 이 일을 맡겼다.
그 신뢰가 지금 이 방에 있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보았다. 합정동의 밤. 한강이 멀리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아직 남은 것들을 생각했다.
재판이 시작될 것이었다. 한재도, 박기태, 차관보, 한상민. 각자가 법원 앞에 서게 될 것이었다. 그 과정이 길었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한무경이 다음 주에 출두한다. 일흔 셋의 창업주가 법원에 서는 것.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강민준은 알 수 없었다.
한성그룹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계열사들이 살아남을 것인지, 구조 개편이 있을 것인지. 강민준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강민준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서윤아가 부탁한 기사를 쓰는 것.
한재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담은 기사. 구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기사.
그리고 이 이야기 전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열닷새 동안 강민준이 만난 사람들. 읽은 눈들. 들은 목소리들. 그것이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라 이 나라의 자본과 권력이 어떻게 인간을 삼키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강민준은 그것을 써야 했다.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이혜정이었다.
"기자증 회수 절차 법적으로 막았어. 내일부터 편집국 들어와도 돼."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편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맙긴. 네가 다 한 거잖아."
"팀장님도 하셨습니다."
"둘이 한 거네."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으면서 이혜정이 어떤 눈으로 이 문자를 보냈을지 생각했다. 그 눈에서 읽혔을 것들. 피로와 안도와 동료에 대한 신뢰.
"내일 봽습니다."
이혜정의 답이 왔다.
"어."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강민준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 며칠 전 밤새 기사를 쓸 때도 이 불빛 아래에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달랐다.
그때는 긴장과 속도가 있었다. 지금은 고요함이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함이었다. 아직 폭풍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재판이 남아있었다. 기사가 더 남아있었다. 한재원에 대한 기사. 이 이야기 전체에 대한 기록.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민준은 그냥 이 고요함 안에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찌르지 않았다. 그냥 밝았다.
강민준은 눈을 감았다.
한재원의 눈이 생각났다. 사진 속의 온화한 눈. 강민준이 읽지 못한 눈.
하지만 그 눈이 남긴 것들은 읽었다.
USB 안의 파일들. 서윤아를 통한 육성 메시지. 이혜정을 통한 설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기태를 통해 전해진 말.
잘 부탁한다.
강민준은 그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부탁을 다했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아직 쓸 기사가 남아있었다. 아직 법원이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됐다.
진실이 세상에 나왔다.
강민준은 눈을 감은 채로 오래 있었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오는 제대로 된 잠이었다. 얕지 않은 잠. 무언가를 이루고 나서 오는 잠.
잠들기 직전에 강민준은 생각했다.
결(結)이 시작될 것이었다.
마지막 다섯 회.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강민준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어떻게 끝나든, 이 이야기는 이미 의미가 있었다.
한재원이 설계한 판이 작동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민준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