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의 시작
한성그룹 한재원 부회장 사망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것은 기사가 나가고 육 주 후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
강민준은 취재 기자석에 앉아 법정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취재진이 많았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알고 있는 기자들, 뒤늦게 뛰어들어온 기자들, 방송 카메라가 허용되는 법정 밖까지 합치면 수십 명이었다.
강민준은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법정이라는 공간은 강민준이 오래 드나들었지만 늘 다른 무게가 있었다. 취재 현장과 달리 여기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진행됐다. 말 한마디가 기록됐다. 침묵도 기록됐다. 판사가 말하는 속도가 세상의 속도보다 느렸다.
강민준은 그 느림이 이 공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건이 여기 오면 강제로 느려졌다. 그 느림 안에서 진실이 다시 한번 검증됐다.
피고인석이 세 개였다.
한재도. 박기태. 기획재정부 전 차관보 이성준.
세 사람이 별도의 변호인과 함께 앉게 될 자리였다. 아직 비어있었다.
공판 시작 오 분 전, 피고인들이 입정했다.
강민준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재도가 먼저 들어왔다. 변호인과 함께. 검정 수트. 합정동 아파트에서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유치장에서 지낸 시간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박기태가 다음이었다. 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홍보팀장으로 처음 만났을 때의 단정한 모습이 없었다. 어깨가 내려와 있었다.
이성준 차관보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강민준이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오십 대 초반, 관료 특유의 절제된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절제 아래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판사가 입정했다.
모두 기립했다가 자리에 앉았다.
재판이 시작됐다.
판사가 피고인들의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검사가 공소 사실을 낭독했다. 변호인들이 의견을 냈다.
강민준은 그 과정을 노트에 받아 적으면서 법정 안을 읽었다.
공간을 읽는 것. 사람의 눈만이 아니라 공간 전체의 흐름을.
그리고 그 안에서 세 사람의 눈을 각각 읽었다.
법정 안의 눈들
한재도의 눈을 먼저 읽었다.
합정동 아파트에서 읽었던 것과 달랐다. 그때는 체념이 있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의 체념. 하지만 법정 안의 한재도는 달랐다.
단단했다.
감정이 없는 단단함이 아니었다. 감정을 실어야 할 곳과 실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는 사람의 단단함이었다. 오십 년 넘게 기업을 이끌어온 사람이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단단함 아래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이 있었다.
재도는 지금 이 공간이 자신이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의실도 아니고, 집무실도 아니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공간. 그 낯섦이 단단함 아래에서 작게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 박기태.
박기태의 눈에서 강민준이 처음 읽은 것은 안도였다. 합정동 아파트에서 봤을 때의 안도와 같은 종류였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처리되고 있다는 안도.
하지만 그 아래에 다른 것이 있었다.
이 공간에서 한재원의 이름이 불릴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감각이었다. 검사가 공소 사실을 읽으면서 한재원 부회장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박기태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민준만 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 움직임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한재원의 이름을 이 공간에서 듣는 것의 무게였다.
박기태는 그날 밤 한재원이 자신 앞에서 그 선택을 했을 때, 막지 않았다. 그 사실이 지금 법정에서 기록되고 있었다.
세 번째, 이성준 차관보.
강민준이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법정에서 처음 그 눈을 읽었다.
차관보의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분리였다.
자신이 한 것과 자신 사이를 분리하는 감각. 이것이 자신이 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먼 거리에서 바라보려는 것이었다. 관료가 위기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었다.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것.
하지만 검사가 공소 사실 중 한 대목을 읽었을 때, 그 분리가 잠깐 무너졌다.
피고인 이성준은 GV-3을 통한 자금 수수 외에도 국책사업 발주 과정에서 한성그룹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여 공무원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으며.
의무를 저버렸다는 문장에서 차관보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짧았다. 0.3초. 하지만 강민준은 그것을 읽었다.
그 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수치심이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했을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하는 수치심. 그때와 지금 사이의 거리에 대한 수치심.
강민준은 노트에 적었다.
이 세 사람이 이 공간에 앉아있는 이유가 달랐다. 한재도는 자신이 설계한 것의 결과로 왔다. 박기태는 막지 않은 것의 결과로 왔다. 차관보는 받은 것의 결과로 왔다.
세 가지 다른 이유. 하지만 같은 공간.
법정이 그것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 묶었다.
강민준은 그 묶음이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무게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무게를 법이 어떻게 달리 측정하는지는 판사가 결정할 일이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지켜볼 것이었다.
그리고 기사로 쓸 것이었다.
첫 공판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다음 공판 날짜가 정해졌다. 한 달 뒤였다.
강민준은 법정을 나오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혜정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공판 어땠어?"
"세 사람 모두 왔습니다. 한재도는 단단했고, 박기태는 안도와 무게 사이에 있었고, 차관보는 분리하려 했지만 흔들렸습니다."
"그게 다야?"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혜정이 답하지 않았다.
강민준은 법원 밖 계단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하늘이 낮고 차가웠다.
그때 다른 문자가 왔다.
서윤아였다.
"기자님, 저 오늘 법원 앞에 있었어요.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냥 밖에서."
강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냥 밖에서.
서윤아가 왜 들어가지 않았는지 강민준은 알 것 같았다. 그 안에서 한재원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직 그 공간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언젠가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됩니다."
서윤아의 답이 왔다.
"네. 언젠가요."
강민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다른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강민준 기자님이십니까."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차분했다.
"네."
"한무경 명예회장님 댁 집사입니다. 명예회장님이 어제부터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명예회장님이 기자님께 연락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한무경의 건강
강민준은 법원에서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한무경이 입원한 곳은 서울 시내 대형 종합병원이었다. 강민준이 도착했을 때 집사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이틀 전부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의식을 잃으셔서 응급 이송됐습니다. 지금은 의식이 돌아오셨지만."
"출두는요. 다음 주 월요일."
집사가 잠시 말이 없었다.
"의사가 현재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출두 불가능.
한무경이 검찰에 자진 출두하기로 했던 것. 그것이 건강 문제로 불가능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출두 없이 조사가 진행될 것이었다. 서면 조사. 혹은 병원 조사.
하지만 강민준이 지금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한무경이 연락해달라고 했다.
강민준은 집사를 따라 병실로 올라갔다.
8층 개인 병실.
문을 열자 의료기기 소리가 났다. 침대에 한무경이 누워 있었다. 팔에 링거가 꽂혀있었다. 얼굴이 지난번 용인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하지만 눈이 떠져 있었다.
강민준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한무경이 강민준을 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은 명확함이었다.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눈이 살아있었다. 의식이 흐리지 않았다.
"왔구먼."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또렷했다.
"네. 연락 주셔서 왔습니다."
"출두를 못 할 것 같소."
강민준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의사가 뭐라고 합니까."
"심장이 약해졌소. 무리하면 안 된다고. 검찰 출두 같은 것은 지금 상태에서 위험하다고 했소."
"서면 조사는 가능합니까."
"의사는 그것도 며칠은 안정을 취한 뒤에 하는 게 좋다고 했소."
강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변호인이 검찰에 건강 상태를 설명하면 출두 날짜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서면 조사나 병원 조사로 대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고 있소. 변호인한테 연락했소."
"그러면 왜 저한테도 연락 주셨습니까."
한무경이 강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강민준이 읽은 것이 있었다.
걱정이었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다른 것에 대한 걱정.
"기자 양반한테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씀하십시오."
한무경이 천천히 말했다.
"재원이 기일이 다음 달이오. 내가 그날 거기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기일. 한무경이 강민준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던 날. 한무경이 그날 거기 있지 못할 수 있다고 하고 있었다.
"몸이 회복되실 겁니다."
"모르오." 한무경이 눈을 천장으로 돌렸다. "나이가 나이이니까."
강민준은 한무경의 옆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읽으려 했다.
아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기일이 다가오는데 자신이 거기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이 사람을 지금 움직이고 있었다.
한무경의 마지막 결단
"기자 양반, 나한테 부탁이 있소."
한무경이 강민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재원이한테 하지 못한 말이 있소. 용서하라고 마지막에 와서 말했는데, 나는 그 아이한테 아무 말도 못 했소. 그때도 그냥 보냈소."
강민준은 기다렸다.
"기일에 내가 가지 못하더라도, 기자 양반이 가주겠소?"
"가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부탁하고 싶소."
한무경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재원이한테 하지 못한 말을 기자 양반이 대신 전해줄 수 있겠소. 그 아이 묘 앞에서."
강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묘 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지 못한 말을.
"어떤 말씀을 전해드릴까요."
한무경이 눈을 감았다. 잠시 있었다가 눈을 떴다.
"네가 옳았소."
짧은 말이었다.
네 글자.
하지만 그 네 글자 안에 담긴 것이 얼마나 큰지, 강민준은 알고 있었다.
한무경이 한재원에게 살아서 하지 못한 말. 아들이 옳고 자신이 틀렸다는 것. 그것을 아들의 묘 앞에서 전해달라는 것.
강민준은 한무경의 눈을 읽었다.
이번에 읽은 것은 이 이야기에서 한무경에게서 읽어온 것들과 달랐다.
가벼움이었다.
말을 한 뒤에 오는 가벼움.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가벼움. 그 가벼움이 이 사람의 눈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다.
"전하겠습니다."
한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가 힘없었지만 확실했다.
"감사하오."
강민준은 잠시 더 그 자리에 있었다.
한무경이 눈을 감았다. 잠이 오는 것인지 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링거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의료기기가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강민준은 조용히 일어섰다.
병실을 나오면서 복도에서 멈췄다.
네가 옳았소.
그 말을 전해야 했다. 한재원이 있는 곳에 가서.
강민준은 한 번도 묘지에서 취재를 한 적이 없었다. 묘지는 기사가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기사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사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말을 아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강민준은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겨울 초입의 바람이 얼굴을 건드렸다.
강민준은 한재원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서윤아에게 물어야 했다. 아니면 한무경의 집사에게.
하지만 그것은 기일이 되면 알게 될 것이었다.
지금은 다른 것이 먼저였다.
강민준은 걸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혜정에게 전화했다.
"한무경 명예회장이 입원했습니다. 출두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혜정이 잠시 침묵했다.
"기사 써야 해?"
"아직은 아닙니다. 변호인이 검찰에 설명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합니다. 검찰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기사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알겠어. 상황 보면서 판단하자."
전화를 끊고 강민준은 계속 걸었다.
법원에서 병원으로. 재판이 시작된 날 한무경이 입원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한재원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이야기의 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강민준은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재원의 죽음이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죽음이 다른 죽음들에 의해 의미를 얻었다.
함재식의 직원이 죽었다. 한재원이 선택했다.
그리고 한무경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려 하고 있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기록해야 했다.
마지막을 향한 복선
그날 저녁, 강민준은 편집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합정동 원룸으로 바로 갔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오늘 하루에 있었던 것들을 적었다.
법정. 세 사람의 눈. 한재도의 단단함, 박기태의 안도와 무게, 차관보의 분리와 흔들림.
병원. 한무경의 작아진 얼굴. 링거. 그리고 네가 옳았소, 라는 네 글자.
이것들을 노트에 적으면서 강민준은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재판은 길었다. 공판이 한 달에 한 번씩 열릴 것이었다. 판결이 나오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 과정이 이 이야기의 결(結)이었다.
하지만 강민준이 느끼는 것은 달랐다.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은 법원 판결이 아니었다.
다음 달, 한재원의 기일.
그날 용인 고택의 묘 앞에 서는 것.
그리고 한무경의 말을 전하는 것.
네가 옳았소.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이었다.
강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법원 판결보다, 수사 결과보다, 그 한마디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여야 할 것이었다.
창밖을 보았다. 합정동의 밤. 한강이 멀리 빛나고 있었다.
강민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서윤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음 달 기일에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서윤아의 답이 빠르게 왔다.
"같이 가요."
"한무경 회장님도 오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건강이 걱정됩니다."
"저도요."
"잘 자세요, 서윤아 씨."
"기자님도요."
강민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혜정에게도 짧은 문자를 보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이혜정의 답이 왔다.
"너도."
강민준은 노트를 닫았다.
책상에 팔꿈치를 짚고 두 손을 모았다.
이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을 때를 생각했다. 박기태를 만나러 한성타워에 들어서던 날. 그때 강민준은 이것이 어떤 이야기가 될지 몰랐다.
기업 비리 취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눈을 읽으면서 강민준은 이 이야기를 따라왔다.
독심술이 흔들린 순간도 있었다. 이혜정을 의심한 순간.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인지 의심한 새벽. 하지만 흔들리면서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강민준의 방식이었다.
흔들려도 읽는 것.
창밖 한강이 빛나고 있었다.
강민준은 그 빛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이야기에서 아직 읽지 않은 눈이 하나 있었다.
한재원.
사진 속에서만 봤다. 온화한 눈. 읽으려 했지만 사진은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기일에 그 묘 앞에 서면, 강민준은 뭔가를 느낄 것이었다. 읽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각. 말로 옮겨지지 않는 감각.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었다.
강민준은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일찍 온 잠은 아니었다. 하지만 얕지 않은 잠이었다.
결(結)이 깊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끝나야 했다. 그리고 끝나는 방식이 좋을 것이었다.
한재원이 설계한 판이 그것을 보장했다.
강민준은 잠들었다.
합정동의 밤이 깊어졌다.
한강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