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는 강변
여름, 강물을 따라
"공주 가본 적 있어?"
7월의 어느 저녁, 민수가 물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때였다.
"공주? 무령왕릉?"
지혜가 대답했다.
"거기도 있지만, 제민천이라고. 강변 골목이 예쁘대."
"강변 골목?"
"응. 옛날 도심을 흐르는 작은 강이 있는데, 그 주변 골목이 운치 있대."
서연이가 거실로 나왔다.
"공주? 나도 갈래!"
"방학인데 동아리 활동 안 해?"
"이번 주는 쉬기로 했어. 가족 여행 가자."
준우도 방에서 나왔다.
"나도 갈 거야. 어차피 심심해."
"그래. 다 같이 가자."
다음 주 토요일, 네 식구는 차를 타고 공주로 향했다. 서울에서 두 시간 반 거리였다.
"공주는 백제 수도였잖아."
"맞아. 웅진 시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공주 시내로 들어갔다. 조용한 지방 도시였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다.
"여기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아."
"지방 도시 특유의 여유로움?"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시내 한복판이었다.
'제민천 주차장'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야."
주차를 하고 내렸다. 바로 옆으로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제민천이구나."
강폭은 10m 정도. 작은 개울 같았지만, 물은 맑았다.
"물 예쁘다!"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버드나무가 늘어서고, 벤치들이 있었다.
"여기 걷기 좋겠다."
골목이 품은 강물
제민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강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2~3층 건물들이었다.
"옛날 건물들이네."
"응. 1960~70년대 건물들 같아."
한쪽은 상가들이었다. 오래된 문구점, 이발소, 약국, 방앗간.
"진짜 옛날 동네 같아."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다른 쪽은 주택가였다.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저 골목 들어가보자."
골목으로 들어서니 더 조용했다. 담장이 낮았고, 대문들이 옛날 스타일이었다.
"여기는 정말 1970년대네."
한 집 앞에서 할아버지가 평상에 앉아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 어디서 왔어?"
"서울이요. 제민천 보러 왔어요."
"그래? 고마워. 우리 동네 찾아와줘서."
"여기서 오래 사셨어요?"
"70년 살았지. 태어나서 쭉."
"와, 그럼 공주 역사를 다 보신 거네요."
할아버지는 웃으셨다.
"그렇지. 이 제민천도 옛날엔 더러웠어. 하수구였거든. 근데 한 20년 전부터 정비하기 시작했지."
"지금은 깨끗하던데요."
"응. 많이 좋아졌어. 물고기도 생기고, 사람들도 산책하고."
"이 골목은요?"
"여긴 그대로야. 50년 동안 변한 게 없어.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서연이가 노트에 받아 적었다.
"할아버지, 사진 찍어도 돼요?"
"그래. 찍어."
평상에 앉으신 할아버지와 골목 풍경을 함께 담았다.
골목을 계속 걸으며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저기 카페 있어."
'제민천 다방'이라는 레트로 간판이었다.
"들어가보자."
카페는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곳이었다. 마루가 있고, 한지 문이 있었다.
"분위기 좋다."
"아메리카노 네 잔이요."
창가에 앉으니 제민천이 바로 보였다.
"여기서 강 보면서 커피 마시는 거 좋다."
주인이 커피를 가져오며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오셨어요?"
"네. 제민천 보러 왔어요."
"고마워요. 요즘 찾아오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어요."
"여기 언제 오픈하셨어요?"
"3년 됐어요. 서울에서 내려왔어요."
"왜 공주로?"
주인은 창밖 제민천을 보며 말했다.
"여유가 필요했어요. 서울은 너무 빨랐거든요. 여기는 시간이 천천히 가요. 강물처럼."
"적응 잘 하셨어요?"
"처음엔 힘들었죠. 손님도 별로 없고, 외롭고. 근데 6개월쯤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동네 분들도 친절하시고."
"장사는 어때요?"
"서울만큼은 안 되죠. 근데 살 만해요. 집세도 싸고, 생활비도 적게 들고. 무엇보다 여유가 생겼어요."
커피를 마시며 강을 봤다. 물이 천천히 흘렀다. 서두르지 않았다.
"강물 보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나도. 뭔가 정화되는 느낌."
카페를 나와 다시 강변을 걸었다. 다리가 하나 나왔다.
"금강교래."
작은 다리였지만, 오래된 돌다리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저 다리 건너보자."
다리 위에서 제민천을 내려다봤다. 물고기들이 보였다.
"물고기다!"
"물이 진짜 깨끗하구나."
다리를 건너니 반대편 골목이 나왔다. 이쪽은 더 조용했다.
"여기는 완전 주택가네."
좁은 골목을 따라 한옥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오래됐지만, 잘 보존되어 있었다.
"공주는 한옥이 많네."
"역사 도시니까."
골목 깊숙한 이야기
골목 깊숙이 들어가니 작은 갤러리를 발견했다.
"공주 공방 갤러리?"
문이 열려 있었다. 들어가니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50대 남자가 작업복을 입고 나왔다.
"구경해도 돼요?"
"그럼요. 천천히 보세요."
도자기들은 백제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었다.
"이거 다 만드신 거예요?"
"네. 제가 도예가예요."
"공주에서 오래 하셨어요?"
"10년 됐어요. 서울에서 내려왔죠."
"또 서울에서."
남자가 웃었다.
"공주에 서울 사람들 많아요. 조용하게 작업하기 좋으니까."
"공주가 예술가들한테 인기 있나 봐요."
"그렇죠. 집세 싸고, 조용하고, 역사도 있고. 특히 백제 문화가 영감을 많이 줘요."
"백제?"
"네. 공주는 백제 수도였잖아요. 그 역사가 도시 곳곳에 스며있어요. 그게 작업에 영향을 많이 줘요."
작업실을 보여주셨다. 뒤편에 물레와 가마가 있었다.
"여기서 다 만드세요?"
"네. 여기서 빚고, 여기서 굽고."
"힘들지 않으세요? 혼자서."
"힘들죠. 근데 보람 있어요. 내 손으로 만든 작품을 누군가 사가는 게."
갤러리를 나오며 민수가 말했다.
"공주가 예술가들의 도시가 되고 있네."
"성수동이나 청주 대성로처럼?"
"비슷한데 더 조용해. 덜 상업적이고."
"그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글쎄.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제민천으로 돌아와 강변 벤치에 앉았다.
"여기서 쉬자."
강물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만 들렸다.
"좋다. 이 평화로움."
준우가 물에 손을 담갔다.
"시원해!"
"물놀이 할 수 있겠다."
"진짜? 해도 돼?"
"여기는 친수 공간이니까 괜찮을 거야."
준우는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물은 발목까지 찼다.
"엄마, 아빠도 해봐!"
"우리는 여기서 볼게."
서연이도 물에 들어갔다. 남동생과 물장난을 쳤다.
"야, 그만!"
"하하하!"
민수와 지혜는 벤치에서 아이들을 봤다.
"애들 커서 이렇게 노는 것도 얼마 안 남았어."
"그러게. 서연이는 이제 대학생이고, 준우도 곧 고3이고."
"시간 참 빠르다."
"응. 우리 골목 아카이빙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3년 반이나 됐네."
"많이 다녔지."
"응. 을지로, 해방촌, 성수동, 수원, 춘천, 김포, 안산, 포천, 강릉, 청주..."
"그리고 이제 공주."
"서연이도 이제 독립적으로 하고."
"우리 역할이 끝나가는 건가?"
지혜가 민수의 손을 잡았다.
"끝이 아니라 변화하는 거지. 우리도 계속 하면 돼."
"그래. 다만 이제는 세대가 이어지는 거."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저녁이 되어 공주 시내로 나갔다. 공산성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공주 칼국수 유명하대."
"먹어보자."
칼국수집에 들어가 주문했다.
"칼국수 네 개요."
칼국수를 먹으며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공주 어땠어?"
"좋았어. 조용하고, 여유롭고."
"나는 제민천이 제일 좋았어."
준우가 말했다.
"나는 물놀이!"
모두 웃었다.
"서연아, 너는?"
"나는... 시간이 천천히 가는 느낌이 좋았어."
"어떻게?"
"서울은 다 빨리빨리잖아. 근데 여기는 느려. 강물처럼."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공주의 매력인 것 같아."
"기록할 거야? 공주도?"
"응. 근데 이번엔 좀 다르게."
"어떻게?"
"길게 쓰지 않을래. 짧게. 그냥 느낌만."
"왜?"
"어떤 곳은 많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그냥 경험하면 되는 곳이 있어. 공주가 그런 것 같아."
저녁을 먹고 공산성 성곽길을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 예쁘다."
성곽 위에서 공주 시내를 내려다봤다. 제민천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었다.
"저기 우리가 걸었던 곳이네."
"응. 작은 도시라서 다 보여."
석양이 제민천 물에 반사됐다. 금빛으로 빛났다.
"사진 찍자."
가족 사진을 찍었다. 석양과 제민천을 배경으로.
"이 사진 마음에 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다시 한 번 제민천을 지났다.
밤의 제민천은 또 달랐다. 가로등 불빛이 물에 비쳤다.
"밤에도 예쁘네."
"응. 낮이랑 완전 다른 분위기."
잠시 차를 세우고 강변에 섰다.
"물소리 들려?"
"응."
한참을 그렇게 서서 물소리를 들었다.
"이게 공주구나."
다음 날 아침, 다시 제민천을 찾았다.
"아침 산책 하자."
아침의 제민천은 더 조용했다. 안개가 강 위에 낮게 깔려 있었다.
"몽환적이다."
"사진 찍어야지."
아침 풍경을 담았다. 안개 낀 강, 버드나무, 조용한 골목.
"완벽해."
산책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민수가 말했다.
"공주는 특별했어."
"뭐가?"
"다른 곳들은 뭔가 이야기가 많았잖아. 역사, 상처, 변화. 근데 공주는 그냥... 평화로웠어."
"강물 같았어."
"맞아. 그냥 흐르는 거. 서두르지 않고."
"그것도 의미 있어."
"응. 모든 곳이 극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집에 도착해서 민수는 짧은 글을 썼다.
제목은 '공주 제민천 골목, 시간이 흐르는 강변'.
"공주 제민천은 천천히 흐른다. 서두르지 않는다. 강물은 그저 흐를 뿐이다."
"강변 골목도 마찬가지다. 50년째 그 자리에 있다.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지 않겠다. 그저 있는 그대로."
"서울에서 내려온 예술가들이 조용히 작업한다. 카페 주인은 여유를 찾았다고 한다. 70년 산 할아버지는 변하지 않는 골목이 좋다고 한다."
"모든 것은 강물처럼 흐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저 흐를 뿐."
"가끔은 이런 곳이 필요하다. 아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되는 곳. 그냥 있어도 되는 곳."
"공주 제민천은 그런 곳이다."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이번에는 사진을 더 많이 실었다. 글보다 사진이 더 많았다.
댓글들이 달렸다.
"짧은 글이지만 깊이가 있네요."
"가끔은 이런 평화가 필요해요."
"다음 주에 가족들과 가보겠습니다."
서연이가 아빠의 글을 읽고 말했다.
"아빠, 이번 글 좋다."
"왜?"
"간결해. 그리고 솔직해."
"고마워."
"나도 배워야겠다. 모든 걸 길게 쓸 필요는 없다는 거."
"맞아. 어떤 곳은 짧게 쓰는 게 더 맞아."
한 달 후, 공주시 문화관광과에서 연락이 왔다.
"제민천 홍보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선생님 글과 사진을 사용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제민천 가이드북 집필에 참여하실 의향 있으세요?"
민수는 잠시 생각했다.
"서연이랑 같이 해도 될까요? 제 딸인데, 아카이빙을 같이 하거든요."
"오, 좋죠. 세대 간 협업이면 더 좋겠네요."
그렇게 민수와 서연이는 『공주 제민천 이야기』 가이드북을 함께 집필하게 됐다.
6개월 동안 공주를 여러 번 찾아갔다. 사계절 제민천을 담았다. 여름의 푸름,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봄의 벚꽃.
그리고 골목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70년 산 할아버지, 서울에서 내려온 도예가, 카페 주인, 동네 빵집 아주머니.
가이드북은 단순한 관광 안내서가 아니었다. 제민천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출판 기념회가 제민천 다방에서 열렸다.
"축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공주 시민들, 인터뷰에 응했던 주민들, 그리고 민수의 독자들.
70년 산 할아버지도 오셨다.
"내 이야기가 책에 나왔다니 신기하네."
"할아버지 이야기 덕분에 책이 풍성해졌어요."
"고마워. 우리 동네를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줘서."
출판 기념회가 끝나고 민수와 서연이는 제민천을 걸었다.
"아빠, 우리 처음으로 같이 책 냈네."
"그러게. 감회가 새롭다."
"다음에도 같이 할까?"
"그래. 네가 원한다면."
"나는 좋아. 아빠랑 같이 하는 거."
두 사람은 강변 벤치에 앉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빠."
"응?"
"우리 아카이빙이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
"나도. 처음엔 그냥 취미였는데."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그리고 이제는 너한테도."
"응. 나도 이제 못 멈출 것 같아."
"그럼 계속하자. 함께."
"응. 함께."
제민천은 오늘도 흐른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그리고 그 강변에는 사람들이 산다. 70년을 산 사람도, 3년 살고 있는 사람도, 처음 온 사람도.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강물처럼.
민수와 서연이의 아카이빙도 계속된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세대를 넘어.
공주 제민천처럼, 천천히,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