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자리에서 피는 꽃(창작)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배우는 순간이다

by 이 범


흔들리는 출발선
봄비가 내리는 4월의 어느 저녁, 서울 마포구의 낡은 체육관 안에서 열여섯 살 소녀 이수아는 또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체육관 바닥은 오래된 목재로 이루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자국이 수아의 무릎에 닿았다. 손바닥에도 따끔한 통증이 번졌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더 아팠던 것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었다.
"이수아, 또 넘어졌어!"
팀 동료 정미래가 킥킥거렸다. 그 웃음소리는 체육관 천장을 맴돌다 수아의 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면 안 된다. 절대로. 수아는 이 체육관에 온 지 세 달이 됐다. 원래는 피겨스케이팅이 꿈이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아이스링크 대신 동네 체육관의 리듬체조부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첫날부터 알아차렸다. 이미 다들 몇 년씩 배운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은 시작도 안 된 존재였다는 것을.


코치 박선영은 서른다섯의 여성으로, 한때 전국 대회 동메달리스트였다. 그녀는 지금도 과거의 영광을 몸 안에 새기고 살았다. 선영은 수아의 넘어짐을 보았지만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말했다.


"일어나."
딱 두 글자였다. 그 말이 차갑게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아는 선영의 눈 속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차가움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수아는 일어섰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아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걸었다. 버스를 놓쳤고, 택시를 탈 돈도 없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신발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수아는 멈추지 않았다.


집은 마포구 공덕동 언덕 위의 반지하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니 최순희는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쉰한 살인데 예순처럼 보이는 얼굴.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오늘은 어땠어?"
어머니가 물었다.
"괜찮았어요."
수아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니에게 무릎을 보여줄 수 없었다. 또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밥상 위에는 라면 두 그릇과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수아는 숟가락을 들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어차피 잘 될 리도 없는 일을.
그 생각은 오래 계속되었다. 잠들기 전까지.


다음 날 아침, 수아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선영 코치는 이미 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시간이었다. 선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코치님, 뭐 하세요?"
수아가 물었다.
선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 수아가 넘어진 자리 근처의 나무 바닥 조각이 들려 있었다.


"어제 네가 여기서 넘어졌잖아. 바닥에 튀어나온 못이 있었어. 내가 못 봤어. 미안해."
선영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날카로움 대신 낮고 진중했다.


수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실수라고, 자신이 못 나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선영이 다가와 바닥의 못을 빼고 테이프로 덧댄 뒤, 수아를 바라봤다.


"수아야, 내가 하나 물어볼게. 넘어지는 게 뭐라고 생각해?"
수아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실패요. 못 하는 거요."
선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넘어지는 건 네 몸이 아직 기억을 못 한다는 신호야. 기억할 만큼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넘어진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가 아니라, 네가 배우고 있다는 증거야."


그날부터 선영은 수아에게 따로 시간을 냈다. 팀 훈련이 끝난 뒤 한 시간씩, 수아만을 위한 연습이 이어졌다. 선영은 수아가 넘어질 때마다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방금 어느 순간에 중심을 잃었어?"
"오른발 착지할 때요."
"그럼 다시 해봐. 이번엔 오른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만 느껴봐."
수아는 반복했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했다. 어느 날은 스무 번 넘어졌다.


어느 날은 열다섯 번. 그리고 어느 날, 다섯 번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수아는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넘어질 때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가 선명해졌다. 넘어짐이 지도처럼 작동했다.


어디가 부족한지를 몸이 직접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팀 내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했다.
"걔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재능이 없는 게 뻔한데."
정미래가 수군거렸다. 수아는 들었다.


전부 들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예전처럼 가슴속에 박히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도 발바닥에 힘이 더 들어갔다.
어느 날 저녁, 훈련을 마치고 선영이 수아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
수아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힘들어요. 그런데 무서운 게 없어졌어요. 넘어지는 게."
선영이 처음으로 웃었다. 환하게는 아니었다.


살며시, 오래된 상처 위에 봄볕이 내려앉듯.
그날 밤 수아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늘도 세 번 넘어졌다. 그런데 세 번 다 달랐다. 첫 번째는 발 때문에, 두 번째는 눈 때문에, 세 번째는 마음이 어딘가를 먼저 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오늘 세 가지를 배웠다.'


다시, 바닥으로

6월이 되었다. 체육관 안은 여름의 열기로 후텁지근했다. 구역 내 청소년 리듬체조 소규모 발표회가 두 달 뒤로 다가왔다. 선영은 수아를 단독 종목에 내보내기로 했다.


팀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왜요? 수아가요? 우리 중에 제일 실력이 없잖아요."
정미래의 말이 날카롭게 체육관 공기를 가랐다.


선영은 대답 대신 수아에게 말했다.
"이번 발표회, 네가 원하면 나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수아는 그날 밤 오래 생각했다. 나가야 할까. 망신을 당하면? 어머니가 보러 오신다면? 그 앞에서 넘어진다면?
그러나 새벽이 되자 수아는 결정을 내렸다.


나간다.
연습은 더 격렬해졌다. 수아는 하루에 두 시간씩 혼자 남아 연습했다. 선영도 매일 함께 남았다. 리본을 손에 쥐고 던지고, 받고, 돌리고, 또 넘어지고.


그런데 발표회가 열흘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밤, 수아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수아야, 어머니 입원하셨어. 쓰러지셨대."
외할머니였다. 수아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할머니. 수아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할머니의 얼굴은 창백했다. 뇌졸중이었다. 오른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수아는 병원 복도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꺾였다. 체육관 바닥이 아니라 차갑고 딱딱한 병원 타일 위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도 '일어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 수아는 체육관에 나오지 않았다. 선영은 연락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밤, 수아에게 짧은 문자 하나를 보냈다.


「수아야. 넘어진 것들은 모두 다 방향이 있어. 어디로 넘어졌는지 알면, 어디로 일어서야 하는지도 알아. 기다릴게.」


수아는 그 문자를 세 번 읽었다. 네 번째에는 눈물이 났다. 오래, 오래 울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울고 나자 몸이 가벼웠다.


다음 날 아침, 수아는 병원에 들렀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눈을 뜨고 수아를 바라보았다. 말은 못 했지만, 손을 꼭 쥐었다. 그 손의 힘은 약했지만 분명했다.


수아는 병원을 나와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발표회는 닷새 뒤였다.


넘어진 자리에서 피는 꽃

발표회 당일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마포구 문화센터 소강당에는 학부모들과 동네 어른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채웠다. 수아의 어머니도 앉아 있었다. 수아는 무대 뒤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커튼 사이로 살짝 보았다.

어머니는 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


선영이 다가와 수아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잘 넘어지는 것도 실력이야."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수아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았다.


무대 위로 불빛이 쏟아졌다. 수아는 리본을 손에 쥐었다. 음악이 시작됐다. 피아노 선율이 낮게 깔리다가 점점 높아졌다.


처음 30초는 완벽했다. 리본이 허공을 가르며 그려내는 선이 부드러웠다. 관객들의 시선이 수아에게 모였다.


그러나 1분이 지났을 때, 수아는 균형을 잃었다. 회전 동작에서 오른발 착지가 엇나갔다. 몸이 기울었다.


순간이었다. 0.3초의 시간.
그 0.3초 안에서 수아는 오래된 것들을 떠올렸다. 체육관 바닥의 차가움. 선영의 눈빛. 할머니의 손. 어머니의 주름. 일기장에 써 내려간 문장들. 넘어질 때마다 배웠던 것들.


그리고 수아는 넘어지지 않았다. 기울었던 몸이 스스로 돌아왔다. 흔들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석 달의 넘어짐이 수아의 몸 안에 새긴 기억이었다. 수백 번의 넘어짐이 만들어낸 근육의 언어였다.


리본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음악은 계속됐다. 수아도 계속됐다.
연기가 끝났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크지는 않았다. 프로 무대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수아에게는 그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무대 뒤로 내려오자 선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따뜻했다. 수아는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관객들이 빠져나갔다. 수아는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엄마, 왜 울어요?"
"아니야. 그냥... 네가 흔들렸을 때 엄마도 같이 흔들렸어. 그런데 네가 안 넘어지더라."
수아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힌 거친 손. 그 손이 수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날 저녁, 수아는 병원에 들러 할머니에게 발표회 이야기를 해드렸다. 할머니는 말을 못 했지만 입꼬리를 올렸다. 수아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 수아는 빗속이 아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골목을 걸었다. 신발 안이 따뜻했다.
수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넘어진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이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모른다는 것은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뜻이다. 배우는 중이라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수아가 체득한, 넘어짐의 문법이었다.
반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수아는 잠깐 멈췄다. 계단 틈새에서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콘크리트 사이에서, 햇볕도 잘 닿지 않는 그 틈새에서.
수아는 한참을 그 꽃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오늘은 라면이 아니었다.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수아는 가방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
"내가 도울게요."
처음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웃었다.


에필로그

그해 가을, 수아는 지역 청소년 리듬체조 대회에 나갔다. 입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 번 흔들리고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선영 코치는 심사 결과지보다 그 세 번의 흔들림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흔들린다는 건 느끼고 있다는 뜻이고, 느낀다는 건 배우고 있다는 뜻이니까.


할머니는 이듬해 봄, 오른팔의 감각을 30퍼센트 회복했다. 완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아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해부터 수아가 설거지를 도왔다고 동네 이웃들에게 자주 말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수아가, 스스로 일어서는 아이가 됐거든요."
넘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배우는 순간이다. 그리고 배우는 순간이 쌓이면, 언젠가 콘크리트 틈새에서도 꽃이 핀다.



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