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빛깔의 사람(창작)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간다

by 이 범


노을 앞에 선 사람
강혜숙이 거울 앞에 오래 서 있게 된 것은 예순다섯 번째 생일 아침이었다.


주름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아니, 주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눈 옆으로, 입가로, 이마에. 그것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날 아침은 유난히 오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딸 수진이 케이크를 사 왔다. 초 하나. 예쁜 숫자 모양 초를 사 왔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그냥 하나만 꽂았다.
"엄마, 소원 빌어."



혜숙은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을 빌어야 할지 몰랐다. 건강? 이미 나름 건강했다. 행복? 불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그녀는 초를 불었다.
소원 없이.

혜숙은 삼십팔 년을 초등학교 교사로 살았다. 올해 봄에 정년퇴임을 했다. 마지막 날 아이들이 그린 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면서 그녀는 담담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울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오래.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잘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남편 영호는 출장 중이었고, 수진은 직장이었다. 혜숙은 거실 소파에 앉아 처음으로 낮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른여덟 해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 고요함이 너무 낯설었다.

완성되지 않은 것들
여름이 지나도록 혜숙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웃들은 친절하게 권유했다.


문화센터 수업, 노인 대학, 요가, 등산 동호회. 혜숙은 두어 군데 등록을 했다가 조용히 그만두었다. 시간을 채우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른 것 같았다.



그 무렵 동네 도서관에 새 프로그램이 생겼다.

어르신 회고록 쓰기 교실. 강사는 서른 초반의 젊은 작가였는데, 얼굴이 너무 어려 보여서 혜숙은 처음에 망설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첫날 강사 박지호는 수강생 여섯 명 앞에 앉아 말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한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 있으신가요?"
다들 잠시 침묵했다.


혜숙은 뜻밖에도 답이 바로 나왔다.
"그림이요."
모두가 혜숙을 바라보았다.


"스물두 살 때 미대 입시를 포기했어요. 집안 사정으로. 그 뒤로 붓을 한 번도 잡지 않았어요."



혜숙은 말을 끝내고 나서야 자신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낸 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십삼 년 만에.

지호 작가는 조용히 메모를 했다가 말했다.
"그건 포기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냥 미뤄놓은 것일 수도요."
혜숙은 그 말을 집으로 가져갔다.


저녁에 남편 영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텔레비전을 끄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몰랐어?"
"몰랐어."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삼십팔 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밤이었다.

다시 붓을 쥐는 일
가을이 오던 날 혜숙은 화방에 갔다.
낯설었다. 붓을 고르는데 손이 떨렸다. 어느 굵기가 자신에게 맞는지도 몰랐다. 사십삼 년의 공백은 기술만이 아니라 감각도 지워버렸다.


그녀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골랐다. 수채화 물감, 붓 세 자루, 스케치북. 총 이만사천 원. 그것이 사십삼 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데 든 비용이었다.

처음 그린 것은 창밖 풍경이었다. 엉망이었다. 원근이 틀렸고, 색이 탁했다. 나뭇잎이 나뭇잎처럼 보이지 않았다. 혜숙은 그것을 보며 웃었다. 오랫동안 실패를 두려워했는데, 막상 실패해도 괜찮았다.


두 번째는 조금 나았다. 세 번째는 더 나았다.
두 달이 지나자 혜숙의 책상 위에는 스케치북 두 권이 쌓였다. 회고록 교실에 그림을 가져갔을 때 지호 작가가 한 장을 오래 바라보더니 말했다.


"선생님, 이거 어디서 배우셨어요?"
"오십 년 전에 조금이요."
"그런데 이렇게 감정이 담겨 있어요. 기술은 녹슬어도 시선은 녹슬지 않나 봐요."
혜숙은 그 말이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겨울 어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도서관 로비에 '지역 주민 예술 전시'가 열렸는데, 사서가 혜숙의 그림 세 점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다. 혜숙은 처음에 거절하려 했다.



남편 영호가 말했다.
"왜? 네 그림이잖아."
"부끄러워서."
"누구한테?"
혜숙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랐다. 어쩌면 오래전 포기했던 스물두 살의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림을 냈다.

완성이란 끝이 아니라
전시 마지막 날, 혜숙은 도서관 로비 벽에 걸린 자신의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세 점이었다. 가을 감나무, 새벽 부엌,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빈 의자.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멈추었다. 팔십은 넘어 보이는, 등이 굽은 분이었다. 그분은 빈 의자 그림 앞에 가장 오래 섰다가 혜숙을 돌아보았다.


"이 그림 그린 분이오?"
"네."
"여기 누가 앉아 있는 것 같아서요. 비어 있는데 꽉 찬 느낌이."
혜숙은 그 말에 눈이 뜨거워졌다.


그 의자는 남편이 쓰던 것이었다. 작년에 입원했다가 돌아온 뒤로 그 의자에서 자주 창밖을 바라보았다. 혜숙은 그 뒷모습을 보면서 그렸다. 그림 속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혜숙의 눈에는 영호가 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호가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에 멈추었던 일이었다.


"당신 그림 좋던데."
"처음 보는 것 같았지?"
"응. 그래서 더 좋았어."


그해 겨울, 혜숙은 회고록 교실에서 첫 문장을 완성했다.

'나는 예순다섯 살에 처음으로 스물두 살을 만났다.
그 애는 붓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호 작가가 그 문장을 읽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선생님, 이게 전체 소설이에요."

봄이 왔다. 혜숙은 다시 화방에 갔다. 이번에는 캔버스를 샀다. 크고 하얀 캔버스.
붓을 처음 든 날처럼 손이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이 두렵지 않았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다가오는 끝을 향해 가는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랫동안 내 안에 있던 것들이 하나씩 빛을 찾아 나오는 일이었다.


가을빛이 깊어질수록 더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도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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