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끝자락,
경기도 수원의 한 중학교 복도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의 웃음과 고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3학년 2반 교실 구석 창가 자리에 앉은 열다섯 살 강도현은 언제나 혼자였다.
도현은 말을 잘 못했다. 정확히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점심 메뉴가 뭔지 묻고 싶었고, 옆 반 아이들이 하는 게임 이야기에 끼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열려고 하면 목 어딘가에서 말이 굳어버렸다. 가슴이 먼저 쿵 내려앉고, 귀가 빨개지고, 그러면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선생님들은 그런 도현을 두고 '조용한 아이'라고 했다. 친구들은 더 직접적이었다. '말 없는 애', '이상한 애', '유령.' 누군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자 금세 번졌다. 도현은 들었다. 전부 들었다. 그러나 항의하지 않았다.
항의하려면 말을 해야 했으니까.
도현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 곳은 집이었다. 그것도 딱 두 사람에게만. 아버지 강민철과 할머니 오정순.
아버지는 도현이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로 혼자 두 사람을 키워왔다. 낮에는 배달 일을 했고, 저녁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 아버지는 늘 피곤했다. 도현은 아버지에게 많은 말을 걸지 않았다. 피곤한 얼굴에 말을 얹는 것이 미안했다.
할머니 오정순은 일흔셋으로, 도현네와 같은 아파트 단지 옆 동에 살았다. 도현은 학교 마치고 할머니 집에 들르는 것이 일과였다.
할머니는 도현에게 한 번도 '왜 말을 못 해?'라고 묻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혀두고 같이 TV를 보거나, 고구마를 쪄주거나, 창밖을 내다보다 혼자 중얼거렸다.
그 침묵이 도현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었다.
4월의 두 번째 월요일, 담임 이 선생은 조례 시간에 공고를 하나 냈다.
"다음 달 교내 발표대회가 있어. 각 반에서 한 명씩 나가야 해. 희망자 손들어."
교실이 술렁였다. 몇몇이 손을 들었다. 도현은 손을 들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나 선생님의 눈이 도현에게 멈췄다.
"강도현, 너는 어때?"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스무 쌍의 눈이 일제히 도현을 향했다. 도현의 귀가 빨개졌다. 목이 굳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킥킥댔다. 선생님이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도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은 할머니 집에 들렀다. 할머니는 현관에서 도현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이 나왔다.
"오늘 힘들었구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도현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감쌌다. 꽤 많이, 라는 뜻이었다. 할머니는 알아들었다.
그날 밤 도현은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럴까.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냥 '저요'라고 말하면 되는데. 그 두 글자가 왜 이렇게 무거울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잠들기 직전, 도현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어제는 한 마디도 못 했다. 오늘도 한 마디도 못 했다. 그럼 내일은... 딱 한 마디만 해볼까?'
그 생각은 작고 불확실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 마디씩
다음 날 아침, 도현은 학교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아버지가 야간 근무하는 곳이 아닌, 집 앞의 다른 편의점이었다. 도현은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계산원은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바코드를 찍으며 기계적으로 말했다.
"천이백 원이요."
도현은 돈을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받았다. 그리고 나가려다 멈췄다. 잠깐 망설이다가 뒤를 돌았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크기였다. 계산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편의점 문을 나서면서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땀이 나진 않았다. 귀가 빨개지지도 않았다. 그냥, 이상하게 가벼웠다.
어제는 한 마디도 못 했다. 오늘은 한 마디 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도현은 그 방법을 계속했다. 하루에 딱 한 번, 낯선 사람에게 한 마디. 편의점 계산원에게 '감사합니다.' 버스 기사에게 '내릴게요.'
도서관 사서에게 '이 책 빌려도 되나요?' 매번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번 목이 뻣뻣해졌다.
그러나 매번, 딱 한 마디를 끝낸 뒤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 변화는 작았다. 너무 작아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은 여전히 도현을 유령이라 불렀다. 선생님은 도현을 여전히 '조용한 아이'로 기록했다. 아버지는 늘 피곤해서 도현의 표정까지 자세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만은 달랐다.
어느 날 오후, 도현이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말했다.
"도현아, 너 요즘 눈빛이 달라졌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달라요?"
"응. 뭔가 생각하는 게 생긴 얼굴이야."
도현은 할머니에게 말했다. 편의점에서 처음 '감사합니다'를 했던 이야기. 버스 기사에게 '내릴게요'를 했던 이야기. 처음에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그러나 말하고 나서 얼마나 가벼웠는지. 도현은 말하면서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할머니 앞에서는 말이 잘 나왔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할머니는 도현의 말을 절대 끊지 않았다. 절대 웃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도현아, 용감하다는 게 뭔지 알아?"
할머니가 물었다.
"무서운 게 없는 거요?"
"아니야. 무서운데도 하는 거야. 무서운 걸 없애는 게 아니라, 무서운 채로 한 발 내딛는 거야. 그게 용감한 거야."
도현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무서운 채로 한 발.'
5월이 되었다. 교내 발표대회 공지가 다시 붙었다. 이번에도 담임 선생님이 희망자를 물었다. 도현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손을 들지 않으면서도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스스로도 모르게.
학교가 끝나고 도현은 교무실 앞에 섰다. 십 분 동안 서 있었다. 문을 열려고 했다가, 못 열었다. 다시 열려고 했다가, 또 못 열었다. 그러다 열한 번째에 손잡이를 잡았다.
담임 이 선생이 고개를 들었다.
"강도현, 무슨 일이야?"
도현의 심장이 귀에서 들릴 것 같았다. 손에 땀이 났다. 그러나 도현은 말했다.
"저... 발표대회... 나가도 될까요?"
목소리는 작았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러나 말은 나왔다.
선생님이 잠시 도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나가봐."
그 두 마디는 짧았다. 그러나 도현에게는 길었다. 교무실 문을 나서면서 도현은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갑자기 멀어진 것들
발표대회는 3주 뒤였다. 도현은 주제를 골랐다. '말이 무서운 아이의 이야기.' 자기 이야기였다. 할머니에게 말하듯 쓰면 될 것 같았다. 할머니 앞에서는 말이 나왔으니까.
원고를 썼다. 고쳤다. 또 고쳤다. 방 안에서 혼자 소리 내어 읽어봤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떨렸다. 두 번째에는 덜 떨렸다. 열 번째에는 거의 안 떨렸다.
그런데 발표대회 열흘 전, 할머니가 쓰러졌다.
아침에 갑자기 어지러움을 호소하다가 쓰러졌다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도현은 학교에서 그 문자를 받았다. 수업 중이었다. 손이 차가워졌다.
병원에 가보니 할머니는 이미 병상에 누워 있었다. 뇌의 작은 혈관이 막혔다고 했다. 당장 생명에 위협은 없지만, 한동안 병원에 있어야 했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동안 도현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눈을 떴다. 도현을 보더니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도현아."
"할머니."
그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충분했다.
도현은 그날 이후 매일 병원에 들렀다. 학교 마치고 버스 두 번 갈아타고 삼십 분. 할머니 옆에 한 시간 앉아 있다가, 다시 버스 타고 집에 왔다.
할머니는 말을 많이 못 했다. 그래서 대신 도현이 말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오늘 읽은 책, 하늘 색깔. 원래 못 하던 말을 할머니 병상 옆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했다.
그러나 발표대회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을 때, 도현은 흔들렸다.
반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현이가 발표대회 나간대. 진짜? 말도 못 하는 앤데.' 그 말이 귀에 박혔다. 밤새 박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도현은 학교에 가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멈췄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예행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교실 앞에 서서 반 친구들 앞에서 혼자 말을 해야 했다.
도현은 정류장 옆 철제 난간을 잡았다. 손이 떨렸다. 목이 뻣뻣해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오래된 증상들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할머니 병실 간호사였다.
"보호자분이세요? 오정순 환자분이 아침에 좀 더 좋아지셨어요. 밥도 드셨고요. 아, 그리고 손자분한테 꼭 전해달라고 하셨는데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용감하면 충분하다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도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알아요."
처음으로, 간호사에게 또렷하게 대답했다.
도현은 난간을 놓았다. 버스가 왔다. 탔다.
딱 한 마디만큼 더
발표대회 당일, 학교 강당에는 전교생이 모였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도현은 무대 옆 대기실에서 원고를 손에 쥐고 있었다. 종이가 축축해졌다. 땀이었다.
앞 순서 아이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갔다. 잘 하는 아이들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제스처가 자연스럽고, 웃음도 잘 웃었다. 도현은 그걸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나는 저들처럼 잘 할 수 없다. 그런데, 잘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할머니가 말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용감하면 충분하다고. 잘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만 더. 어제의 나는 이 대기실 의자에 앉지도 못했다. 지난달의 나는 교무실 문을 열지도 못했다. 지난 봄의 나는 편의점에서 '감사합니다'도 못 했다.
그러니까 오늘, 무대에 올라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도현, 준비해."
도현은 일어섰다.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계단을 올랐다. 조명이 눈을 찔렀다. 마이크 앞에 섰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수백 개의 눈이 도현을 향했다. 그 시선들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도현은 잠깐 굳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순간, 도현은 눈을 감았다. 잠깐만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할머니 병실. 보리차 한 잔. '무서운 채로 한 발.' 편의점에서 처음 말했던 날 아침의 가벼움.
도현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저는 말이 무서운 아이입니다."
강당이 아주 잠깐 침묵했다. 누군가 웅성거리려던 것이 멈췄다.
"지금도 무서워요. 심장이 귀에서 들릴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여기 서 있는 건, 제가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어제보다 딱 한 마디만큼만 더 용감해지려고 했거든요."
도현의 목소리는 작았다.
마이크가 없었다면 뒷자리까지 안 들렸을 것이다. 발음이 완벽하지도 않았다. 중간에 한 번 멈췄다. 그러나 계속됐다.
"저한테 용기는 무서운 걸 없애는 게 아니에요. 무서운 채로 한 발 더 내딛는 거예요. 그 한 발이 쌓이면, 어느 날 여기 서 있는 제가 됩니다."
도현은 원고를 내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 강당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청중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보였다. 졸린 아이도 있었고, 낙서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도현을 바라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한테 이 말을 해준 할머니께 말하고 싶어요. 할머니, 오늘 조금 더 용감했어요. 감사합니다."
도현은 마이크를 내려놨다. 고개를 숙였다.
박수가 왔다. 크지 않았다. 그러나 왔다. 분명히, 왔다.
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담임 이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도현의 어깨를 한번 두드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오후, 도현은 병원으로 갔다. 할머니의 병실 문을 열자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잘 됐어?"
"네."
"어제보다 용감했어?"
"네. 어제보다 딱 한 마디만큼요."
할머니가 웃었다. 오래전부터 도현이 알아온 그 웃음이었다.
도현은 의자를 당겨 할머니 옆에 앉았다. 창밖으로 5월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침묵은 달랐다. 두려워서 말을 못 하는 침묵이 아니었다.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한 침묵이었다.
도현은 생각했다.
용감하다는 건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니다. 편의점에서 '감사합니다.' 교무실 문을 여는 손. 마이크 앞에서 첫 마디. 그 하나하나가 용감함이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그러나 어제의 나보다는 분명히 한 걸음 더 나아간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용감하면 충분하다.
그것이, 열다섯 살 강도현이 배운 용기의 문법이었다.
에필로그
그해 여름, 도현은 발표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진정성'이라는 말을 썼다. 도현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할머니는 두 달 만에 퇴원했다. 걸음이 조금 느려졌지만, 입이 느려지진 않았다. 여전히 보리차를 끓여주었고, 여전히 도현의 말을 끊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저녁, 도현의 발표 영상을 학교 SNS에서 발견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밥상 위에 계란이 두 개 올라와 있었다.
평소보다 하나 더.
도현은 그 계란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버지도 매일 조금씩 용감해지고 있었다. 그 방법이 계란 하나인 것뿐이지.
2학기가 시작됐다. 도현은 여전히 말이 느렸다. 여전히 귀가 가끔 빨개졌다. 그러나 이제 도현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서운 채로 한 발. 어제보다 딱 한 마디만큼 더.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제나,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