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진 사람

너의 속도대로 가도 인생은 늦지 않는다.

by 이 범


마흔여섯의 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왔다.
윤혜경은 그날도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시장 열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 두부 납품 준비를 해야 했다.


경기도 안산의 작은 재래시장, 스물두 평짜리 두부 가게. 혜경은 그 자리를 열일곱 해째 지켜왔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4월의 새벽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건너편 아파트 창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출근하는 사람들. 혜경은 그 불빛들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손등에 굳은살이 두터웠다. 두부 물을 짜고, 납두리를 들고, 무거운 양동이를 나르다 생긴 것들이었다. 마흔여섯의 손이었다.


"엄마, 또 일어났어?"
열아홉 살 딸 수진이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머리를 반쯤 묶은 채 눈을 비비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올해 대입 재수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 원하던 대학을 떨어졌다.


"어, 너는 왜 깼어. 더 자."
"잠이 안 와."
수진이 냉장고를 열었다. 물을 꺼내 마시더니 혜경 옆에 섰다.


"엄마, 친구 엄마는 요즘 공인중개사 자격증 땄대. 그 나이에."
혜경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엄마도 뭔가 해봐. 맨날 두부만 팔잖아."
수진은 악의가 없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은 말이 칼인 줄 모르고 휘두른다. 혜경은 알았다.


그래도 그 말은 들어가는 데가 있었다. 오래된 상처 위에 새 생채기를 내는 것처럼.
혜경의 남편 박성현은 일곱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였다. 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 뒤로 혜경은 혼자 수진을 키웠다. 시장 가게 하나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할 여유도, 방향을 바꿀 힘도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였다.


오늘 팔고, 내일 또 팔고.
문제는, 그렇게 열일곱 해를 살다 보니 세상이 혜경 혼자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저만치 앞으로 가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
동창 모임에 나가면 늘 그랬다. 누군가는 사업을 키웠고, 누군가는 이직에 성공했고, 누군가는 아이를 해외에 보냈다. 혜경은 늘 "저는 시장에서 두부 팔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늦었다는 감각. 그것이 혜경에게는 봄의 새벽 공기처럼 늘 옆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옆 칸에 새 가게가 들어섰다.



꽃집이었다.
사장은 쉰한 살의 여성이었다. 이름은 조말순. 키가 작고 목소리가 컸다. 처음 인사를 나누던 날, 말순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화분을 들고 왔다.


"나 꽃집은 처음이야. 원래 식당 했는데, 망했어. 그러고 나서 꽃 배우기 시작한 거야. 늦었지?"
혜경이 잠시 봤다.
"얼마나 됐는데요?"
"꽃 배운 거? 한 삼 년?"
"그럼 아직 많이 모르시겠네요."
말순이 크게 웃었다.
"당연하지. 그래도 하고 싶었으니까."
혜경은 그날 말순의 말이 계속 귀에 걸렸다.


하고 싶었으니까. 그 말이 어쩐지 낯설었다. '하고 싶다'는 감각. 혜경에게 그게 마지막으로 있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늦게 피는 것들
5월이 됐다. 시장은 여름을 향해 활기가 붙기 시작했다.
혜경은 어느 날 오전, 가게 문을 열기 전 말순의 꽃집 앞에 잠깐 섰다. 양동이에 물을 꽂은 작약들이 분홍빛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거 뭐예요?"
"작약. 봄에 피는 꽃이야. 모란이랑 헷갈리는 사람 많은데, 작약은 풀이고 모란은 나무야."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응. 그래서 더 좋아. 비슷해도 다른 것들."
말순이 작약 한 줄기를 뽑아 혜경에게 건넸다.


"가져가. 가게에 두면 손님 기분 좋아져."
혜경은 받아들고 두부 가게로 돌아왔다. 쓰던 빈 유리컵에 물을 담고 작약을 꽂았다. 진열대 한쪽에 놓았다. 별것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전, 손님 두 분이 작약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꽃이 예쁘네요."
"어디서 났어요?"
혜경은 옆 꽃집을 가리켰다. 말순은 그날 오후 두 명의 새 손님이 왔다고 기뻐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 사이에 이상한 교류가 생겼다. 혜경은 가끔 두부 한 모를 가져다줬고, 말순은 팔고 남은 꽃 한 줄기를 건네줬다. 돈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닌, 그냥 그 정도의 교류.
그러나 그 안에서 혜경은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말순은 꽃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아도 혼자 중얼거렸다. 어떤 꽃은 빨리 피고 어떤 꽃은 늦게 핀다고. 늦게 피는 꽃이 못난 게 아니라, 그냥 그게 그 꽃의 시간이라고.
"모란은 제일 늦게 펴. 다른 봄꽃 다 지고 나서야 펴. 그래도 제일 화려하지."
혜경은 그 말을 듣고 두부를 썰다가 잠깐 멈췄다.


어느 저녁, 가게 문을 닫고 나서 혜경은 수진에게 물었다.
"너 요즘 공부 어때?"
"몰라. 남들은 다 잘 가는 것 같은데 나만 뒤처진 것 같아."
혜경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근데 수진아, 뒤처진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냥 네 속도인 거지."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차이야?"
"뒤처진 건 누구 뒤에 있는 거고, 내 속도는 내 길이 있는 거야."
수진은 잠깐 혜경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들어봤어."
혜경도 그랬다.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처음이었다. 어디서 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말순의 꽃 이야기에서, 작약 한 줄기에서.
6월 초, 말순이 어느 날 저녁 가게 정리를 하다가 혜경에게 말했다.


"나 요즘 드로잉 배워."
"꽃 그리는 거요?"
"응. 식물 세밀화. 꽃집 하면서 그냥 팔기만 하면 아쉬워서. 직접 그려보고 싶어서."
"언제부터요?"
"두 달 됐나. 아직 엉망이야. 그래도 재밌어."
혜경은 그날 밤 이불 속에서 오래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뭘까.
오래 생각해도 딱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하게 윤곽이 잡히는 게 하나 있었다. 오래전 일이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혜경은 야간에 검정고시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그다음 단계인 대학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고, 수진이 태어났고, 가게가 생겼다.


그 생각이 스물몇 해 만에 다시 떠올랐다.
혜경은 눈을 감았다. 마흔여섯에 대학.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꺼지지 않았다. 모란처럼.


흔들리는 것들
7월이 됐다. 혜경은 조용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방송통신대학교. 야간 수업. 온라인 강의. 마흔 넘어 입학한 사람들의 후기. 혜경은 가게 마감 후 핸드폰으로 하나씩 검색했다. 손에 두부 물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채로.
두 달을 혼자 알아보다가 어느 날 말순에게 말했다.



"나, 대학 가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말순이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혜경을 봤다.
"방통대요?"
"응."
"잘 됐네. 뭐 전공하려고?"
"국문학이요. 옛날부터 글 읽는 게 좋았어서."
말순이 웃었다.


"그럼 해. 왜 안 해?"
혜경은 그 단순한 물음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왜 안 해. 이유가 여러 개였다. 나이, 돈, 시간, 수진. 그러나 말순은 그 이유들을 다 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들보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도.
혜경은 원서를 냈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런데 원서를 낸 다음 날, 수진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들어오다 혜경의 책상 위에 놓인 방통대 팸플릿을 발견했다.
"엄마, 이게 뭐야?"
혜경이 말했다.


"나 대학 지원했어."
수진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엄마가? 대학을?"
"응."
수진의 표정이 복잡했다. 기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얼굴에 겹쳐 있었다. 그리고 수진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혜경은 그날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수진이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당황한 걸까. 아니면, 나한테 뭔가를 느낀 걸까.
다음 날 아침, 수진이 먼저 말했다.


"엄마."
"응?"
"나, 엄마한테 맨날 두부만 판다고 했잖아."
"괜찮아."
"아니야, 미안해.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랐어. 아빠 없이 혼자 나 키우면서, 그러면서도 뭔가 하고 싶었던 거 있었던 거잖아."
수진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혜경은 아이를 안았다. 오래 안았다. 수진이 크게 울었다.

혜경도 울었다. 두부 냄새 나는 앞치마를 두른 채로.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입학 허가가 나고 첫 학기 등록을 앞두고, 혜경은 흔들렸다. 등록금이 부담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수진의 재수 학원비도 있었고, 가게 임대료도 있었다. 계산을 해보니 빠듯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오는 흔들림이 있었다. 마흔여섯에 시작하면 언제 끝나나. 졸업하면 쉰이다. 쉰에 국문학과를 나와서 뭘 한다는 거지. 이게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늦게 피는 척하는 건가.


혜경은 어느 저녁 말순에게 그 말을 했다.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순이 가게 안쪽 작업대에서 꽃을 다듬다가 고개를 들었다.


"혜경 씨, 꽃은 피는 게 목적이 아니야."
"그럼요?"
"피어있는 게 목적이야. 피려고 피는 게 아니라, 피어있기 위해 피는 거야. 그러니까 마흔여섯에 시작해서 쉰에 졸업하면, 쉰에 피어있는 거야. 그게 틀린 게 아니잖아."
혜경은 그 말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도. 새벽에 두부를 누르면서도.
피어있기 위해 피는 것.


쉰에 피어있는 것.
등록 마감일 전날 밤, 혜경은 통장 잔액을 다시 확인했다. 빠듯하지만 됐다. 손이 조금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기대 때문이었다. 오래된 기대. 스물몇 해 전부터 잠들어 있던.
혜경은 등록 버튼을 눌렀다.


너의 속도대로
9월, 첫 강의가 시작됐다.
온라인으로 듣는 국문학 개론이었다. 혜경은 가게 마감 후 저녁 여덟 시에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 교수가 나왔다. 강의실 화면 아래 채팅창에는 수강생들의 이름이 흘러갔다. 스물두 살도 있었고, 서른여덟도 있었고, 쉰다섯도 있었다.


첫 강의 주제는 한국 고전 시가였다. 교수가 시조 하나를 읽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혜경은 그 시조를 들으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흘러가는 것들. 그러나 흘러가기 전에 달빛 아래 잠깐 쉬어 가는 것. 그것이 아깝지 않다는 것.


수업이 끝나고 혜경은 노트에 받아 적은 시조를 다시 읽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혜경은 이 시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흔여섯의 지금, 읽으니 알 것 같았다. 스물의 나이로는 몰랐을 무게로.
그날 밤, 수진이 공부하다가 나왔다.


"엄마, 뭐 해?"
"강의 들었어. 시조 배웠어."
"시조? 옛날 거?"
"응. 들어볼래?"
혜경이 노트를 건넸다. 수진이 소리 내어 읽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뜻이야?"
"흘러가는 물한테, 빨리 간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거야. 어차피 바다 가면 못 돌아오니까. 그러니까 달 밝은 산에서 잠깐 쉬어 가도 된다는 거야."
수진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 같아."
혜경이 웃었다.
"나한테도 하는 말 같아."
두 사람은 그날 밤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했다.

아빠 이야기도 했다. 성현이 좋아하던 음식, 웃을 때 버릇, 수진이 기억하는 아빠의 손. 혜경이 기억하는 아빠의 목소리. 오래 못 했던 이야기들이 늦은 밤 부엌 식탁 위에 하나씩 놓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수진이 말했다.
"엄마, 나 올해 대학 못 가도 괜찮아. 내 속도대로 가면 돼."
혜경은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언제 이렇게 컸나. 아니, 컸다는 표현도 맞지 않았다. 이 아이도 자기 속도로 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이 왔다. 혜경은 첫 학기 중간고사를 치렀다. 두부 가게를 열기 전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손에 두부 물이 배어 있는 채로 노트를 넘겼다. 시험 결과는 평범했다. 반에서 중간 정도. 그러나 혜경은 그 성적표를 오래 바라봤다. 부끄럽지 않았다. 당당했다. 내가 받은 점수니까.


어느 날 동창 모임이 있었다. 혜경은 오랜만에 나갔다. 누군가 물었다.
"혜경아, 요즘 어떻게 지내?"
혜경이 말했다.
"저 방통대 다녀요. 국문학과."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누군가 말했다.


"진짜? 멋있다."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나도 하고 싶었는데."
혜경은 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비웃음을 예상했다. 또는 어색한 침묵을.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의외로 진심 어린 말들이었다.


그리고 혜경은 알았다. 늦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다들 어딘가 뒤처진 것 같다는 감각을 안고 살고 있었다는 것을.
3월, 두 번째 봄이 왔다.


말순의 꽃집 앞에 다시 작약이 나왔다. 분홍빛으로 고개를 드는 봉오리들. 혜경은 그 앞을 지나다 멈췄다.
"작약이 또 피었네요."
말순이 말했다.


"매년 피어. 작년이랑 똑같이. 늦지 않게."
혜경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작년이랑 똑같이, 늦지 않게. 그것은 작약의 속도였다. 남의 속도가 아닌.
혜경은 가게로 돌아와 빈 유리컵에 물을 담았다.

말순이 건네준 작약 한 줄기를 꽂았다.



진열대에 놓았다. 작년과 똑같은 자리에.
그리고 새벽 두부를 썰면서 생각했다.


인생이 늦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시간표에 내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간표는 하나가 아니다. 작약에게는 작약의 시간표가 있고, 모란에게는 모란의 시간표가 있다. 혜경에게는 혜경의 시간표가 있다.


마흔여섯에 시작하는 공부. 열일곱 해째 이어지는 두부 가게. 늦은 밤 부엌 식탁에서 딸과 나눈 아빠 이야기. 그것이 전부 혜경의 속도였다. 느리지 않았다. 그냥, 혜경의 것이었다.


너의 속도대로 가도 인생은 늦지 않는다.
그것은 누가 혜경에게 해준 말이 아니었다. 작약 한 줄기가, 말순의 웃음이, 새벽 강의실 채팅창의 수강생들이, 딸 수진의 눈빛이, 오래된 시조 한 편이 혜경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혜경은 두부를 한 모 썰었다. 칼이 정확하게 내려갔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에필로그
그해 봄, 수진은 대학에 합격했다. 혜경이 원서를 낸 지 1년 반이 지난 뒤였다. 수진은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학과였다. 사회복지학. 혜경은 그 합격증을 가게 계산대 옆에 붙여두었다.


말순은 그해 여름 처음으로 자신이 그린 식물 세밀화를 시장 공동 전시회에 걸었다. 작약을 그린 그림이었다. 엉망은 아니었다. 그리고 혜경의 가게 두부 옆에는 그 그림의 엽서 인쇄본이 한 장 놓였다.


혜경은 방통대 2학년이 됐다. 첫 학기보다 성적이 올랐다. 교수에게 레포트 칭찬을 처음 받던 날, 혜경은 퇴근 후 혼자 시장 안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시켜 먹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기뻤으니까.


어느 날 저녁, 수진이 물었다.
"엄마, 졸업하면 뭐 할 거야?"
혜경이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아직."
"그래도 돼?"
"응. 지금은 지금 하는 게 좋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수진이 웃었다. 혜경도 웃었다.


두부 가게 진열대 위에는 작약 한 줄기가 꽂혀 있었다. 봉오리가 아직 열리지 않은, 그러나 틀림없이 피어날 것이었다. 자기 속도대로. 늦지 않게.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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