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자
작가의 말
이 소설은 빠르게 달리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속도를 숭배하는 세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우리가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나침반 없이 달리는 기차는 아무리 빨라도 결국 길을 잃는다.
달리는 자
서울 광화문 사거리. 오전 7시 23분.
강민준은 오늘도 뛰고 있었다.
지하철 2호선이 시청역에서 출발한다는 문자 알림을 받은 지 47초가 지났다. 그는 계단 세 칸을 한 번에 뛰어오르고, 자동개찰구를 통과하며, 닫히려는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성공이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혀주었다.
서른다섯 살. KM전자 마케팅전략팀 차장. 연봉 8,700만 원.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 MBA 준비 중. 토익 985점. 그것이 세상이 강민준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9시 임원보고, 11시 대리점주 화상회의, 오후 2시 광고대행사 미팅, 4시 팀장급 성과평가 회의, 저녁 7시 거래처 접대. 빈틈 없는 하루. 완벽한 하루. 그는 이런 하루가 좋았다. 아니, 좋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왔다.
지하철 창문 너머로 서울이 스쳐 지나갔다. 을지로, 동대문, 답십리. 도시는 항상 달리고 있었고, 민준도 항상 달리고 있었다. 둘 중 누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시계는 5분 빠르게 맞춰져 있었다. 그래야 항상 늦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에 늦지 않으려는 것인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KM전자 본사 32층. 마케팅전략팀.
"민준 씨, 이번 분기 실적 다시 한번 정리해줘요. 임원들 눈에 확 들어오게."
팀장 박성태의 목소리는 언제나 쫓기는 사람 같았다. 아니, 쫓는 사람 같았다. 민준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말 위에 올라탄 기수인지, 아니면 말 자체인지 헷갈렸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자동적으로 대답하며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2시간 뒤,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이 완성되었다. 그래프는 상승했고, 숫자는 빛났고, 화살표는 모두 위를 향했다. 현실에서 아래를 향하는 것들은 그래프 바깥으로 밀어냈다.
9시 임원보고실. 부사장 이건우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요. 근데 강 차장, 이 부분 좀 더 공격적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 경쟁사가 이미 치고 나가고 있잖아요."
"맞습니다. 추가 예산 집행 시 가능합니다."
"얼마나요?"
"3억이면 충분합니다."
"2억에 맞춰요."
"알겠습니다."
모든 대화는 숫자였고, 모든 숫자는 목표였고, 모든 목표는 더 큰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민준이 회의실을 나오며 시계를 봤다. 9시 47분. 다음 일정까지 73분.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퇴근은 밤 11시였다.
지하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맞은편 좌석에 나이 든 남자가 앉아 졸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에 손이 거칠었다. 민준은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내일 일정을 확인했다.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민준아, 이번 주말에 올 수 있냐?"
민준은 메시지를 읽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답장하면 된다. 아니면 모레. 어차피 아버지는 기다릴 것이다. 아버지는 늘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편의점 앞에서 멈칫했다.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지만 여전히 정장 차림의 서른다섯 살 남자. 피곤한 눈. 어딘가 공허한 표정.
언제부터 저런 눈이 되었을까.
그는 캔맥주 하나를 사서 계단에 앉았다. 서울의 밤이 그 앞에 펼쳐져 있었다. 빛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달리는 빛들. 아무도 서지 않는 빛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그것이 그날 하루 처음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주말 아침. 토요일.
민준의 핸드폰 알람이 7시에 울렸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습관이었다. 아니, 강박이었다. 그는 알람을 끄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MBA 모의고사가 있었다. 오후엔 영어 스터디. 저녁엔 업계 인맥 모임. 그는 달력을 확인하며 일어섰다.
아버지 문자는 여전히 답장하지 않은 채였다.
욕실에서 양치를 하는데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꽤 오랜만이었다. 거울을 보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 자신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잘 지내고 있냐?"
소리 없이 그는 입 모양으로 물었다.
거울 속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칫솔질을 계속했다.
MBA 모의고사장은 강남역 근처의 학원 건물이었다.
민준은 시험지를 펼치다가 잠깐 멈췄다.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연필을 꺼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스물다섯쯤 됐을까.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고, 책상 위엔 에너지 음료 빈 캔이 놓여 있었다.
'나도 저랬었는데.'
열 년 전 민준이 딱 저랬었다. 토익을 위해 밤을 새웠고, 입사 시험을 위해 밥을 굶었고, 승진을 위해 주말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지금 그는 왜 다시 여기에 앉아 있는가.
시험이 시작됐다. 민준은 문제를 풀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언제나처럼.
그런데 마지막 문제에서 손이 멈췄다.
"당신의 10년 후 목표를 영어로 서술하시오."
민준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10년 후. 그는 그 말을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마흔다섯 살의 강민준. 그는 어디에 있을까.
임원? 아마도. 더 많은 회의. 더 큰 숫자. 더 비싼 시계. 더 넓은 사무실.
그것뿐인가.
그는 답란을 채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