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통의 불꽃(헌법전문이해)픽션

3·1운동의 혼, 다시 살아나다

by 이 범


【 주제 : 역사의 계승과 민족의 정체성 】


씨앗

1945년 봄, 경성(京城)의 어느 좁은 골목에 박순례라는 이름의 열여섯 살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박정운은 1919년 3월 1일, 종로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 왜군의 총검에 쓰러진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 날의 기억을 평생 가슴 속에 묻고 딸을 길렀다. 순례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이따금 꺼내어 쓰다듬던 낡은 태극기 한 장, 그리고 '너의 아버지는 이 나라가 살아 있음을 믿었단다'라는 한 마디였다.


순례의 학교 선생님 이유진은 소문 없이 조선어를 가르쳤다. 총독부의 눈을 피해 풀밭에 앉아 '春夏秋冬(춘하추동)'을 받아쓰게 하고, 시조 한 수를 외우게 했다. 순례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글자 하나하나에 숨결이 담겨 있었고, 그 숨결이 모이면 나라가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어느 날 이유진 선생은 순례에게 낡은 등사본 하나를 건넸다. 기미독립선언서였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순례는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울었다.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를 이해한 순간이었다.


바람이 되어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이 흘러나왔다. 거리는 눈물과 함성으로 뒤섞였다. 순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종로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었다.


낯선 이끼리 손을 맞잡고 엉엉 울었다. 그 순간 순례는 느꼈다. 이 땅이, 이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심어놓은 씨앗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38선이 그어지고, 형제들이 남북으로 갈렸다. 서울 하늘 아래 새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독점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유진 선생은 순례에게 말했다. "해방은 끝이 아니란다.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된 거야. 나라를 세우는 싸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렸다. 라디오로 중계를 듣던 순례는 숨을 죽였다. 이 나라의 이름이 정해지고, 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이 글자로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신문의 첫 줄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순례는 그 문장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읽었다. 박정운. 1919년 3월 1일의 그 사람. 이 헌법의 씨앗을 심은 사람들 중 하나.


흔들리는 불꽃
6·25 전쟁이 터졌다. 서울이 사흘 만에 함락되고, 순례는 피난민 행렬 속에 섞였다. 어머니는 피난길에 폐렴으로 쓰러졌다. 순례는 대구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다해 낡은 태극기를 순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너의 아버지가 들었던 거야. 이걸 살아서 들고 돌아가거라."
수용소에는 교사가 없었다. 아이들이 흙바닥에서 뒹굴고,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순례는 스무 살의 나이로 천막 교실을 열었다. 부싯돌로 불을 밝히고, 나무껍질에 글자를 썼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시조를 읽어주고, 헌법의 첫 문장을 함께 외웠다.


'우리 대한국민은…'
어느 날 밤, 폭격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순례는 태극기를 펼쳤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 그 낡고 퇴색한 천 조각이 붉고 파랗게 빛났다. 아이들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순례는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글자들이 폭격 소리를 뚫고 천막 안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기도였고, 선언이었고, 노래였다.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순례는 폐허 위에 선 학교에 교사로 취직했다. 그녀의 첫 수업은 늘 같았다. 칠판에 크게 썼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선생님, 이게 뭐예요?" 아이들이 물었다.


"이건 우리 이야기야. 너희 할아버지의 이야기, 너희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너희들이 써내려갈 이야기."
순례의 교실 창가에는 언제나 낡은 태극기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해가 바뀌고,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자리에서든 흔들릴 때마다, 그 첫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죽음과 희생으로 세워진 나라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법통의 불꽃은, 그렇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교실에서 교실로, 세대에서 세대로 옮겨 붙으며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