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깊은 나무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바치는 소설

by 이 범


주인공 : 송지안(宋知安) — 1980년생, 경북 안동 출신 무형문화재 전승자·문화정책 활동가
배경 : 1980년 안동 ~ 2024년 안동·서울·파리
주제 :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자라는 것이다


할머니의 손
1988년 봄, 경북 안동시 임동면.
송지안은 여덟 살이었다. 할머니 이복순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손이었다. 그 손이 움직이면 아무것도 아닌 흰 삼베가 꽃이 되었다. 나비가 되었다. 산이 되었다. 할머니는 안동포를 짰다. 안동 지역에서 수백 년 내려온 삼베 직물. 여름에도 시원하고, 땀을 잘 흡수하고, 세월이 지날수록 부드러워지는 천.
지안은 방과 후 할머니 옆에 앉아 그 손을 바라보았다. 북이 왔다 갔다 했다. 씨실과 날실이 엇갈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았다. 기계 소리가 아니었다. 숨소리 같았다. 살아있는 것의 숨소리.
"할머니, 이거 언제부터 했어요?"
"내가 열두 살 때 니 증조할머니한테 배웠지. 증조할머니는 그 어머니한테 배웠고."
"그럼 아주 오래된 거네요?"
"그렇지. 이 안동 땅에서 수백 년을 이어온 거야."
"왜 계속해요?"
할머니가 북을 멈추었다. 지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중에 크면 이해할 거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거든. 이 안동포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주는 거야."
지안은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손이 움직일 때 나는 숨소리 같은 소리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 해 여름, 마을 어르신이 찾아왔다.


"복순이, 안동포 짜는 사람이 이 마을에 당신밖에 안 남았어. 젊은 것들은 아무도 안 배우려 하고."
할머니는 말없이 베틀을 쓸었다.
"끊기면 안 되는데."
지안은 그 말을 들으며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끊기면 안 된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그 날은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박혔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 헌법을 배웠다. 선생님이 제9조를 읽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지안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할머니 베틀의 숨소리가 떠올랐다. 계승. 발전. 창달. 그 세 단어가 할머니의 손과 연결되었다. 국가가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면 국가가 할머니의 베틀 소리를 지켜야 한다.


지안은 교과서 여백에 작게 썼다.
할머니의 손이 헌법이다.



뿌리를 찾는 일
2005년 봄, 서울대학교 국악과 대학원.
송지안은 스물다섯 살에 서울대 국악과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전공은 한국 전통 직물 문화와 무형문화재 전승 정책. 이상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국악과에서 왜 직물을 공부하냐고. 지안은 말했다.



"국악도, 직물도, 음식도 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에요. 우리 삶의 결이요."
지도교수 박현정이 웃었다.
"그 '결'이라는 말, 논문에 써요."
지안의 논문 주제는 '안동포 무형문화재 전승 실태와 정책 개선 방향'이었다. 현장 조사를 위해 안동으로 내려갔다.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2001년, 지안이 대학교 1학년 때. 베틀은 헛간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지안은 그 베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먼지 쌓인 나무. 씨실과 날실이 마지막으로 멈춘 자리. 할머니의 마지막 작업이 반쯤 완성된 채로 남아 있었다. 지안은 그것을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 마치 건드리면 사라질 것 같았다.
마을 어르신에게 물었다.


"할머니 말고 안동포 짜시는 분 계세요?"
"한 분 계셔. 그런데 이제 일흔이 넘으셨어. 그분 돌아가시면 끝이야."
끊기면 안 된다. 열두 해 전 마을 어르신이 했던 말. 그리고 지금, 그 끝이 눈앞에 있었다.
지안은 그 날 밤 안동 숙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했다. 전통문화의 계승. 헌법이 말하는 국가의 의무.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안동포 전승자가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후계자가 없는 종목이 얼마나 되는가.


지안은 논문을 쓰는 대신 먼저 배우기로 했다. 안동포를 짤 줄 알아야 정책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을의 마지막 전승자 황정례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 저 배우고 싶어요."
황 할머니가 지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서울서 왔어?"
"안동이 고향이에요. 이복순 할머니 손녀예요."
황 할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복순이 손녀? 복순이가 그렇게 영특한 손녀가 있다고 했는데."
황 할머니는 지안을 베틀 앞에 앉혔다.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삼베 실 잇기. 날실 세우기. 북 던지기. 바디질. 손이 트고 등이 아팠다. 서울 생활에 길든 몸이 하루 종일 베틀 앞에 앉아 있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지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 달이 지나던 어느 날 오후, 지안이 혼자 베틀 앞에 앉아 작업하다가 처음으로 숨소리를 들었다. 씨실과 날실이 엇갈리는 소리. 북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 어릴 때 할머니 곁에서 들었던 그 소리.


지안은 멈추었다. 눈물이 흘렀다.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황 할머니가 뒤에서 말했다.
"울지 마. 베에 눈물 떨어지면 안 돼."
지안은 눈물을 닦고 다시 북을 들었다. 손이 움직였다.


씨실과 날실이 엇갈렸다. 그 소리가 다시 났다. 숨소리 같은 소리. 살아있는 것의 소리.
뿌리가 끊기지 않았다. 지안의 손으로 이어졌다.


전통은 박물관이 아니다
2015년 가을, 서울 인사동과 파리.
송지안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안동포 이수자(履修者)이자 문화재청 무형문화유산 정책 자문위원이었다. 그 해 가을 두 가지 일이 겹쳤다. 기쁜 일과 아픈 일.


기쁜 일은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리는 세계 무형문화유산 전시회에 한국 대표로 초청받은 것이었다. 안동포와 함께.
아픈 일은 안동의 전통 한옥 마을 일부가 재개발로 철거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수백 년 된 고택들이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허물어질 예정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반발했다. 지자체는 개발 논리를 내세웠다.




지안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했다. 파리 전시를 준비하면서, 안동 한옥 보존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안동 현장에서 지자체 담당자와 마주쳤다. 젊은 공무원이었다. 그가 말했다.
"송 선생님, 저도 전통이 중요한 거 알아요. 그런데 주민들이 편한 도로도 필요하고, 개발도 필요하잖아요."
지안이 말했다.


"맞아요. 개발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 한옥들은 안동의 정체성이에요. 관광 자원이기도 하고요. 헌법 제9조는 국가가 전통문화의 계승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말해요. 지자체도 국가의 일부예요."
"헌법까지 끌어오시네요."
"헌법이 왜 있겠어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예요."
결국 고택 일부는 보존되고 일부는 이전 복원하는 절충안이 나왔다.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패배도 아니었다.


파리로 갔다. 유네스코 본부 전시장. 지안은 안동포 베틀을 직접 설치하고 시연을 했다. 여러 나라의 문화 관계자들이 모여들었다. 지안이 북을 던지고 바디질을 하는 손을 바라보았다.
한 프랑스 큐레이터가 물었다.
"이 기술이 몇 년이나 됐습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수백 년이요."
"왜 계속합니까?"
지안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에요."
큐레이터가 끄덕였다.
"그것이 문화유산의 본질이죠."
그 날 밤, 파리 숙소에서 지안은 안동에 전화했다. 보존 운동을 같이 했던 마을 어르신에게.
"어르신, 고택 보존됐어요. 파리에서도 안동포 잘 보여줬어요."
어르신이 웃었다.



"잘 했어. 지안아, 우리 문화가 파리까지 갔구나."
"가는 게 아니에요. 원래부터 세계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있는 거였어요. 우리가 그걸 몰랐던 거예요."
전화를 끊고 지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리의 밤. 에펠탑이 보였다. 프랑스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싸워왔다. 다른 나라도 그랬다. 문화란 그런 것이었다. 저절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가려는 사람이 있어야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발전해야 했다. 창달해야 했다. 헌법이 계승과 발전을 함께 말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전통은 박물관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현재 속에서 계속 숨을 쉬어야 했다.


지안은 수첩을 꺼내 썼다.
전통은 뿌리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쓰러진다. 그러나 뿌리만 있고 가지가 없으면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계승은 뿌리를 지키는 것이고, 발전은 새 가지를 뻗는 것이다. 창달은 그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다
2024년 봄, 경북 안동 전통문화 콘텐츠 센터.
송지안은 마흔네 살이었다. 3년 전 안동에 내려와 '뿌리깊은 나무 문화센터'를 열었다. 전통 직물, 전통 음식, 전통 건축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공간이었다.


그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센터의 첫 번째 전승자 배출. 지안이 3년 동안 가르친 스물두 살 이서현이 안동포 이수 심사를 통과하는 날이었다.


서현은 서울 출신이었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다 지안의 강의를 듣고 안동으로 내려온 아이였다. 처음에는 전통 직물을 현대 패션에 접목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3년 동안 베틀 앞에 앉으면서 무언가가 바뀌었다. 접목이 아니라 본질을 이해하게 됐다고 서현은 말했다.


심사가 끝났다. 이수증이 수여되었다. 서현이 울었다. 지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3년 전 황정례 할머니 베틀 앞에서 울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베에 눈물 떨어지면 안 돼.
지안이 서현에게 말했다.


"울지 마. 베에 눈물 떨어지면 안 돼."
서현이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선생님, 그 말 할머니한테 들으셨죠?"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 눈빛이 그 말 할 때 달라져요."
지안은 웃었다. 눈물이 같이 나왔다.


심사가 끝나고 센터에서 조촐한 자축 자리가 열렸다. 지안은 잠시 자리를 벗어나 센터 뒤편으로 걸어갔다. 센터 마당 한켠에 오래된 뽕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마을에서 수백 년을 산 나무였다. 안동포의 원료인 삼은 아니었지만, 이 땅에서 오래 살아온 나무라는 것이 좋아서 심사도 없이 마음에 들었다.



지안은 그 나무에 손을 댔다. 거칠고 단단한 수피. 봄이어서 새 잎이 돋아 있었다. 오래된 뿌리에서 새 잎이 나는 것.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거든.
황정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지 마. 베에 눈물 떨어지면 안 돼.


지금 안에서 서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안은 나무에서 손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동의 봄 하늘. 높고 맑았다. 저 하늘 아래 이 나무가, 이 뿌리가, 이 사람들이 있었다.
헌법 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국가는 노력하여야 한다. 그 노력은 어디서 오는가. 지안 같은 사람에게서 온다. 서현 같은 사람에게서 온다. 황정례 할머니 같은 사람에게서 온다. 그리고 할머니 이복순에게서 온다. 국가는 그 사람들을 뒷받침해야 한다. 법을 만들고, 예산을 배정하고,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진짜 노력은 그 사람들이 한다. 베틀 앞에 앉는 사람들이. 손이 트고 등이 아파도 북을 던지는 사람들이. 끊기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안은 센터 안으로 돌아갔다. 서현이 새 작품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안동포 전통 문양을 현대 의상에 접목하는 것. 지안은 옆에 앉아 들었다. 좋았다. 뿌리에서 새 가지가 자라는 소리였다.


"선생님, 어때요?"
"좋아. 근데 문양의 의미부터 완전히 이해하고 시작해. 의미 모르고 쓰면 장식이 돼. 의미 알고 쓰면 문화가 돼."
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했다.
지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창달이다. 전통이 과거의 유물로 박물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뿌리가 깊은 나무가 높이 자라듯, 전통이 깊은 문화가 더 멀리 뻗어 나가는 것.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나무가 꽃을 피울 때, 문화는 완성된다.



에필로그
그 해 여름, 서현이 파리 패션위크에 안동포 문양을 접목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지안은 서울에서 스트리밍으로 그 장면을 보았다. 런웨이 위에서 안동포의 결이 현대적인 실루엣으로 걸어나올 때, 지안은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서현'이 떴다.



"선생님, 보셨어요?"
"봤어. 잘 했어."
"선생님 할머니 생각났어요. 안동포가 파리 런웨이를 걸으니까."
지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현아, 그거 알아? 전통이 이렇게 되는 거야. 한 사람의 손에서 다음 사람의 손으로 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거야. 그런데 뿌리는 같은 거야. 안동 땅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온 것이, 네 손을 통해 파리

런웨이까지 간 거야."
서현이 말했다.


"선생님, 저 계속할게요."
"알아."
전화를 끊고 지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여름 하늘. 구름이 흘렀다.
저 구름이 안동 하늘 위에도 있을 것이었다. 뽕나무 위에도. 지금쯤 새 잎이 더 무성해졌을 것이었다. 오래된 뿌리에서, 새 잎이.
지안은 노트를 펼쳤다. 새 장에 썼다.


계승은 과거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발전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창달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헌법 제9조가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노트를 덮었다. 내일은 센터에서 새 수강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다음 달에는 초등학교 전통문화 체험 수업이 있었다. 내년에는 안동포 국제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었다.


할 일이 많았다. 뿌리를 지키는 일. 가지를 뻗는 일. 꽃을 피우는 일.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나무를 키우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제9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