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의 평등에 바치는 소설
같은 저울 위에서
주인공 : 이수현(李秀賢) — 1977년생, 경남 창원 출신 여성 노동법 전문 판사
배경 : 1977년 창원 ~ 2024년 서울·대법원
주제 :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그것이 법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이다
기울어진 저울
1988년 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이수현은 열한 살이었다. 아버지 이덕수는 창원 공단의 자동차 부품 공장 노동자였다. 어머니 강순자는 인근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돌아왔다. 수현은 학교를 마치고 혼자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그 해 봄, 아버지가 다쳤다. 공장 기계에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는 사고였다. 병원에서 접합 수술을 받았다. 두 달 가까이 일을 못 했다. 그 사이 공장 측에서 연락이 왔다. 산재 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대신 위로금을 주겠다고. 이대로 합의하면 다음 달부터 다시 출근할 수 있다고.
아버지는 그 합의서에 서명했다.
수현은 그 날 밤 아버지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 접합된 손가락. 그 손에 이름을 쓰게 해서 받은 합의서.
"아버지, 억울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말했다.
"억울하지. 근데 어떡하냐. 안 하면 잘린다는데."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걸 알아도 어떻게 못 할 때가 있어."
수현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안 되는 걸 알아도 어떻게 못 할 때. 그것은 왜 생기는가. 힘이 없어서였다. 아버지는 공장보다 약했다. 그 약함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삼켰다.
며칠 뒤 어머니의 직장 동료가 집에 왔다. 방직공장에서 임금을 체불당한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를 했다. 사장이 임금을 주지 않고, 신고하면 해고하겠다고 협박한다고. 어머니의 동료는 울었다.
수현은 방에서 그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서 물었다.
"아줌마, 신고하면 안 돼요?"
어른들이 수현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왜 그런 걸."
수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억울하면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쁜 짓 한 사람이 벌 받아야 하잖아요."
어머니가 "수현아" 하며 말리려 했지만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근데 세상이 그렇게 안 돼."
수현은 그 말이 싫었다. 세상이 그렇게 안 돼. 그러면 세상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면 되지 않는가.
중학교 사회 시간에 헌법을 배웠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수현은 그 문장 아래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여백에 썼다.
그러면 왜 아버지는 억울해도 참아야 했나.
그것이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수현의 평생을 이끌었다.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진로 상담에서 물었다.
"수현아, 꿈이 뭐야?"
수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판사요."
"왜?"
"저울이 기울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선생님이 잠시 수현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 말, 잊지 마라."
저울을 바로 세우는 일
2006년 봄, 서울중앙지방법원.
이수현은 스물아홉 살에 사법시험을 패스했다. 연수원을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었다. 첫 발령은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부. 노동 사건 전담.
첫 해에 맡은 사건 중 하나가 기억에 남았다. 의뢰인은 중소기업 여성 직원 박혜진. 출산 후 복직했다가 부당해고를 당한 경우였다. 회사 측 주장은 '경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남성 직원들은 한 명도 해고되지 않았다.
수현은 서류를 꼼꼼히 검토했다. 패턴이 보였다. 회사는 출산 후 복직한 여성 직원들을 선별해서 구조조정 명단에 넣었다. 증거는 간접적이었다. 그러나 정황은 분명했다.
판결을 쓰는 날 밤, 수현은 연구실에 혼자 남아 법전을 폈다. 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그리고 남녀고용평등법. 사용자는 근로자의 임신·출산을 이유로 해고하거나 불이익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수현은 판결문을 썼다. 법의 언어로. 그러나 그 안에는 아버지의 붕대 감긴 손이 있었다. 어머니 동료의 눈물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피고는 원고가 출산 후 복직한 여성 근로자라는 사정을 구조조정 대상 선정에 있어 실질적 고려 요소로 삼았음이 인정된다. 이는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 원칙 및 남녀고용평등법에 위반된다. 따라서 이 사건 해고는 무효이다.
판결이 나왔다. 박혜진이 이겼다.
그 날 법정에서 박혜진이 판결문을 들고 나오며 법원 복도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수현은 법복을 입고 판사실로 돌아가다 그 모습을 보았다.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판사실에 들어와 문을 닫고 잠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 저 오늘 저울을 바로 세웠어요.
그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그 다음 사건이 왔다. 또 그 다음이. 노동 현장의 평등은 선언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결 하나하나로, 법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 하나하나로 이루어졌다.
2010년, 수현은 노동법 전문 연구를 위해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독일의 노동 법원 시스템을 배웠다. 집단 교섭, 산업 민주주의, 동등 대우 원칙. 돌아와서 판결문에 그 원칙들을 적용했다.
어떤 선배 판사가 말했다.
"수현 판사, 너무 진보적인 판결 아니야? 기업들이 불만이야."
수현은 말했다.
"헌법이 말하는 평등을 적용한 겁니다. 헌법이 진보적입니까?"
선배가 잠시 멈추었다가 웃었다.
"그 말 틀리진 않네."
수현은 승진에 관심이 없었다. 관심 있는 것은 판결이었다. 그 판결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것이었다.
특권과 평등 사이
2019년 겨울, 서울고등법원.
이수현은 마흔두 살이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그 해 겨울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항소심으로 올라왔다.
피고인은 대기업 회장 아들. 이름이 사건을 대신했다. 재벌 3세. 해외에서 마약을 소지하고 밀반입한 혐의.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검찰이 항소했다.
수현이 재판장이었다.
법원 안팎이 시끄러웠다. 언론이 매일 보도했다. 단체들이 엄벌을 요구했다. 반대로 피고인 측에서는 선처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수백 장 들어왔다. 재계 인사들의 이름이 그 탄원서에 있었다. 국회의원의 이름도 있었다.
수현은 그 탄원서들을 서랍에 넣었다. 한 번 읽었다. 그리고 서랍을 닫았다.
법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이 말했다.
"피고인은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기여도가 높습니다. 아버지 회사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수현은 그 말을 들으며 메모를 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 그것이 선처의 이유가 되는가.
아버지가 수천 명을 고용했다는 사실이 아들의 범죄를 경감시키는가. 헌법 제11조 제3항.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부모의 지위가 자녀에게 특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재력이 법 앞의 평등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판결 선고일. 법정이 가득 찼다. 언론 카메라가 많았다. 수현은 법복을 입고 재판장석에 앉았다. 평소와 같은 자리. 평소와 같은 자세.
주문을 읽기 전에 수현은 한 가지를 생각했다. 법원은 저울이다. 이 저울은 한쪽에 권력이 얼마나 많이 올려져도 기울어지면 안 된다.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법정이 술렁였다. 피고인 측에서 소리가 났다. 기자들이 뛰어나갔다.
수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판결 이유를 읽었다.
"이 법원은 피고인의 사회적 지위나 가족의 경제적 기여도가 형량 결정에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다. 헌법 제11조는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한다.
동일한 범죄에 대해 피고인의 신분에 따라 다른 형량을 선고하는 것은 그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떨지 않으려 했지만, 떨렸다.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어릴 때 공책에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항상 있었던 말. 저울이 기울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
그 말을 오늘 법정에서 말했다.
법정을 나오며 수현은 창밖을 보았다. 서울의 겨울 하늘. 차갑고 맑았다.
전화가 왔다. 아버지였다.
"수현아, 뉴스에 나왔더라."
"봤어요?"
"응. 판결 잘 했어."
"아버지."
"응?"
"아버지 손가락 기억해요? 그 합의서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기억하지."
"오늘 그거 때문에 판결했어요."
아버지가 오래 말이 없었다. 수현도 말하지 않았다. 겨울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수현아."
"응, 아버지."
"고맙다."
수현은 전화를 끊고 오래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쌓였다. 흰 눈. 어떤 발자국도 없는 흰 눈.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그것이 법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평등은 완성되지 않는다
2024년 봄, 대법원.
이수현은 마흔일곱 살이었다.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임명 전 청문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청문회에서 의원들이 물었다. 과거 판결에 대해. 재벌 사건 판결에 대해. 노동 사건에서 노동자 편을 든 것에 대해.
한 의원이 말했다.
"이 판사님, 편향된 판결을 해온 것 아닙니까?"
수현은 마이크 앞에서 잠시 생각했다.
"편향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헌법 제11조를 기준으로 판결했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그 평등을 기준으로 판결한 것이 편향입니까?"
"그러나 기업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업도 법 앞에 평등합니다. 기업이 법을 어기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기업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헌법 제11조가 말하는 것입니다."
청문회장이 조용해졌다.
또 다른 의원이 물었다.
"판사님, 법 앞의 평등이 완성되었다고 봅니까?"
수현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니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지금도 성별 때문에, 출신 때문에, 장애 때문에,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법이 선언했다고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언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법원의 일이고, 그것이 저의 일입니다."
청문회가 끝났다. 대법관 임명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임명식 날, 수현은 대법원 건물 앞에 잠시 섰다. 그 건물 위에 저울을 형상화한 문양이 있었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양손에 저울.
수현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오래.
어릴 때 아버지의 붕대 감긴 손. 어머니 동료의 눈물. 공책에 쓴 질문. 그러면 왜 아버지는 억울해도 참아야 했나. 박혜진의 소리 없는 눈물. 재벌 사건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아버지의 목소리. 고맙다.
수현은 대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법관석에 앉았을 때, 수현은 생각했다. 이 자리가 더 높은 자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더 높은 것은 권위가 아니다. 더 높은 책임이다. 이 자리에서 내리는 판결이 더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저울을 더 단단히 잡아야 한다.
수현의 첫 대법원 판결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평등은 선언이 아니다. 매일의 실천이다. 법원은 그 실천의 마지막 보루이며, 동시에 첫 번째 출발점이다.
퇴근길, 수현은 지하철을 탔다. 사복 차림이었다. 옆에 다양한 사람들이 탔다. 노동자, 학생, 노인, 외국인. 같은 지하철 칸. 같은 공간.
수현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헌법 제11조의 주인이었다. 모두 법 앞에 평등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평등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지하철이 달렸다. 서울이 창밖으로 흘렀다. 봄이었다.
저울은 기울지 않는다. 그것이 법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이다.
에필로그
이수현 대법관이 첫 번째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집필했다.
사건은 비정규직 차별 사건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 헌법 제11조와 근로기준법의 관계.
판결의 결론은 비정규직 차별이 헌법 제11조의 평등 원칙에 위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판례를 바꾸는 판결이었다.
판결문 말미에 수현이 쓴 문장이 오래 인용되었다.
헌법 제11조가 말하는 평등은 형식적 평등만이 아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대우를 받는 실질적 평등을 포함한다. 저울의 눈금은 직업의 안정성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그 판결이 나온 날 밤, 수현은 창원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저 오늘 중요한 판결 했어요."
"뭔데?"
"비정규직이 정규직이랑 같은 일 하면 같은 대우 받아야 한다는 판결이요."
아버지가 한참 침묵했다.
"그거, 오래 걸렸네."
"네. 오래 걸렸어요."
"근데 됐네."
"됐어요."
전화를 끊고 수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원의 밤이 서울의 밤과 이어져 있었다. 같은 하늘 아래.
아버지의 공장이 있는 쪽 하늘. 어머니의 방직공장이 있었던 쪽 하늘. 그 하늘 아래 수없이 많은 이덕수들이, 강순자들이 살고 있었다.
저울은 아직 완전히 바로 서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조금 더 바로 섰다.
그것이 수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