誦呪拒妓 (송주거기)

주문을 외며 기생을 거부하다

by 이 범


고금소총(古今笑叢) 제일화(第一話) 현대소설판

원전(原典):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

재화(再話): 홍만종(洪萬宗) 『고금소총(古今笑叢)』


별처럼 흐르는 이름

숙종(肅宗) 재위 초엽, 한양(漢陽) 남부(南部) 훈도방(訓導坊) 어귀에 이름이 꽤 알려진 선비 하나가 살았다. 성은 박(朴), 자(字)는 군수(君秀), 나이 서른여섯.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출신으로 세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모두 떨어지고 지금은 글방을 열어 동네 아이들에게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며 소일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의 특별한 집착이 있었으니, 바로 辟邪(벽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주문(呪文)에 대한 깊고 유별난 믿음이었다.



박군수가 벽사 주문에 심취하게 된 것은 아버지 박진사(朴進士) 때문이었다. 아버지 박진사는 왕년에 이름난 도학자(道學者)로, 임종을 앞두고 열두 살 아들에게 낡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이 안에 도가(道家)의 구결(口訣)이 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반드시 있느니라. 狐狸(호리)— 여우 귀신과 魅鬼(매귀)— 도깨비가 인간의 形(형)을 빌려 다가오는 법이다. 이 주문을 꿰뚫으면 어떤 요사한 것도 감히 너를 범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날 이후 박군수의 뼛속 깊이 새겨졌다. 그는 아버지의 주문을 수백 번 필사(筆寫)하고, 또 수백 번 입으로 외워 마침내 잠결에도 술술 읊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집 네 귀퉁이에는 부적(符籍)을 붙이고, 대문 앞에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꽂아두었다. 그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우고 북두칠성(北斗七星)에 절을 올렸다.


이웃들은 그를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렀다. 아이들은 "주문 선비"라 하고 어른들은 "벽사진인(辟邪眞人)"이라 불렀다. 놀리는 말이었으나 박군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이름이 자랑스러웠다.


그해 가을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저녁, 박군수의 친구 최덕범(崔德範)이 찾아왔다. 최덕범은 호방한 성격의 전직 군관(軍官)으로, 술과 여인을 밝히기로 한양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들었다.

"군수야, 오늘 밤 나와 함께 가자."

"어딜?"

"인왕산(仁旺山) 아래 새로 생긴 주루(酒樓)다. 아직 열흘도 안 됐는데 벌써 한양이 다 안다더라. 거기 기생이 하나 들어왔는데…."

최덕범은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별(星)이라는 이름을 가졌지. 星山月(성산월). 산(山)이 품은 달빛 같은 별이라는 뜻이야. 얼굴이며 가락이며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더라. 가지 않을 테냐?"

박군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기방(妓房)이 낯선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항상 불편했다. 그 불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알았다. 같이 가지."

그것이 이 이야기의 첫 번째 단추였다.


성산월(星山月), 그 빛의 정체

주루의 이름은 月下軒(월하헌)이었다. 인왕산 자락을 등지고 청계천(淸溪川) 상류 쪽을 바라보는 이층짜리 기와집으로, 그날 밤은 문어귀에서부터 비파(琵琶) 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 넘쳤다. 박군수와 최덕범이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노파가 반색하며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좋은 날 좋은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넓은 마루에 촛불이 탐스럽게 켜져 있었다. 아직 자리가 덜 차서 한쪽 구석에 서너 명의 무리들이 막 앉는 중이었다. 박군수는 창가 자리를 골랐다. 창 너머로 가을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고, 구름 사이로 반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술이 한 순배 돌았을 즈음, 방문이 열리며 성산월이 들어왔다.

박군수는 순간 숨이 막혔다.

그녀는 스물서너 살 됨 직한 여인이었다. 비취색(翡翠色) 저고리 위에 진홍(眞紅) 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옥비녀(玉─) 하나를 꽂았을 뿐인데도, 방 안의 촛불이 모두 그녀를 향해 기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굴은 달빛처럼 창백하리만치 희었고, 눈은 먼 산을 보는 것처럼 깊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리자 옥비녀 끝에서 작은 빛 하나가 튕겨 나왔다.

저 여인은…

박군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삐걱거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狐狸(호리)는 人形(인형)을 빌린다.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나타나 선비의 氣(기)를 빼앗느니라.

성산월이 자리에 앉아 가야금(伽倻琴)을 무릎에 올렸다. 첫 줄을 뜯자마자 박군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가 너무 맑았다. 인간의 손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인가 싶을 만큼.

아름다움이 지나치면 疑心(의심)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최덕범은 이미 성산월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넋이 빠져 있었다. 박군수만이 홀로 팔짱을 끼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는 몰래 소매 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찾아 쥐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낡은 주머니였다.

저 옥비녀에서 빛이 났다. 촛불이 없어도 혼자 빛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바로 요물(妖物)이다.


가야금이 멈추고 성산월이 눈을 들어 박군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박군수의 가슴에 바늘처럼 박혔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는 가락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목소리가 물처럼 흘렀다. 박군수는 이를 악물었다.

저 소리도 요물의 술법이다. 인간의 목소리가 저리 고울 수는 없다.


"아니, 괜찮소."

박군수는 짧게 대답하고 눈을 돌렸다. 그러나 방 안이 좁아서 어디를 봐도 성산월의 모습이 시야에 걸렸다. 촛불이 그녀를 따라 흔들렸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비취색 저고리 끝에서 미세한 빛이 어른거렸다.

빛. 또 빛이다. 이건 분명히 狐精(호정)— 여우 정령이다.


최덕범이 성산월의 손을 잡으며 크게 웃었다.

"이보게 군수야, 자네는 왜 그리 굳어 있나? 오늘 밤은 공자님도 맹자님도 없는 곳이야. 달빛 아래 좋은 술이 있고 이렇게 고운 분이 계신데."

박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성산월의 발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이 보이지 않는다. 治마 자락에 가려서 발이 보이지 않는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여우 귀신은 발을 숨긴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주문을 외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성산월이 다시 자리를 일어나 박군수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술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어 올렸다.

"선생께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박군수는 벌떡 몸을 뒤로 물렸다.


"됩니다."

성산월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모욕당한 것도 아닌데 그 표정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최덕범도 잠시 멈칫했다.

"군수야, 왜 그러는 게냐?"

"나는 괜찮다네. 자네나 받게."

그러나 성산월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박군수의 곁에 앉으며 다시 한번 잔을 들었다.



"선생, 제가 어딘가 거슬리게 해드렸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손님으로서 제 성의만큼은 받아 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또 그 물처럼 고운 소리였다. 박군수의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피부에서 정말로 미세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촛불 때문이었겠지만 박군수의 눈에는 그것이 결코 촛불의 반사가 아니었다.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사람 형상을 완벽히 흉내 낸다. 목소리도, 눈빛도, 심지어 체온도. 그러나 주문 앞에서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박군수는 소매 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리고 나직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急急如律令(급급여율령)— 하늘의 법도에 따라 속히 명하노니. 東方靑帝(동방청제) 西方白帝(서방백제) 南方赤帝(남방적제) 北方黑帝(북방흑제) 中央黃帝(중앙황제)— 오방신장(五方神將)이시여, 狐狸魅鬼(호리매귀)를 이 자리에서 물리치소서.


吾奉太上老君急急如律令(오봉태상노군급급여율령)!"

방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최덕범은 입을 떡 벌렸다. 다른 손님들도 하던 대화를 멈추고 박군수를 쳐다봤다. 심지어 비파를 켜던 악공도 손을 멈췄다.


성산월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서서히 그 뜻을 이해한 듯 볼이 붉어졌다. 기생에게 그것도 온 사람들 앞에서 '호리매귀를 물리치는 주문'을 들이댔으니, 이보다 더한 모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성산월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고요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박군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봤는가? 주문을 듣자마자 달아났지. 그것이 바로 요물의 증거일세."

최덕범은 말문이 막혀 한참 박군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군수야…저 아가씨가 달아난 게 아니라 네 무례함을 피한 게 아닐까?"

"무슨 소리. 저 기생의 발이 보였는가? 내내 발을 숨기고 있었네. 그리고 이 촛불이 줄곧 저 여인 쪽으로 기울었네. 심상찮은 일이야."


"…촛불은 창문 쪽 바람에 기운 것이고, 치마 속 발은 앉아 있으면 다 안 보이는 법이야, 이 사람아."

박군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오늘 밤 한 선비로서 요사한 기운으로부터 이 자리를 지켜냈다고 굳게 믿었다.



다음날 아침

다음 날 아침, 박군수는 최덕범으로부터 낯선 사내 하나를 소개받았다. 월하헌의 주인 노파가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성산월 씨가 선생님께 전하는 말씀이 있다 하여 왔습니다."

박군수는 내심 긴장했다. 혹시 어젯밤 자신이 요물을 제대로 쫓아낸 것에 대해 무슨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싶었다.


심부름꾼이 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박군수가 펼치자 단아한 궁체(宮體)로 단 두 줄이 적혀 있었다.

"선생께서 주문을 외시는 동안, 저는 처음으로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요물이 아닌 사람도 때로는 달아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박군수는 그 쪽지를 세 번 읽었다.

네 번째 읽으려다 멈췄다. 다섯 번째 읽지 않았다.

최덕범이 그 쪽지를 슬쩍 들여다보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군수야, 그 주문이 여우는 못 쫓고 사람을 쫓았구나!"

박군수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이마에서 귀밑까지, 귀밑에서 목덜미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박군수는 벽사 주문을 아주 그만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거기에 보탰다. 주문을 외기 전에 반드시 먼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살펴보는 것. 그게 여우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인지를.

그리고 혹자(或者)는 전한다. 그 박군수가 이듬해 봄에 다시 월하헌을 찾았다고. 물론 이번에는 주문 대신 제대로 된 술 한 상을 차려 들고서.


성산월이 그를 맞이했는지, 아니면 끝내 외면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고금소총(古今笑叢)도 그 이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만은 기록에 남았다.


주문을 외워 기생을 쫓아낸 선비 이야기가 한양 저잣거리에 퍼졌을 때, 사람들은 배를 쥐고 웃었다. 그러나 웃음이 가신 자리에는 이런 물음이 남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요물'이라 이름 붙여 달아나게 만들었는가.


박군수의 소매 속 비단 주머니는 오늘도 거기 있다. 낡고 해어지고 이미 실밥이 뜯겨 있지만, 그 안에 적힌 주문은 여전히 온전하다.

다만 그 주문이 쫓아내는 것이 과연 여우인지, 아니면 자신의 두려움인지— 박군수는 아직도 잘 모른다.


끝 (終)

"急急如律令(급급여율령)— 속히 명하노니, 이 웃음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고금소총 서문(序文) 정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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