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97)

이산갑과 정혁진

by seungbum lee

밤이 깊어갈 무렵, 이산갑은 산돌이에게만 행선지를 알리고 집을 나섰다. 달빛만을 의지해 익숙한 산길을 올랐다.

중턱쯤 올라가자 바위 틈새에 숨겨진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이산갑이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은밀한 장소였다.

동굴 안에는 이미 누군가 작은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혁진이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정 형, 고생이 많네."

두 사람은 동굴 안 평평한 바위에 마주 앉았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형님, 요즘 요미우리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정혁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네. 한호건을 통해 전해 들었어."

"한호건은 잘하고 있습니다. 요미우리는 아직 그가 우리 편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산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당 화재 수사는 어떻게 되고 있나?"

"형님, 용의자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혁진이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조병수의 행적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화재 당일 밤, 조병수가 시마다 겐죠와 만났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산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조병수와 시마다가?"

"예, 그리고 화재 다음 날 조병수가 갑자기 큰돈을 손에 넣었다는 정황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병수가 시마다에게 돈을 받고 학당에 불을 지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영 선생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차용증을 위조한 것이고요."

이산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병수 그 자가... 결국 그런 짓을..."

"하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목격자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혁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제가 조선총독부 특파 수사관 신분을 이용해서 좀 더 깊이 파고들어보겠습니다."

"고맙네, 정 형. 하지만 자네도 조심해야 해. 자네의 정체가 발각되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영 선생의 억울함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동굴 밖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 형, 한도회 조직은 안전한가?"

"대부분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요미우리가 백정치를 통해 정보를 캐내려 하고 있습니다."

"백정치..."

이산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친구도 참 불쌍한 사람이야.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지금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

"김상돌이 그를 포섭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조직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김상돌도 위험한 인물이야. 그의 아들 한오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지?"

"예, 한오는 중국에서 조선 독립군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혁진은 다시 수첩을 펼쳤다.

"형님,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일제가 곧 창씨개명을 강제로 실시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징용과 징병도 본격화될 것입니다."

이산갑의 얼굴이 굳어졌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형님, 우리 한도회 회원들도 대비해야 합니다. 누가 끌려갈지 모르니까요."

"알겠네. 회원들에게 은밀히 전달하겠네."

정혁진이 이산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님, 그리고... 형님께 개인적으로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서영 선생과 형님은... 어떤 사이셨습니까?"

이산갑은 잠시 망설였다.

"왜 그런 것을 묻나?"

"서영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감님께 잘해드리라'고..."

정혁진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때 선생님의 눈빛을 보니, 형님을 무척 아끼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산갑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영이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네. 동지이기도 했고, 친구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네."

"형님..."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어. 이 나라가 독립하면, 평화가 오면, 그때 말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산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국 영원히 전할 수 없게 되었네."

정혁진도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형님, 서영 선생도 분명 형님의 마음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럴까..."

"분명합니다. 선생님께서 형님을 바라보시던 그 눈빛... 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산갑은 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이것을 서영이랑 언약의 반지일세 학당 화재 잿더미 속에서 찾았네 . 하지만 끝내."

정혁진은 그 반지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형님, 서영 선생의 원수를 꼭 갚아드립시다. 그것이 형님께서 선생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

"그래...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야 해."

이산갑이 반지를 다시 품에 넣었다.

"정 형, 우리가 함께 서영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세. 그리고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세."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두 사람은 동굴 안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조병수와 시마다를 조사하는 방법, 한도회 조직을 보호하는 방안, 그리고 학당 재건을 위한 전략...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의 의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형님, 이제 내려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너무 오래 있으면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 정 형도 조심해서 가게."

두 사람은 동굴을 나섰다. 정혁진은 먼저 산을 내려가고, 이산갑은 잠시 후에 따라 내려갔다.

달빛 아래로 이산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영아, 조금만 기다려다오. 우리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테니.'

산 아래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 들렸다. 이산갑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