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혁진과이산갑
학당 터. 탄 잔해들이 아직 남아있는 현장에 이산갑이 서 있었다. 그는 새로 지을 학당의 위치를 살피며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산갑 씨, 현장 조사를 위해 왔습니다."
정혁진이 공식적인 어조로 말하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조사 서류와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아, 정혁진 수사관님. 어서 오십시오."
이산갑도 격식을 차리며 정혁진을 맞았다. 주변에 몇몇 인부들과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재 발생 지점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예, 이쪽입니다."
두 사람은 탄 건물의 잔해 사이를 걸었다. 정혁진은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진지하게 조사하는 척했다.
"저기, 물 좀 가져다주시오."
이산갑이 인부에게 말했다.
"예, 어르신."
인부가 물동이를 들고 멀리 우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혁진은 잔해 뒤편으로 이산갑을 이끌었다. 이곳은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형님."
정혁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호건으로부터 중요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김상돌, 시마다 겐죠, 백정치... 이 세 사람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산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예,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서 학당 화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정혁진은 품에서 한호건이 작성한 두루마리를 꺼냈다.
"시마다가 '학당 일은 잘 처리됐다'고 했고, 김상돌이 '조병수도 입을 다물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산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조병수가..."
"예, 조병수가 시마다에게서 돈을 받고 학당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정혁진이 카메라를 들어 잔해를 찍는 척하며 계속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백정치입니다. 조병수가 그를 이용해 형님을 모함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백정치를?"
"유언비어 작전이라고 합니다. 형님이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운영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본 경찰에 신고하려는 것입니다."
이산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정치 그 친구... 결국 그 길로 가고 마는구나."
"형님, 그리고 형님의 동생 분들도 위험합니다. 산우 형님, 산호 형님, 그리고 은혜 수녀님까지 감시 대상에 올라있습니다."
"내 동생들까지..."
이산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혁진은 잔해 속에서 탄 목재 조각을 집어 들며 자연스럽게 조사를 계속하는 척했다.
"형님, 제 생각에는 조병수를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겁니다. 시마다와의 금전 거래 내역, 화재 현장의 석유 흔적, 그리고 위조된 차용증..."
정혁진이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 부분을 보십시오."
그는 화재 발생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을 가리켰다.
"석유를 뿌린 흔적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전문가가 보면 의도적인 방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병수를 지목할 수 없지 않나?"
"맞습니다. 그래서 시마다와의 거래 내역이 필요합니다."
정혁진은 카메라로 현장을 계속 찍으며 말했다.
"제가 조선총독부 특파 수사관 신분으로 시마다의 금전 출납 기록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화재 전후로 큰돈이 움직였다면 증거가 될 것입니다."
"시마다가 순순히 내놓겠는가?"
"공식 조사니까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혁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면 요미우리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이산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지만 정 형, 자네도 위험해질 수 있어."
"괜찮습니다, 형님. 서영 선생님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멀리서 인부가 물을 가져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공식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화재 발생 시각이 밤 11시경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목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보고서에 기록하겠습니다."
정혁진이 수첩에 뭔가를 적는 척했다.
인부가 물동이를 내려놓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형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정혁진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김상돌과 시마다가 보름 후에 큰 계획을 발표한다고 했습니다."
"큰 계획?"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형님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알겠네. 우리도 대비해야겠군."
"예, 한도회 회원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라고 전하십시오. 그리고 동생 분들께도 조심하시라고..."
"산우와 산호에게는 내가 직접 말하겠네. 은혜는... 주님께서 지켜주시겠지."
정혁진이 현장 조사를 마무리하며 일어섰다.
"이산갑 씨, 오늘 조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보고서가 완성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사관님."
두 사람은 다시 격식을 차렸다. 주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혁진이 서류 가방을 들고 현장을 떠나려는 순간, 이산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 형, 고맙네. 그리고... 조심하게."
"형님도 조심하십시오. 요즘 형님 주변을 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정혁진은 현장을 떠났다. 겉으로는 평범한 화재 조사였지만, 실제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중요한 정보 교환이었다.
이산갑은 혼자 남아 탄 잔해를 바라보았다.
'서영아... 조금만 기다려다오.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너의 학당을 다시 세울 거야.'
그는 주먹을 꽉 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조병수, 시마다... 너희들의 악행이 곧 드러날 것이다.'
이산갑은 설계도를 다시 펼쳤다. 학당 재건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서영의 뜻을 이어가고, 조선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