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가문저택
강씨 가문 저택, 사랑방
강무일은 이산갑을 마주 앉혀놓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고민하는 빛이 있었다.
강무일: "이산갑 선생이라 했소?"
이산갑: (공손히) "네, 강 영감님. 이충헌의 아들 이산갑입니다."
강무일: "함평이씨... 무인 집안이지."
이산갑: "...그렇습니다."
강무일: "내 딸 지윤이는 강항 선생의 증손녀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학과 성리학을 이어온 가문이오."
이산갑: (고개를 숙이며) "잘 알고 있습니다."
강무일: "그런데 무인 집안의 자제가 내 딸과 혼인하겠다고? 문무가 다르고, 집안의 전통이 다른데 말이오."
이산갑은 침묵했다. 강무일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강무일: "게다가..." (목소리를 높이며) "선생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소. 계몽학당? 일본 당국에 찍혀 있지 않소?"
이산갑: "...그렇습니다."
강무일: "윤서영이라는 여자가 선생의 학당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됐소? 고문당해 죽지 않았소?"
이산갑의 주먹이 떨렸다.
이산갑: (낮은 목소리로) "...제 잘못입니다."
강무일: "내 외동딸을 그런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소. 박종진이라는 청년은 조선총독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요. 안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소. 그런데 선생은 뭘 보장할 수 있소?"
이산갑은 고개를 들어 강무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산갑: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강무일은 놀라 이산갑을 바라보았다.
이산갑: "저는 영감님 따님께 안전한 삶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부귀영화도, 편안한 생활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강무일: "그걸 알면서 혼담을 청하러 왔소?"
이산갑: (단호하게)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강지윤 선생을 평생 존경하고, 함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무일: "존경? 사랑은 아니란 말이오?"
이산갑은 잠시 망설였다.
이산갑: "...저에게는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윤서영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입니다."
강무일: "그런 사람이 내 딸과 혼인하겠다고?"
이산갑: "하지만 강 선생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저에게 서영을 대신하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동반자로 오신 것입니다."
강무일: (냉소하며) "말장난이오."
이산갑: (진지하게) "아닙니다. 저는 강 선생님을 만나면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던 제가,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무일은 말없이 이산갑을 바라보았다.
이산갑: "영감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 언제 일본 경찰에 잡혀갈지 모른다는 것... 모두 사실입니다."
강무일: "그걸 알면서도..."
이산갑: "하지만 저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민중들이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제 사명입니다."
강무일: "그 사명 때문에 내 딸을 희생시키겠다는 거요?"
이산갑: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강 선생님 본인이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와 함께 걷기로."
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윤: "아버지."
문이 열리고 강지윤이 들어왔다. 강무일은 놀라 딸을 바라보았다.
강무일: "지윤아, 네가 왜..."
강지윤: (무릎을 꿇으며) "아버지, 저는 이산갑 선생님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강무일: "지윤아,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느냐?"
강지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며)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위험하다는 것도, 고생할 것도, 평생 불안 속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것도."
강무일: "그런데도..."
강지윤: "하지만 저는 안전한 삶보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합니다. 박종진 씨와 혼인하면 편안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제 영혼은 죽을 것 같습니다."
강무일은 입을 다물었다.
강지윤: "저는 일본에서 식품영양학을 배웠습니다. 그 지식을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습니다."
강무일: "그건..."
강지윤: "이산갑 선생님의 학당에서 저는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민중들에게 영양학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이산갑은 강지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강지윤: "아버지, 제가 평생 후회하며 살게 하지 마세요. 어머니처럼..."
강무일은 깜짝 놀라 딸을 바라보았다.
강무일: "네 어머니가 무슨..."
강지윤: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포기하셨다고. 그리고 평생 후회하며 사셨다고."
강무일은 말을 잃었다. 그는 아내 한정임의 편지를 떠올렸다.
강지윤: "저는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선택한 사람과 함께, 제가 선택한 삶을 살고 싶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강무일은 이산갑과 강지윤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강무일: (한숨을 쉬며) "...박종진이 혼사를 파했다."
강지윤: (놀라며) "네?"
강무일: "그의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남기셨다고 하더구나. 사랑 없는 혼인은 하지 말라고."
이산갑: "..."
강무일: "그래서... 나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구나."
강지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강무일: (이산갑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하시오."
이산갑: (고개를 숙이며) "말씀하십시오."
강무일: "내 딸을 지키시오. 서영처럼 만들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딸만큼은 지키시오."
이산갑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산갑: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강무일: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며) "행복하게 해주시오. 부귀영화는 아니어도...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며 살게 해주시오."
이산갑: "평생토록 존경하고,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강무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일: "...혼인을 허락하겠소."
강지윤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강지윤: (울먹이며) "고맙습니다,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강무일은 딸의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참았다.
강무일: "행복해라, 지윤아... 그것이 아비의 유일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