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새벽, 영광 이산갑의 집
이산갑은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여린 새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른 아침을 알리는 종달새의 맑은 지저귐이었다. 반쯤 덮인 이불을 밀어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얇은 솜이불 아래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이 어느새 초봄임을 알렸다. 침상 옆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의 정갈한 가구들과 먼지마저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작은 창 너머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아직 움트지 않은 가지를 하늘로 뻗어 있었다.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연한 가지들이 가녀리게 흔들렸다. 이산갑은 잠시 그 나무를 바라보며, 언젠가 꽃망울이 터질 날을 조용히 기다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마당 한구석에는 겨우내 쌓인 낙엽 더미가 남아 있었고, 여전한 찬 기운에도 불구하고 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내려앉았다. 방금 전 그의 잠을 깨운 그 고운 울음이, 어느새 다시 새벽 공기 사이로 번져나갔다.
저 멀리 들녘에선 논두렁을 손보는 이웃 농부들의 삽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산갑은 마룻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앉은자리에서 한참을 가만히 내면의 평온을 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어쩌면 오늘도, 어제처럼 별일 없는 하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가라앉지 않는 무거운 그림자가 있었다. 잊으려 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처럼 말이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올렸다. 성호를 긋고 주의 기도를 마친 뒤 묵상을 하고 나서 대청으로 나가 산에 오를 배낭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댓돌 위에 놓인 가죽신을 신으려던 그 순간, 나뭇가지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유난히 맑고 경쾌하게 울었다.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 그리고 이 하루를 온전히 받아들여라."라고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는 이산갑의 귓가를 울리며 그의 고뇌에 찬 하루에도 작은 위안과 다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이산갑이 산에 갈 채비를 하고 마당에 내려오자 하인들이 그를 배웅하려 나와 인사를 한다. 작은 짐을 들고 대청을 내려와 마당으로 발을 디디자, 미리 기척을 들은 하인들이 문간채에서부터 달려 나와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오늘도 이렇게 일찍 나가십니까?”
잔잔한 미소를 띤 상돌이가 공손히 물었다.
“응. 해가 더 오르기 전 산길을 타야지.”
이산갑은 짧게 대답하며 하인들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주었다. 그의 말투엔 군더더기가 없었고, 눈빛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외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마루 끝에 서 있던 늙은 하녀 막심 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산바람이 찹니다요, 도련님. 겉옷을 하나 더 걸치시지요.”
이산갑은 그녀의 손에 들린 옅은 갈색 솜도포를 받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막심이. 언제나 살뜰하구려.”
그 말에 막심 이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돌보아 온 도련님이, 여전히 한결같은 인품으로 말을 건네는 그 순간이 그녀에겐 고맙고도 짠한 기억이 되어 가슴에 새겨졌다.
도포 끄트머리를 다잡고 천천히 외문을 향해 걸어가는 이산갑의 뒷모습에, 하인들과 막심 이는 어디선가 곧 훈풍이 불어올 것만 같은 아침의 희망을 조심스레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