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119)0

모의

by seungbum lee

영광 읍사무소 뒤편 창고, 1928년 늦가을 밤
어둠이 내린 읍사무소 뒤편. 아무도 없는 창고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모였다.
박성표, 백정치, 그리고 구판길.
촛불 하나만이 그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구판길은 오십 대 초반의 사내였다.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그는 마을에서 악명 높은 선동가였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였다.
구판길: (담배를 피우며) "그래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뭔가, 박 서기?"
박성표: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하게. 누가 들으면 안 돼."
백정치: (비굴하게) "면서기님께서 중요한 일을 의논하자고 하셨습니다."
구판길은 박성표를 빤히 바라보았다.
구판길: "이산갑 도련님 학당 때문이지?"
박성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표: "그렇네. 이산갑의 계몽학당...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구판길: (코웃음 치며) "계몽학당? 듣기 좋은 이름이지. 사실은 독립운동의 소굴 아닌가."
백정치: "맞습니다. 그 윤서영이라는 여자도 수상쩍고요. 학생들한테 무슨 소리를 가르치는지..."
박성표: (엄숙하게) "이대로 두면 우리 마을이 일본 당국에 찍힐 것이네. 내선일체에 역행하는 위험한 곳으로 낙인찍힐 거야."
구판길: (날카롭게) "그래서? 자네들이 나한테 바라는 게 뭔가?"
침묵이 흘렀다.
박성표는 구판길과 백정치를 번갈아 보았다.
박성표: (낮은 목소리로) "... 학당을 없애야 하네."
백정치: (놀라며) "없앤다니... 그게 무슨..."
박성표: "학당이 사라지면... 이산갑도 활동할 수 없어. 윤서영도 마찬가지고."
구판길: (천천히) "학당을 없앤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박성표는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박성표: "... 불이지."
백정치는 숨을 삼켰다. 구판길은 성냥갑을 바라보며 비웃듯 웃었다.
구판길: "하하... 역시 면서기 양반이시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구먼."
박성표: "이것은 민족을 위한 일이네. 이산갑 같은 자들이 계속 저항하면... 조선 민족 전체가 일본 제국의 보복을 받게 될 거야."
구판길: "그래, 맞는 말이지. 일본을 이길 수 없는데 쓸데없이 저항해서 뭐 하나."
백정치: (불안하게) "하지만... 학당에 불을 지르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박성표: "그래서 자네들이 필요한 거네."
구판길: (눈을 가늘게 뜨며) "... 어떻게?"
박성표: "구 씨, 자네는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일가견이 있지 않나. 학당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퍼뜨려주게. 일본 경찰이 주시하고 있다고, 마을이 화를 입을 수 있다고."
구판길: "그 정도는 쉽지."
박성표: "그리고 백 씨."
백정치: "네, 면서기님."
박성표: "자네 어머니... 강점순 씨를 통해 아낙네들 사이에 불안을 조성하게. 학당 때문에 마을이 위험하다고."
백정치: "... 알겠습니다."
구판길: (박성표를 뚫어지게 보며) "그래서... 누가 불을 지르나?"
박성표는 잠시 망설였다.
박성표: "... 내가 일본 경찰과 접촉하겠네. 그들에게 학당이 불온한 곳이라고 보고하면... 알아서 처리할 거야."
구판길: (비웃으며) "일본 놈들한테 떠넘기겠다는 거로군. 자네 손은 더럽히지 않고."
박성표: (목소리를 높이며) "이것은 민족을 위한 선택이네! 개인의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구판길: "좋아. 하지만 나는 자네 같은 위선자가 싫어."
박성표: "뭐라고?"
구판길: (일어서며)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결국 일본 놈들한테 고자질하는 거 아닌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나는 일본 제국에 충성한다'라고."
박성표: (주먹을 쥐며) "자네가 뭘 안다고..."
구판길: (손을 흔들며) "됐네, 됐어. 어차피 나도 일본 놈들 편이니까. 하지만 나는 위선 떨지 않아."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구판길: "학당에 대한 소문은 퍼뜨려주지. 그게 내 몫이니까. 하지만 불 지르는 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
박성표: "구 씨!"
구판길: (돌아보며) "그리고 박 서기. 하나만 말해두지. 이산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의 집안은 함평이 씨, 무인 집안이지. 건드리면... 자네가 다칠 수도 있네."
박성표: "... 협박인가?"
구판길: (웃으며) "충고지. 뭐,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