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걷다보면

길에대한 잔상

by seungbum lee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천천히 차분해진다.
시끄럽던 생각들은 나를 잠시 놓아주고, 대신 오래된 기억들이 손을 내민다.



어떤 기억은 따뜻하고, 어떤 기억은 조금은 쓸쓸하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는 그 모든 것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
조화롭게 놓여 있을 뿐이다.

길의 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듯 단단하다.
사람들이 오가며 남긴 숨결과 발걸음의 파동이 그 표면에 고요히 새겨져 있다.
가장자리에 붙은 문들은 말없이 닫혀 있지만, 막연히 안쪽에 누군가의 삶이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침 햇빛이 담장과 나무 사이를 스치며 만들어낸 금빛 그림자의 물결은
마치 이 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오래된 성소처럼 보이게 한다.



나는 이 길을 아주 천천히 걷는다.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발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내가 걷는 길을 조용히 축복해준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그저 걷는 것뿐인데,
그 단순한 행위가 마음의 먼지를 차분히 내려앉힌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서 보면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가고
나무 잎이 가볍게 흔들린다.
그 순간은 아주 짧은데
이상하게 마음 속에서는 오래 머문다.
마치 내가 한참 동안 누군가에게 부드럽게 안겨 있는 느낌이다.



사람은 어쩌면
이런 길 하나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쉽게 보여주지 않지만
힘들 때 조용히 찾아가 쉬어가는 길.
무언가를 잃었을 때나
너무 많은 것을 안고 있을 때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길.



이 길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난다.
과거에 바라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먼날의 나.
그들이 서로 다정하게 맞잡아 주는 자리.
누구도 밀려나지 않고
누구도 크게 나서지 않는다.
그저 함께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나는 이 길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키는 것과 닮아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작고 반짝이는 보석처럼 간직하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어떤 날
삶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을 때
나는 또 이 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가만히 말해본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조용히 살아도 괜찮다.
너는 지금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