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산우
66마을 동구밖에 이르자 동생 이산우가 마중나왔다.
"형님, 산에 다녀오시는 길이신지요."
세무서장을 하는 젊은 동생 이산우가 이산갑의 봇짐을 받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양복 차림의 산우는 형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산우는 이충헌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형 이산갑을 극진히 따랐다. 형제 중 누구보다 형의 뜻을 잘 이해하고 존경했다.
"응, 산우 왔구나."
이산갑은 훤칠한 키의 동생을 올려다보며 반갑게 맞이했다. 비록 동생이 자신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형제간의 정은 변함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세."
두 형제는 안방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막심네가 정성스럽게 차를 내왔다.
"형님, 요즘 많이 힘드시죠?"
산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네... 서영이 일도 그렇고, 학당도 다시 지어야 하고..."
"학당 재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조병수 그 자가 방해를 한다면서요?"
산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야.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
"그렇습니다, 형님. 법성포 조창을 통해 서울로 보내는 쌀과 물자의 양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산우는 한숨을 쉬었다.
"세무서장으로서 저도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있습니다. 조선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일본으로 보내지는 쌀은 나날이 늘어나고..."
"고통스럽겠구나."
"형님, 더 큰 문제는 총독부에서 세금 징수를 더 늘리라고 압박해옵니다. 이미 백성들이 낼 수 있는 한계를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산우는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형님, 이것은 많지 않지만 학당 재건에 보태십시오."
봉투 안에는 상당한 금액이 들어있었다.
"산우야, 이건..."
"형님께서 하시는 일이 진짜 조선을 지키는 일입니다. 저는 비록 일제의 세무서에서 일하지만, 형님만큼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이산갑은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산우야. 하지만 너도 조심해야 한다. 총독부의 징수 요구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고..."
"형님, 저도 압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세무서장 자리를 거부하면 더 악질인 친일파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알아, 알아. 너도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이산갑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산우야, 집안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지금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시기야.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견뎌내야 해."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제수씨에게 전해라. 이번 한가위 명절에는 꼭 식구들과 함께 집에 들르라고."
"예, 형님. 아내도 형님 뵙고 싶어 합니다."
이산갑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갑으로 갔다.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문서 한 뭉치를 꺼냈다.
"산우야, 이것을 받아라."
"이것은... 염산 먹굴의 전답문서?"
산우의 눈이 커졌다.
"형님, 이건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원래 아버님 옛터에서 네 몫으로 나온 것이야. 내가 관리하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받아두어라."
이산갑은 동생의 손에 문서를 쥐어주었다.
산우는 형의 진심을 느끼며 문서를 받았다.
형님... 감사합니다."
"산우야,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재산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이산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래서 재산을 미리 분산해두려고 한다. 한곳에 모두 두었다가는 한 번에 빼앗길 수 있으니까."
"형님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다."
"너는 세무서장이니까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어. 그 땅을 네 명의로 해두면 일제도 함부로 손대기 어려울 거야."
산우는 형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형님, 형님은 언제나 멀리 보십니다."
"먼 미래를 보는 게 아니야. 그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뿐이지."
이산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영이를 잃고 나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더구나. 우리가 가진 것들도 언제든 사라질 수 있어."
"형님..."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재산이 아니라 조선의 혼이야. 땅과 재산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우리의 정신을 잃으면 영원히 잃는 거야."
산우는 형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산우야. 너는 총독부 세무서에 있지만, 네 마음만은 조선인으로 남아있어야 해. 그것이 진짜 우리를 지키는 길이야."
"알겠습니다, 형님."
두 형제는 한참 동안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제간의 깊은 정과 조선을 향한 걱정이 교차했다.
해가 저물어 산우가 일어섰다.
"형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거라. 그리고 제수씨에게 내 안부 전해주고."
"예, 형님. 한가위 때 꼭 뵙겠습니다."
산우가 나간 후, 이산갑은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재산을 분산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뜻을 이어갈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야.'
그는 서영을 생각했다. 그녀처럼 뜻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여전히 무겁게 남아있었다.
'산우만이라도 안전하게 지켜야 해. 그 아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조선인이니까.'
이산갑은 문갑을 닫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더 힘든 날들이 올 것임을 예감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